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제대로 봐요
“그랬군.”
백우진이 내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고르곤이라고 하는 범죄 조직에서 안드레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보내 백수아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고르곤…이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 국내에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백우진의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와 그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거대한 범죄 조직이라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알고 있는 건지. 외국의 헌터 세력에 대해서도 빠삭하다고 하면 납득할 수 있었지만. 백우진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협력 대상이었습니다.”
그건 필시 플레이아데스 길드와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몇 번 방문해 거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백우진은 그곳에 방문한 적도 있다고.
“사실은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두고 거액의 금액이 오갔죠. 어딘가 물밑에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대금 거래와 같은 일은 백우진에게 맡기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언가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뜻.
“그럴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돈이 빠져나가면 감사라든가, 하는 게 뜨는 거 아니었나?”
협회에서 클레어에게 감사를 진행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더니, 백우진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걸 되게 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돈 세탁이 특기였다는 거군.
길드장이었던 백견우가 백우진에겐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갔다.
백우진을 믿지 못해서 따돌리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혹시 모를 일에 의해 꼬리를 자르더라도 큰 타격을 입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백우진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묵묵히 하고 있던 걸 보면 마냥 떳떳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남에게는 굳이 밝힐 이유가 없는 이야기를 꺼내면서까지 내게 이 사실을 전하는 이유는 모두,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거기서 백수아를…….”
그렇다면 백수아는 지금쯤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는 건가.
신분증이 없을 텐데 어떻게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통과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범죄 조직이라면 신분을 위장해 국경을 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이번 일은 나에게도 가만히 손 놓고 지켜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백수아는 망량의 누나인 ‘이매’와 관련이 있는 아이였다. 망량은 그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얘기가 달랐다.
무언가 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러시아로 향해야만 하는 건가.
“거래 내용은 간단합니다. 당신이 내 일을 도와주면, 나도 당신 일을 돕겠습니다.”
피차 원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건 아닐 텐데.
백우진이 내게 원하는 건 백수아를 데려오는 것일 거다.
하지만 백수아는 단순한 미아가 아니었다. 이국 땅의 거대 범죄 조직이라는 고르곤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보내 일부러 데려갈 정도로 신경 쓰는 대상이었다.
어쩌면 조직의 수뇌부. 혹은 그 전체를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는 내가 백우진에게 해 주길 바라는 일도 어지간한 일은 아니었다.
매니저 일이라고 표현하면 간단하지만, 실제론 주대현이 주도하는 세계적인 작전. 일의 규모부터가 다르니, 실제로 일을 떠맡았을 때 얼마나 귀찮아질지는 미지수다.
‘망량의 일도 있고 하니.’
내게는 수지타산이 맞는 일로 여겨졌다.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만…….”
백우진이 미리 경고했지만. 그런 건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백우진 씨도 알다시피, 그건 나한테 문제가 안 됩니다.”
“…그 부분은 믿고 있습니다.”
백우진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플레이아데스 길드를 무너뜨린 게 누구인지.
설령 고르곤이라는 조직이 플레이아데스 길드보다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부담은 되지 않았다.
설마 전면전을 펼칠 일은 없을 거고.
“그럼.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백우진이 계획과 일정을 세우고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 * *
“러시아…요?”
클레어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물었다.
“갑자기 웬 러시아예요?”
“일 때문에요.”
“일……?”
클레어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나.
내가 일하는 곳은 각성자 지원 센터. 협회와 달리 센터는 최강현이 독자적으로 세운, 국내에만 있는 집단이었다. 이국 땅으로 출장을 갈 일은 생기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내가 말한 일이라는 건 조금, 마찰이나 갈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며칠이나 가는데요?”
“글쎄요, 비행기 시간도 있으니까 아무리 짧게 잡아도 사흘……. 거기 땅이 되게 넓으니까 한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요?”
나도 러시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없다. 아는 거라곤 춥고 불곰이 나오고 보드카를 자주 마신다는 것 정도.
그 부분은 직접 동행하는 백우진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으…….”
클레어가 반달눈으로 노려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따라오려 해도 러시아 정도로 먼 곳까지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법 오랜 시간을 있게 될 테니, 바쁜 클레어로선 시간을 내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와 달리 공적인 활동도 해야 하는 분이니까.
“그렇게 걱정이에요?”
내 물음에 클레어가 표정을 풀었다.
“걱정이라기보단…….”
클레어도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거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내 안전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걸.
달리 걱정할 게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한 건데.
이번엔 백우진이 함께하기도 하니까, 그 부분도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냉정한 전략가가 붙어 있으니.
“그냥 싫은 건데요.”
“그냥 싫은 건 또 뭐예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아주 생떼도 쓰네.
하지만 클레어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볼멘소리로 덧붙였다.
“그동안 못 보잖아요.”
“…….”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클레어를 바라보니, 클레어는 낯부끄럽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뭐 해요?”
“카메라 찾아요.”
그러자 클레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아니, 미안합니다. 너무 의외라서 그만…….”
“뭐가 의왼데요. 이상해요? 내가… 당신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는…….”
다만 조금 적극적인 공세에 정신을 못 차렸을 뿐이었다.
“이제는 남들 앞이 아니라고 뺄 이유도 없잖아요.”
그거야 그랬다.
지금까지는 남들 앞에서 보여 주기 위한 가짜 부부 행세를 했을 뿐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클레어의 집에서 지내고 있고. 낮에는 서로 일을 하고, 밤에는 돌아와 각자 시간을 가졌다.
‘아니……. 좀 기둥서방 같나?’
원래라면 비즈니스를 위한 숙소 제공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는데. 이제는 진짜 여자 집에 얹혀사는 남자였다.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나로서는 조금 껄끄러운 사실이었다.
“그럼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값을 하세요.”
“이보세요. 먹여 주는 건 저 아닙니까?”
“…아무튼 간에.”
이렇게 외로움을 탈 줄은 몰랐다.
거기에 대고 매몰차게 굴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좋아요. 뭐 할까요?”
내 질문에 클레어는 미리 정해 둔 것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마사지요.”
“마사지?”
마사지라.
의외의 제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클레어의 매니저 행세를 할 때에는 제법 자주 해 줬으니까.
결코 이상한 마음을 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클레어의 몸이 굳어 있는 게 눈에 띄어서 다듬어 준 것이었다.
각성자는 주로 마력에 대한 소질이 가장 중요하고, 그 부분이 뛰어난 클레어도 높은 평가를 받아 왔지만. 정작 몸을 쓰는 데에선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니.
‘지금 굳이……?’
다만 그 단점은 대부분 해결해줬고. 청진명의 팀에 들어간 후에는 선배들의 조언과 대련을 통해 신체적인 기술도 잘 갈고닦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클레어는 지금 내 보조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다.
“…그냥 좀 해 주면 안 돼요?”
어려울 건 없었다.
“그럼 하는 김에 대련도?”
그 역시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남을 가르치는 데에는 소질이 없어서 실전 형식으로밖에 도와주지 못하기에, 대련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나도 검을 쥐어 본 적이 드물었고.
그때 생각이 떠오른 건지, 클레어는 안면을 찌푸렸다.
“그건 됐어요.”
호불호가 확실했다.
* * *
“아, 이거.”
클레어가 꺼내 온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웃지 마요.”
클레어가 째릿하고 시선을 보냈다.
클레어가 꺼내 온 건 저번에 클레어가 샀던 마사지용 침대였다. 이걸 사서 나한테 마사지를 해 주겠다니 뭐니 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웃기는 추억이 되어 있었다.
“난 안 웃기거든요?”
그럴 수도 있지.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클레어는 등을 보이고 엎드려 누웠다.
나도 얌전히 클레어의 몸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클레어의 몸에 별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문제가 있는 부분을 해결하려 해도 그걸 찾을 수 없었다.
‘유연성 좋고. 어디 뭉쳐 있는 데도 없고.’
손끝에 걸리는 근육들이 부드럽게 반발하고 있었다.
처음 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기를 눌러 담아 점혈을 했더니, 클레어가 깜짝 놀라 튀어오른 적도 있었다.
그때도 나름대로 잘나가는 헌터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클레어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성장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엔 해야 할 일도 많았고. 고쳐야 할 문제점도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딱히…….’
단지 클레어가 원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의무적인 느낌으로 견갑골 근처를 주무르면, 클레어의 숨소리가 내 손길을 따라가고 있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떼울 수도 있지만. 이왕 하는 거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따로 불편한 데는 없어요?”
“다 불편해요.”
“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으면 내가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엄살은 부리지 말고요.”
“엄살 아닌데.”
“딱히 불편한 데는 없어 보이는데요?”
“아, 내가 불편하다는데.”
그때 클레어가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클레어의 등 뒤를 가리고 있는 널찍한 타올이 스르륵 하고 바닥 위로 떨어졌다.
원래 클레어를 마사지할 때는 커다란 타올으로 몸을 덮어 두고 했었다.
“저기…….”
수건을 덮는다고 해서 이상을 놓치고 지나갈 내가 아니었다. 손으로만 만져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애초에 근육이라는 건 원래 피부 아래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 그 위에 수건이 있건 돌덩이가 있건 손끝으로 그 미세한 기를 느끼면…….
눈으로 보이는 것 따위, 모두 환상이고 허상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들,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건 아래의 클레어는 무척이나 얇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평소 클레어는 집에서도 기장이 긴 실내복을 입고 다녔지만. 이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 입고…….”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했다. 심장이 가슴을 쿵쿵 두드려 대는 탓에 혀가 꼬일 것 같았다.
“글쎄요? 어떨까요? 당신이라면 알 것 같은데.”
곤란한 질문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얇게 입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오늘만 이렇게 입은 거라면… 그다지 덥지도 않은데 왜 이런 거냐는 물음을 꺼내기도 바보 같았다.
시선을 뒤로 돌린 것도 아니면서, 클레어는 무슨 상황인지 뻔하다는 것처럼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제대로 봐요.”
그 목소리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