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보는 눈은 있네
“이 앱니까?”
연락을 받고 합류한 백우진이 물었다.
백우진은 지금껏 이전의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몸담고 있던 길드가 없어졌다고 해서 그가 활동하며 얻었던 지식들 또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르곤이라는 조직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문제는…….
‘이게 과연 안전한 정보일지.’
일부 정보 중에선 플레이아데스 길드에게만 밝혀진 사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사용한다면 역으로 자신이 추적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호의적인 관계였다면 그런 식으로 밝혀져도 상관없었겠지만.
두 집단은 철저히 이해관계로만 얽힌 사이였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지금, 옛정에 호소한다고 하여 친절하게 맞이해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전 부길드장, 직함뿐인 심부름꾼으로 온 것이 아니라.
개인 백우진으로서 찾아온 것이다.
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자격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듯 도율이 먼저 조직원을 찾아 준 건 행운이었다.
그가 시선을 보낸 곳엔 러시아인 소녀가 지루하다는 듯 다리를 까딱이며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래.”
도율은 맞는다고 답했다. 이 소녀가 고르곤의 문신을 새긴 아이라고.
비슷하게 생긴 다른 문신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스스로 새긴 게 아니라면야, 이런 착각할 만한 문신을 새겨 줄 만한 문신사는 없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 문신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니, 조직에 혼란을 야기할 만한 짓을 벌여 밉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조직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백우진이 다시 한번 소녀를 바라봤다.
‘어리군.’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보는 생면부지가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들 만한 일도 아니었다.
백우진이 도율에게 물었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그냥 돌아다니다가 찾았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묘하게 잘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것도 그렇고.”
그렇다. 도율은 딱히 소녀를 붙잡은 채로 기다리던 게 아니었다.
지루하다는 듯 다리를 흔들고 있었지만, 소녀는 자의적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도망치려 할 때마다 도율이 붙잡아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상태였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도율이나 새로 등장한 백우진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쳐다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따르게 된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니었을지.
백우진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도율이 간단히 이전 상황을 설명했다.
“별거 아닙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어떤 어른 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길래 조금 도와준 것뿐입니다.”
“조금?”
“겁을 줘서 쫓아낸 정도입니다.”
도율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그도 외국 땅에서 큰 소란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몇 대 패거나 했으면 패거리를 이끌고 와서 일이 커졌을 수도 있고, 그럼 당연히 소란과 다툼을 조율하는 자들이 냄새를 맡을 게 뻔했다.
그들이 경찰이라면 귀찮지만 다행인 일이었고. 이쪽 구역을 관할하는 조직의 눈에 띄게 된다면, 백우진의 계획이 꼬이게 되는 걸 테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보니 크게 번질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때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야, 계속 자기들끼리 떠들고.”
카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 이 자리에 있는 세 번째 인물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기다리게 해 놓고 방치한 채로 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법 유능한 조직원이라면 몰라도, 이런 어린아이가 한국말까지 알아들을 가능성은 적었다.
백우진이 러시아어로 답했다.
“실례했군.”
그러자 소녀가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아저씨, 러시아어 할 줄 알아?!”
“조금은.”
“우와!”
이국땅에서 온 자들이 자기네 나라말을 할 줄 아는 게 그리도 신나는 일인지. 소녀는 단숨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들 어디서 왔어? 중국?”
“한국.”
“아! 나 거기 알아. 일본 옆에 있는 거기 맞지?”
“그래.”
“위에 거? 아래 거?”
“아래.”
어린 나이치고는 제법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를 때인데, 보이는 것과 달리 공부를 곧잘 했던 걸까.
그런 아이가 지금은 몸에 뱀의 문신을 새기고 조직에 들어가 있다니.
중간 고리가 결여된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백우진은 그 위화감을 억눌러 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필요한 질문을 했다.
“넌 고르곤의 조직원이냐?”
고르곤도 제법 커다란 조직이다. 보스를 필두로 한 수뇌부까지 가면 길거리에서 삥이나 뜯는 양아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그 아래로 파생되는 하위 조직이나 지역 담당 지부장,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심부름꾼이나 일회용 장기말까지 가면 그 품질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힘깨나 쓴다는 멍청이들이 쓸 만했지. 이런 어린아이 태가 나는 여자애까지 부릴 줄은 몰랐다.
물론, 그런 아이라 해도 사용하기 나름이었지만…….
거기까지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소녀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양손으로 몸의 일부를 꾹 눌러 가렸다. 짐작하기로는 문신이 있는 위치일 게 분명했다.
옷으로 가리고 있어도 도율에게는 알 방법이 있었다. 그의 말을 백우진은 믿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도 그 내용으로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네 보스는 누구지?”
이런 아이가 진짜 보스를 소개해 줄 리는 없었다. 이 애의 보스라면 고작해야 지부장이나 팀장 정도일 터였다.
거기서부터 타고 올라가면 될 일이었다.
“아저씨 바보야? 누가 그런다고 예, 보스를 찾고 싶으시군요. 하고 순순히…….”
“옐레나-!”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백우진과 도율, 그리고 소녀가 돌아봤다.
두 사람은 단순히 큰 소리에 시선을 준 것이지만, 소녀는 그보다 놀란 듯한 눈치였다. 뜨악한 반응을 보니, 저 옐레나라는 것이 소녀의 이름인 듯했다.
소녀의 이름을 외친 배불뚝이 아저씨가 생선 써는 사시미 칼을 들고 있었다.
“아까 봤던 아저씨군.”
도율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뒤로는 몇 명인가 사람들이 좀 더 모여 있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험악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직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앞서 떼거리로 몰려온 것에 불과한, 평범한 남자들.
“이크… 일단 튀자!”
소녀. 이름이 옐레나로 추정되는 아이가 상자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달음박질쳤다. 발이 빠르고 몸놀림이 날래서 금방 거리를 벌렸다.
도율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자들은 주춤하며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 든 연장은 겁박용 장식이 분명했다.
그런 도율에게 백우진이 물었다.
“상대할 겁니까?”
“…….”
도율은 그들을 가늠하더니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도 튑시다.”
두 사람이 옐레나의 뒤를 따랐다.
* * *
“저 애 이름입니까?”
도율이 물었다.
“그렇다더군요.”
소녀의 이름은 옐레나. 남자가 외쳤던 것이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단순히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라, 이름과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옐레나는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보스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 좋아. 소개해 줄게. 괜히 나중에 울고불고 질질 짜면 안 된다?”
그러고는 앞장을 서며 골목을 빙빙 돌았다.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에 걸려 자취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골목에는 어둑하게 어둠이 드리웠지만, 지금부터가 진면목이라는 것처럼 활기를 띠려 하고 있었다.
앞서 걷던 옐레나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복잡한 표정을 내비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조직에 데려가도 되는 건지 저울질을 하는 걸로 보였다.
그 뒤를 잠자코 따르며 도율과 백우진은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이곳에선 흔한 일입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조직에 몸을 담는 건.”
“…….”
도율에게도 익숙한 일 중 하나였다.
철이 들기 전부터 내공을 깨우치기 위해 수련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 세상에 있었으니. 그곳에서의 사정도 이곳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정파 무공에 몸담아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나마 나은 상황. 그보다 못한 놈들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동네에서 문파를 자칭하는 무뢰배들 사이에 섞여 근본 없는 주먹질이나 익히며 자랐다.
그러니 불필요한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걱정하는 겁니까?”
“…실례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클레어 씨를 겹쳐 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습니다.”
“안 그럽니다. 별로 닮지도 않았고.”
“어린아이기도 하다 보니.”
그런가?
도율이 보기엔 그렇게 어리진 않았다. 충분히 사리 분별이 될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거의 혼자 가게를 굴리는 서지유와 같은 나이가 아닐까.
백우진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옐레나의 나이를 가늠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생 정도겠죠.”
“예?”
도율이 다시금 옐레나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물었다.
“저 키로 말입니까?”
“원래 서양인은 발육이 빠릅니다.”
그 정돈가?
그 부분에 있어선 도율도 짚이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가 있던 곳은 동양인들로 가득한 세계였으니.
“당신이 그걸 모릅니까?”
“아니, 뭐…….”
백우진이 의아하게 묻는 말에 도율도 할 말이 없었다.
클레어가 성장하는 모습을, 도율은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으니, 제 입으로 말하기 전까진 동일인이란 생각도 못 했다.
‘잠깐…….’
그런데 저렇게 다 자란 것처럼 보이는 옐레나가 중학생이라고 친다면. 도율이 봤던 어린 시절의 클레어는 대체.
‘…몇 살이었던 거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나이가 얼마나 어렸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나이를 알 수 있었는데. 중학생이라 친다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열여섯. 그보다 어리다 쳐야 하는데 일단 그걸 최대로 잡고 10년을 계산하면. 거기서 더 낮춰야 하는데…….
‘아니, 아니지.’
동생인 도은이가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고 다니지 않았나. 설마 나이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그랬겠나.
아무리 서양인이 빨리 자란다고 해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마다 크게 자라는 때는 다른 법이니. 극단적인 두 예시를 마주친 것뿐이겠지.
도율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기야.”
옐레나가 떨떠름하게 낡은 주점으로 향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도율도 원하는 장소에 도착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백우진과 옐레나가 함께 걷고, 도율이 반걸음 뒤에서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부턴 조금 경계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녹슨 경첩 소리와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소리가 즐비한 주점에 들어서니, 꺼져 가는 불빛처럼 어두운 조명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남자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거구와 완전히 밀어 버린 머리카락. 심지어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를 보고 도율이 물었다.
“…이 남자가 보스인가?”
백우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고. 돌아온 대답은 반대였다.
“이쪽은 문지기 칼 씨.”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찢을 것 같은 시선을 보내던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보스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자격이라도 증명하라고 할 것처럼 생겨서는, 오는 사람을 함부로 막지 않았다.
“괜히 헷갈리게…….”
백우진을 통과시킨 칼이란 남자가 도율의 차례를 막아섰다.
“단. 이 남자는 안 됩니다.”
“……?”
왜 나만?
도율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칼이 덧붙였다.
“위험하니까.”
백우진이 번역해 주지 않아도 그 시선에 담긴 두려움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보는 눈은 있네.”
도율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