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
17화 내가 제일 잘하는 게 그거야
“들어가.”
남자들이 나를 밀어 넣은 곳은 쇠창살로 막혀 있는 감옥이었다.
이곳은 자연 발생한 동굴을 개조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암굴이었다. 그중에서도 꼬이고 꼬인 길을 지나 들어온 심층부에 만들어 놓은 감옥이었다. 혹여 쇠창살을 부순다 해도 탈출할 길을 찾지 못하게끔.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손전등을 든 남자들이 멀어지자 동굴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다. 빛이 이렇게 희박하면 아무리 나라도 시야가 좁았다.
내공을 끌어올렸다.
불을 피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이들도 나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허공에서 불꽃을 피워 낼 정도의 인간을 지금처럼 허술하게 방치할 것 같진 않았다.
‘정안正眼.’
내공을 눈에 집중해 안력을 강화했다. 정안은 주변을 올바르게 보는 경지. 빛이 없어도 기의 파동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파악할 수 있다.
단순한 시력을 강화하는 개념을 뛰어넘은 무공. 나는 앞뿐만 아니라 상하좌우와 후방, 심지어 꼬여 있는 동굴의 길마저 내시경을 집어넣듯 파악할 수 있었다.
‘…음?’
그러다 발견한 이상한 점. 그것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근처에 있었다.
내가 갇혀 있는 감옥엔 나 외에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남자는 신문지 따윌 덮고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숨소리도 들려오는 걸 보니 시체는 아니었다.
이런 곳에 갇혀서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 게다가 신참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깨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내버려 둬. 죽이든 구워삶든 마음대로 하라고.”
수염도 되는대로 기른 게 꼭 노숙자 꼴이었다. 이런 곳에 갇혀 지냈으니 행색이 추레해지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겠지만, 그 이상으로 태도에서 자포자기한 듯한 심정이 드러났다.
나를 다른 납치범들의 일행으로 여기는 것 같길래 우선 그 오해부터 정정했다.
“저 방금 잡혀 들어온 신입 이도율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돌아봤다. 워낙 어두워서 눈에 보이는 건 없겠지만, 워낙 가까이 있어서 서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뭐……? 선배님? 미친놈이네, 이거?”
가볍게 무시하고 질문했다.
“선배님은 왜 이곳에 잡혀 계십니까?”
내가 이곳에 순순히 잡혀 온 목적은 정보 수집. 납치범들을 두들겨 패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같은 편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각도에서 접근하면 좋으니까.
“…내가 왜 이곳에 잡혀 있냐고?”
중년의 남자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거야 당연히 그 개같은 연놈들 때문이지!”
큰 소리가 울려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 * *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난 제법 잘나가는 군수 사업 사장이었지. 보급용 장비 제작부터 희귀 아이템 강화, 인챈트까지. 모두 바닥부터 기어올라 내 손으로 일군 자식 같은 사업체였어.”
흐뭇하던 남자의 표정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근데 이용훈, 진선희! 이 두 새끼들이 짜고 내 모든 걸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거야. 내 회사 명의부터 개인 재산까지 싹 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년이 내 아내였거든.”
남자가 한이 담긴 목소리로 자신이 당한 사기극을 상세히 풀어냈다.
그가 말한 이용훈이란 남자는 그의 10년지기 친구였고, 여자는 수년간의 연애를 통해 결혼을 맺은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신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사실 둘은 불륜 관계였고. 의심을 키우다가 현장을 적발했는데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채 모든 걸 빼앗기고 말았다는…….
아침 드라마가 따로 없군.
“여기로 날 납치한 것도 그 새끼들이 사주한 걸 거야. 여기서 내가 뒤지든 말든 지들끼리 붙어먹고 살겠지. 육시럴.”
남자는 다시 몸을 바닥으로 눕히며 말했다.
“목소릴 들어 보니 자네는 아직 젊은가 본데,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물론 여기 갇힌 순간부터 불가능해졌겠지만. 하고 남자가 킬킬 웃었다.
“유감이지만 저도 이미 유부남입니다.”
“그래? 거, 안 됐군. 그럼 마누라 간수라도 잘해. 자고로 옛말에 여자와 복어는 사흘에 한 번…….”
“됐고. 선배님.”
내가 남자의 말허리를 자르고 물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서라, 아서. 너 오기 전에도 전에 무슨 헌터 한 명이 들어왔다가 탈출한 적 있거든? 성공하면 꼭 나도 데려가 준다더니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보나 마나 개죽음당했겠지, 뭐.”
“나가고 싶지 않습니까?”
재차 묻자 남자는 침을 삼키더니 대답했다.
“…당연히 나가고 싶지. 내가 비밀 금고에 갈 수만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역시. 숨겨 둔 수가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사람을 납치하고 귀찮게 살려 두겠는가. 이 사장에겐 아직 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두 사람도 비밀 금고란 걸 열어 보고 싶으니 간을 보고 있는 거겠지.
이 남자를 풀어 주면 옥새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거기까지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사장님 사업체가 헌터 장비 관련이라고 했죠?”
“어, 그렇지. 보급형 장비 제작부터 희귀 아이템 강화, 인챈트…….”
“그건 아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S급 헌터 정도 되면 장비는 아무거나 써도 되는 겁니까?”
내 질문에 남자는 귀를 후비며 반문했다.
“뭔 개소리야? 장비에 돈 제일 많이 쓰는 게 걔들인데.”
“그렇군요.”
역시나.
저쪽 세계에 있을 때도 장비빨을 심하게 타는 게 고수들이었다. 물론 고수들인 만큼 허접한 장비를 쓴다고 해서 실력이 바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장비를 고수의 손에 들려 주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없었으니까.
뭐든지 적재적소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알아냈다.
군수 사업의 바람맞은 중년 사장님. 그리고 S급 헌터의 매니저. 연결 고리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나를 납치한 범인들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원한이 없다는 뜻이다.
제3자.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 주는 의뢰 집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얘들을 직접 잡아서 정체를 캐내도 꼬리가 끊길 뿐이다. 중요한 건 내 납치를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
“선배님.”
“엉?”
남자가 돌아봤다. 불빛이 없어 얼굴을 볼 의미는 전혀 없는데도. 하지만 그래 줘서 다행이었다. 귀찮게 불러 세울 필요가 없어서.
맹렬하게 요동치는 내공을, 불꽃으로 맞바꿨다. 손가락의 마찰 끝에서 터져 나간 화염이 천장으로 쏘아져 길을 그렸다. 출구까지 이어지는 불꽃의 길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 광경을 바라본 남자의 표정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횃불을 촘촘하게 달아 놓은 것처럼 동굴 안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이 부러질 것처럼 천장을 올려다보며 믿기지 않는 일을 얼떨떨하게 받아들이던 그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나를 찾았다.
물론 나는 사라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가지 언질을 남기기 위해서.
나는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도 저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가면 위를 툭툭 두드린 후, 나는 쇠창살을 부수고 먼저 동굴을 빠져나갔다.
* *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민머리의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희 쪽에서 일을 불필요하게 크게 벌인 탓에 우리가 본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남자가 이를 까득 물었다.
그의 이름은 고영철. 이름보다 낫 족제비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사내였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일은 S급 헌터 클레어의 매니저를 납치하는 건에 대한 것이었다.
고영철이 속한 집단은 매니저 이도율을 납치하기 위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좀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담당 헌터인 클레어 컴벨과 붙어 다녔다. 심지어 숙소 역시 같은 곳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날 밤은 말 그대로 절호의 기회였다. 클레어 컴벨은 운전이 미숙한 건지 평소의 날카로운 경계심이 한껏 누그러져 있었고, 시간도 위치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인적이 뜸했다.
클레어 컴벨을 따돌리고 이도율을 납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래서 결행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의뢰인의 배신. 눈에 띄는 사고를 만들었으니 의뢰는 중지. 착수금을 제외한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쪽이라면 이깟 교통사고 정도는 충분히 덮을 수 있을 텐데.”
[아, 그래. 하지만 일이 복잡하게 됐어.]“무슨 뜻이오?”
[센터장이 움직였다.]각성자 지원 센터의 센터장 최강현.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의 뒤를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업계 전체에 뿌리내린 그의 영향력은 협회장과 길드장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가 움직였다는 건 전국적인 수색이 시작된다는 뜻. 이 아지트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꼬리를 자르겠다, 이건가.”
[무슨 소리. 꼭 너흴 버리는 패로 쓰는 것처럼 말하는군.]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뻔뻔하게 위로를 건넸다.
[나도 좋은 거래 상대를 잃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이번엔 일이 이렇게 됐지만, 잘 이겨 내고 또 좋은 만남을 가져 보자고.]알아서 살아남으란 의미였다.
그러면 또 써 줄지도 모른다는.
일방적인 통보 끝에 전화가 끊어졌다. 고영철은 분에 못 이겨 나무 책상을 내리쳤다. 원목으로 된 테이블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반파되었다.
“사냥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면서 뭐가 거래 대상이라는 거냐……!”
그때 고영철의 부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티, 팀장님!”
“…그래. 이곳을 뜬다. 자료는 모두 소각하도록.”
“그, 그게 아니라!”
부하는 숨을 헐떡이더니 복도를 가리켰다.
“탈출했습니다! 한 놈이!”
“상관없다. 작전은 중지다. 내버려 두면 돼.”
“근데 그놈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탈출에 성공했으면 얌전히 도망이나 칠 것이지. 그 복잡한 동굴에서 빠져나온 재주를 높이 사, 굳이 쫓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쪽도 한시가 바쁜 때이니까.
그런데 탈출한 자가 굳이 역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고영철은 짜증을 느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발목을 잡히다니.
그때.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소리도 아닌데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발소리. 점점 다가온다는 걸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이윽고 등장한 건 여우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 아래로는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행색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도율.”
이름을 불린 도율이 가면을 만지고 물었다.
“절 아세요?”
“그럼 누군지도 모르고 납치했을 것 같나?”
“그런가.”
도율이 설핏 웃더니 가면을 벗었다.
“그러면 이건 의미가 없네.”
고영철이 도율의 어깨 너머로 복도를 내다봤다. 뒤를 치러 오는 부하는 아무도 없었다. 소식을 전하러 온 놈도 무슨 조화인지 쓰러져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각성자였나?”
각성자라고 해서 모두가 헌터를 하는 건 아니다. 비전투 특성 위주의 각성자는 각자의 사업 계열에서 활약하고, 은퇴한 헌터가 업계 경험을 살려서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일도 흔했다.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그의 과거 이력은 순백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했다. 20대 초반, 다니던 대학을 중퇴. 그리고 끝이었다. 필시 어딘가의 특수 부대에 들어가 활약했을 터.
그렇다면 부하들을 정리한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고영철의 부하들은 모두 잡다한 심부름을 위해 잠깐 쓰는 동네 양아치 수준. 사실상 이 조직의 핵심이자 전투력은 모두 그에게 달려 있었다.
“탈출에 성공했으면 얌전히 도망이나 갔어야지.”
고영철이 웃옷을 벗었다. 그의 오른손엔 손가락을 넣어 쥐는 너클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나? 미안하지만 이쪽은 프로다. 각성자 간의 전투는 몬스터 따윌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고영철이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나?”
그 말에 도율이 표정을 굳혔다. 고영철은 도율의 반응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영철이 달려들었다. 일반인치고는 빠르지만, 각성자치고는 대단하지 않은 속도. 도율은 반응하기도 귀찮다는 듯 미동도 없었다.
고영철이 휘두르는 나이프는 짧은 편이었다. 도율이 몸을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고영철, 낫 족제비가 원하는 바였다.
‘윈드 블레이드!’
마나를 불어넣어 단검 위를 감싸는 바람의 칼날이 형성됐다. 훨씬 강한 절삭력과 눈에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긴 칼날. 아슬아슬하게 피한 도율의 옆구리를 충분히 깊게 베어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건 본래 칼 좀 박혀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여유로운 태도도 피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곤 했다. 고영철이 사냥해 온 각성자들의 말로가 언제나 그랬다.
고영철은 확실한 손맛을 느꼈다.
캉!
쇳덩이를 두드린 듯한 손맛을.
‘무슨……?’
고영철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보고 있었다. 공격력 하나만큼은 방심하고 있는 A급 헌터도 뚫어 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바람의 칼날이 도율의 셔츠를 갈라 맨살을 드러냈다.
딱 거기까지였다. 칼날은 도율의 옆구리에 막혀 더는 파고들지 못했다.
“야.”
도율이 귀기 서린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고영철은 그런 도율의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게 두려워졌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그거야.”
귀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