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라이브
“그럼.”
백우진이 짧게 인사를 남기고 바 안에 숨겨진 문을 통해 사라졌다.
도율과 백우진 두 사람 모두 낡은 술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락받았지만, 팀장을 만나러 가는 건 백우진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칼이라는 남자가 문지기를 자청하며 도율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칼은 무서운 인상과 더불어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춘 남자였지만, 도율의 앞을 막아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엔 일단 얌전히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 일단은 손님으로 찾아온 거니까.
‘여기서도 충분히 상황은 파악 가능하고.’
기를 펼쳐 주위를 살피고 있으면, 어느 정도 떨어진 백우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순식간에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벽에 걸린 선반 위로 이름 모를 술병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을 제 것인 양 훑던 칼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병 하나와 두 개의 컵을 꺼내며 물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칼 역시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조직이 관리하는 구역인 데다가, 팀장의 은신처 중 하나였다. 그런 구역을 건드리면 뒤에 있는 조직이 움직일 것을 고려한다 해도, 여긴 힘의 논리가 우선인 곳이었다.
도율이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칼은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호의를 베풀어 얌전히 따라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괜찮은 술로 대접하는 것이 도리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이건 제가 아끼는 술입니다. 벨루가 프라임이라는 녀석이지요. 마력으로 정제한 극도로 맑은 물을 사용해 담그죠.”
컵 위로 투명한 술이 아낌없이 따라졌다.
“자. 드십시오.”
칼이 두 개의 잔 중 하나를 도율에게 가까이 내밀었다.
도율은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잔을 받았다. 남이 따라 준 술을 미심쩍게 보는 일도 하지 않았다.
‘경계조차 하지 않는군.’
그런 짓은 하지 않았지만, 이럴 때 술에 독을 타는 놈도 있기 마련이었다.
저 정도 되는 고수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를 리도 없다. 겨우 몇 분 보지도 않은 사이에 신뢰가 쌓인 것도 아닐 테고.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든다는 것은.
‘독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의 고수……!’
칼이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눈앞의 남자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했다.
술맛 떨어지니 입 좀 닥치라는 건가.
칼은 공연히 등을 돌리고 해 둘 만한 잡일이 있는지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뒤로 시선이 꽂히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칼 역시 모든 신경을 도율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무언가 불만인 듯한데 말을 안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말을 해 주지…….’
칼이 죽을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도율은 쓰디쓴 술을 입에 대 보니 도수가 장난 아니게 높다는 걸 깨달았다.
러시아에선 원래 도수 높은 술을 물처럼 들이켠다더니, 손님한테도 이런 센 술을 갖다 주나.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터라, 아끼는 술이란 말을 들어도 잘 와닿지 않았다.
‘그냥 물이나 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
도율은 러시아어를 할 줄 몰랐다.
* * *
“반갑다.”
백우진이 조그마한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안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날렵한 몸에 어깨 가까이 기른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몸을 숙이듯 걸터앉고 있었다. 그에게서 다음 라운드를 기다리는 권투 선수 같은 인상을 받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쬐는 선명한 주홍색 불빛이 그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내 이름은 파벨.”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고르곤의 정식 조직원이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파벨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수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백우진이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동일했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백우진은 남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잠깐이라도 봤더라면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백우진이 모든 조직원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파벨이라는 남자는 고르곤의 보스를 보러 갈 때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백우진입니다.”
그렇게 당당히 이름을 밝혀도, 파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파벨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백우진이 이전 고르곤의 거래 상대이자 한국의 4대 길드 중 하나였던 플레이아데스라는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는 사실을.
“소속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길드는 없다. 백우진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그들을 찾아온 거였다.
“그래서. 이 춥고 먼 땅까진 어쩐 일로 찾아오셨지?”
“보스를 만나고 싶습니다.”
“…….”
백우진의 말에 파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했다.
간혹 충성심이 과한 인물은 보스의 이야기를 입에 담기만 해도 불같이 화를 내고는 했다. 보스를 신이나 아버지처럼 떠받들곤 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파벨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 젊은 조직원은 조직이라는 것도 결국 비즈니스로 엮여 있다고 믿는 듯했다.
“널 보스께 소개해 달라고? 제정신이냐? 물론 가능은 하지. 하지만 네가 보스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지?”
“보스에게 도움이라…….”
백우진은 보스에게 도움이 되는 거래를 제안하러 온 게 아니었다.
방법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건 거래라기보다는 협상, 또는 협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먹힌다면 말이지만, 그걸 위해 도율에게 부탁을 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남자에겐 그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보죠. 당신은 내가 보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보다, 나를 소개해서 당신에게 어떤 이득이 될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백우진의 말에 파벨은 꺼려 하는 기색도 없이 인정했다.
“큭큭. 그래, 맞아. 물론 난 정식 조직원이니 보스께 면담을 요청할 순 있지. 하지만 거기서 널 소개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영양가 없는 소릴 하느라 보스의 시간을 빼앗는 건 내 인상만 나빠지니까.”
파벨은 보스에게 충성하는 건 아니었지만, 딴 마음을 품는 멍청이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평가가 중요한 시기라고. 안 그래도 이쪽 지부장 자리가 공석이어서 말이지. 다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실적을 찾고 있어.”
그건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길드를 관둔 백우진이 다른 조직의 동향까지 살필 이유는 없었기에 굳이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란 말씀. 기회를 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바빠.”
그러신 분이 왜 처음 보는 외국인의 방문에 응한 걸까.
그 이유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파벨이 백우진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뭐가?”
“우리가 당신의 실적을 도와준다면, 당신도 우리가 보스와 만나도록 도와준다는 건.”
거래 제안이었다.
지금이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안주하는 사람이라면 위험한 도전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파벨은 예상컨대 끝자락에 걸쳐 있는 위태로운 자였다. 이런 시기일수록 올라가는 것보다는 밀려날 가능성이 큰 위치.
그렇기에 더더욱 위로 올라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곳보다 그곳이 더 가파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우진은 그런 자들의 욕망을 다루며 지내 온 세월이 길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파벨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 * *
“어떻게 됐습니까?”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백우진에게 도율이 물었다.
“거래를 하기로 했습니다.”
“거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일단은 숙소를 잡아 둡시다.”
백우진의 말대로 시간이 제법 늦었다.
아직 자기엔 이르지만, 숙박할 곳을 찾아 두기엔 적당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거리로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이 근처에도 숙박 업소가 있긴 하겠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낡아 빠진 데다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잠은 편히 자는 게 낫지 않겠나.
도율이 번화가 근처의 호텔을 가자고 주장했고, 백우진이 수긍했다. 그렇게 합의하고 이동하는 사이 도율이 물었다.
“그나저나 그들은 정말 조직원이 맞습니까?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작던데요.”
“파벨이란 자는 정식 조직원이 맞았습니다. 아래의 두 사람은……. 단순한 심부름꾼 정도에 불과하겠죠.”
낡은 술집을 거처로 삼은 것도 그렇고. 러시아 전역을 주름잡는 조직의 산하 단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정식으로 지부를 설립하고 말단까지 관리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다단계처럼 이어진 곳이죠.”
파벨이라는 자나 칼이라는 자는 각자 나름대로 힘을 갖추고 있었지만, 힘깨나 쓴다는 놈 둘이 모여서 머리 맞댄다고 지역을 주름잡을 순 없다.
절대적으로 인력이 부족하다. 이런저런 잡일을 도맡아 해 줄 사람들이 몇 명 더 필요하다. 실제로 힘 쓰는 법은 몰라도 그렇게 보이는 허수아비도 몇 명 더 있어야 하고.
그런 약소한 패거리가 조직의 요직으로 올라가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
그렇기에 이번 거래에 손을 내민 것이다. 그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모험이든 해 봐야 하는 상황이니.
“그렇군요.”
착실하게 일을 해서 승진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범죄 조직이라니 응당 그렇겠지만.
상황을 파악한 도율이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따라오는 거냐?”
도율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말에 백우진 또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틈타 한 소녀가 뒤를 밟고 있었다. 그걸 백우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어정쩡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옐레나였다.
“드, 들켰어?”
미행에 제법 자신이 있었는지.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한 태도였다.
“왜 따라오는 거냐?”
“아니, 화내지 말고 일단 들어 봐.”
“왜……. 아, 맞다. 백우진 씨. 통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도율과 옐레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가 헛돌았다.
결국 중간에 낀 백우진이 중계했다.
“그게, 아까 얘기했잖아? 내가 이쪽 지리를 잘 아니까 길잡이 역할을 맡으라고. 그래서 내가 아저씨들 보좌 역할 맡은 거야. 응. 이번 일은 우리 대장한테도 중요한 일이니까. 극진히 모시라고 전해 들었다구.”
옐레나가 간이나 쓸개도 다 빼 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말을 하고 함께 따라왔으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남몰래 뒤를 밟을 게 아니라.
애초에 길잡이 역할은 다음 날 아침에 수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잠자리까지 따라올 거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누가 봐도 미행을 하다 들킨 상황이었지만, 둘은 괜히 지적하지 않았다.
“밤엔 필요 없으니 집에 돌아가.”
“나 집 없어.”
“…….”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합니까?”
“누가 봐도 우릴 감시하러 온 것 같은데. 굳이 가까이 지내 줄 이유가 없지만, 집이 없다니 돌려보내기도…….”
어려 보여도 뒷골목에서 지내는 억척스러운 아이였다. 좋게 타일러서 떼어 내는 건 둘 다 소질이 없었다.
그때 옐레나가 등을 돌리고 대화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안할 게 있다는 듯이.
도율과 백우진이 돌아보자 옐레나가 혀를 가볍게 내밀고 손을 말아 쥐었다.
“그, 그런 일도… 해 줄 수 있어.”
“…….”
적어도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요염하게 유혹하는 법이라도 알면 부끄럽지 않을 텐데.
러시아어를 모르는 도율이라도 제스처를 통해 무슨 소릴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도율이 슬쩍 시선으로 떠넘겼다.
“난 기혼입니다.”
“…저도 필요 없습니다.”
백우진이 드물게 짜증을 담아 대답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방은 세 개 잡죠.”
“앗싸!”
한국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옐레나는 뉘앙스를 파악하고 밝게 웃음 지었다.
이런 데서 불필요한 지출이 생길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