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배신자
“일어났습니까?”
이른 아침.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나오니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백우진이 먼저 나와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나야 원래 잠을 거의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은 몸이니 상관없지만, 백우진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몇 시간이나 되는 비행을 마치고 운전도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까지 했는데도 수면 시간을 제법 타이트하게 가지고 곧장 일어난 것이다.
“피곤하진 않습니까?”
“익숙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아침을 어떻게든 씹어 넘기는 걸 보면, 이런 강행군이 익숙하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한데 이 호텔에 묵는 건 우리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제 불청객에 가까운 군손님이 하나 늘어서 백우진이 방을 하나 잡아 줬는데, 그 애가 보이질 않았다.
“그 꼬마애는요?”
“못 봤습니다.”
또 몰래 숨어 있는 건가 해서 주변에 기를 뿌려 찾아 보니 정말로 없었다.
없다면 없는 대로 좋았다. 옐레나라는 그 꼬마는 파벨의 부하였다. 가능하다면 백우진과 둘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안심할 수 있었다.
“어제 들은 거래라는 건 그래서 무슨 내용이었죠?”
“복잡한 건 아닙니다. 힘 쓰는 일이죠.”
“상대는?”
“사람에 대해 듣진 못했지만, 장소에 대해선 들었습니다. 가는 길은 옐레나가 안내해 줄 거라고 하더군요.”
“한두 명이 아니란 소리구만.”
파벨의 사정에 대해서는 어제 나도 대략적으로 전해 들었다.
러시아 전역을 주름 잡는 범죄 조직 고르곤은 지금 모스크바 지부의 우두머리 자리가 비어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지부장이 되기 위해 실적을 쌓고 힘을 과시하는 놈. 혹은 유력해 보이는 후보에게 줄을 대기 위해 아양 떠는 놈들로 한창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그리고 이 혼란은 우리가 조직의 누군가에게 눈도장을 찍기 좋은 기회란 것도.
‘정리해 달라는 건 아마도…….’
평소 조직이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놈들을 치워 이쁨을 받거나.
어쩌면 같은 조직에 속해 있지만, 비슷한 위치에 있는 라이벌을 제3자의 손을 빌어 완전히 치워 버릴 기회라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꼭 그 녀석이어야 하는 겁니까?”
내가 묻자 백우진이 눈을 슬쩍 치뜨고 대답을 흘렸다.
“글쎄요.”
간단히 대답한 후 입에 든 것을 삼키고는 생각을 밝혔다.
“보다 좋은 거래 상대를 만난다면 계획이 바뀔 수도 있겠죠.”
백우진 역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범죄 조직을 상대로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으니까. 저쪽도 우리에게 그럴 거고. 이쪽은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지금은 파벨과 거래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지만, 만약 새로운 방법이 생긴다면.
‘더 나은 쪽을 고르겠지.’
나도 백우진을 따라 호텔 조식을 맛봤다.
과연 비싼값을 하는 식사였다.
* * *
“…….”
아침 식사도 마쳤고, 식후에 커피도 마셨다. 그 후 충분히 휴식까지 취했다.
시간은 제법 흘러, 이제는 이르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도 난 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옐레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도 있는 건…….”
백우진이 의아하게 중얼거렸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릴 감시하기 위해 왔다는 애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리가 없었다.
호텔 직원에게 문의해 옐레나가 투숙한 방의 열쇠를 받아 왔다. 어차피 숙박은 하루밖에 결제하지 않아 곧 치워야 할 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 보니.
드르렁~ 퓌유.
어제 봤던 꼬마가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다. 새하얀 이불을 꽈배기처럼 온몸에 말아 둔 채로.
설마 이 시간까지 퍼질러 자고 있을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백우진도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기를 잔뜩 눌러 담아 말했다.
“일어나, 이 자식아.”
“히억?!”
옐레나가 벌떡 일어나다가 침대 위에서 나자빠졌다.
덕분에 잠꼬대 없이 말똥한 눈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며 무어라 소리쳤다.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감추는 걸 보면 숙녀를 향한 대접에 대해 불만이라도 표하고 싶은 듯 보이는데.
이럴 거면 어제 유혹하는 척은 왜 했던 거냐.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 듯 옐레나가 창밖을 돌아봤다. 호텔 방에는 채광 좋은 창문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가뜩이나 넓고 투명한 유리 너머로 짙은 햇살이 넉넉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
그제야 우리들의 못마땅한 얼굴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길잡이. 명목상으론 그렇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감시하는 것 또한 명령받은 게 분명한 녀석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게 퍼질러 잤으니.
버리고 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5분 준다.”
손가락을 다섯 개 펴고 말했더니, 한국말임에도 불구하고 옐레나는 알았다며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우진과 함께 문앞에서 기다렸다.
정말 5분밖에 안 걸린 건 아니었어도, 옐레나는 제법 빠르게 준비를 끝마치고 방을 나왔다.
“그럼 가죠.”
옐레나의 안내에 따라, 드디어 목적지로 출발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가 향하는 곳은 어제 갔던 동네와 비슷한 곳이었다. 적어도 도중까지 가는 길이 완전히 겹치고 있엇으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길잡이가 있으니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백우진이 옐레나에게 물으니 무어라 대답을 얻어 왔다.
“방해되는 놈들이라더군요.”
“방해?”
역시 무언가 세력 다툼이라도 있는 걸까.
결국 도착한 곳은 어제 파벨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가깝기 때문에 마찰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고, 아니면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임시로 구한 거처일지도 모른다.
그 방해가 되는 놈들이 있다는 곳에 도착해 보니.
“여기라고요?”
웬 수산 시장이었다.
큰 나라의 수도인 만큼 이런 재래 시장 같은 분위기의 장소가 없으리란 법도 없었지만. 설마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이야.
의외인 것은 백우진도 마찬가지였는지. 내색하진 않았지만 높게 걸린 간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가죠.”
안쪽으로 들어가자 진한 바다 냄새가 풍겼다.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현수막 같은 게 걸려 있었다. 러시아어를 알진 못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말이 써져 있는 건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옐레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옐레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옐레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배가 나오긴 했지만 팔도 그만큼 두꺼운, 그리고 무성한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다. 고무 장갑과 앞치마, 그리고 고무 장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
저번에 옐레나를 붙잡고 골목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내가 저지하자 동네 사람들을 잔뜩 끌고 왔던 그 남자였다.
역시 이 둘은 아는 사이였나?
옐레나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파파.”
아무리 러시아어를 모른다곤 하지만,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부녀 관계였던 것이다.
* * *
“…뭘 하고 있습니까?”
백우진이 다가와 물었다.
백우진은 옐레나와 그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그동안 나는 러시아 수산 시장의 진면목을 즐기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수산 시장은 담수어나 해수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신선한 해산물이 널려 있었다.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연어와 청어였다.
밝은 빛깔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투명하고 깨끗한 눈을 가진 질 좋은 생선들을 보니 금방이라도 잡아서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러시아어도 모르고 현금도 없으니 그림의 떡이었다.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백우진이 돌아와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조금 복잡합니다.”
밖에서 이야기하자는 듯 백우진이 턱짓했다.
한국말로 대화하면 알아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여러 이름을 거론하다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눈총을 사고 있으니. 괜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백우진과 함께 근처로 이동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눈치챘겠지만. 부녀관계더군요, 저 둘은.”
“예. 눈치챘습니다.”
백우진이 이어서 설명했다.
“남자는 이 시장의 대표 정도 되는 남자입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킨 것 같고요. 옐레나는 그의 딸이라더군요.”
“가출입니까?”
“비슷합니다.”
옐레나는 어젯밤 우리에게 집이 없다고 말했다.
돌려보내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스스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자세였다.
“그런데 왜 시장 사람들이 우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겁니까?”
“그건 옐레나가 배신자이자 앞잡이이기 때문입니다.”
“배신자라면…….”
“철거에 대한 이야기죠.”
역시나.
시장 곳곳에 매달려 있는 살벌한 분위기의 현수막을 보면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곳을 밀어 버리고 돈이 될 만한 관광 시설이나 호화 시설을 짓겠다는 계획에 맞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저항을 짓누르고자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파벨은 이 구역의 청소를 맡은 겁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한테 짬 때렸다 이거지.
이 지역에 있는 시장을 밀어 버리고 세우고자 하는 건물은 아마 고르곤 조직 산하의 백화점 따위일 것이다. 그리고 파벨은 이곳에 남아 저항하는 이들을 조용히 치워 버림으로써 점수를 벌려고 하는 것이고.
이들 사이의 갈등은 이해했다.
“그런데 왜 옐레나는 파벨의 밑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승산이 없기 때문이겠죠.”
승산이라.
수산시장에서 해산물을 팔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힘쓰는 일을 하기에 근육은 붙어 있었지만.
폭력을 무기로 살아가는 범죄 조직의 일원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각성자를 상대로는 더더욱.
게다가 파벨과 그 부하인 칼을 어떻게 이겨 낸다고 해서 끝인 게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보다 커다란 조직, 고르곤이 있다. 두 사람이 실패하면 얼마든지 대체할 사람을 보낼 놈들이었다.
‘몸 성한 사람들이 없었지.’
모두가 어딘가 붕대를 감고 있거나 목발을 짚고 있었다. 이미 몇 차례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싸워 나가다가 결국 모두가 죽거나 다치기 전에 차라리 일찌감치 항복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백우진이 나를 바라보며 쓰게 중얼거렸다.
각성자 중에선 더러 그런 자들이 있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충분한 힘을 손에 넣어, 어떤 일이 있어도 신념과 고집을 꺾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는 부류.
그런 자들은 만인의 동경과 부러움을 몸에 사지만. 모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저는 모르진 않습니다.”
백우진이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시장 사람들을 도울 겁니까? 아니면 조직원과의 거래를 지킬 겁니까?”
그 질문에 백우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백우진 역시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모든 것 보다는 자기 팔 안에 닿는 걸 지키는 동물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여, 백수아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숭고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일이었다.
때로는 각오가 필요했다. 수많은 적을 만들더라도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예.”
나는 그를 돕기 위해 온 것에 불과했다. 이로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에 부외자에 불과했으니.
결정은 백우진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