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새 비즈니스
“왜 이렇게 일의 진행이 더딘 것 같지?”
파벨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건 백우진의 몫이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상황을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상황이라…….”
파벨이 조소를 머금었다.
“굳이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파벨의 말에 숨은 속뜻은 도율의 무력에 관한 것이었다.
각성자인 파벨은 어렴풋이 도율의 강함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일에 필요한 것 이상의 강함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으니.
그런 남자가 왜 이런 일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거래를 수락한 것이기도 했다.
“말했다시피, 일은 가능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크게 보면 조직에서 한 일이라는 것만으론 부족한가?”
백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 하더라도 실제로 현장을 보면 누가 한 일인지 알 수 있겠죠. 때문에 보다 철저하게, 흔적이 남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적게 손을 쓰도록.”
“흐음…….”
실제로 도율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백우진이 시간을 끌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백우진은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는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기에, 파벨 역시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 가능한 빨리 부탁한다고.”
오늘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파벨의 집무 거처를 나서면 칼과 도율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두 사람이지만 몇 번 붙어 있다 보니 서로 어색한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진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도율의 옆에는 옐레나가 앉아 있었다. 의외로 술이 아니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옐레나 본인은 그게 불만이라는 듯 뚱한 얼굴이었지만, 칼은 단 한 번도 옐레나에게 술을 따라 준 적이 없었다.
“돌아갑시다.”
백우진의 목소리에 도율과 옐레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옐레나는 이제 완전히 자신들과 함께 돌아가는 게 기정 사실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감시 관찰 임무란 것도 이제는 공공연해서, 더는 비밀도 뭣도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도율이 말했다.
“밥이나 먹죠.”
“좋아!”
며칠 붙어 지내다 보니 옐레나도 간단한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됐다. 그중 가장 반가워하는 게 저 밥 먹자는 소리였다.
들개 같은 옐레나가 유일하게 꼬리를 흔드는 순간이었다.
* * *
“그러고 보니, 아저씨들은 왜 여기까지 왔어?”
“예?”
밥을 먹던 도중 옐레나가 물었다.
다소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해도 복잡한 러시아어는 백우진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관광 온 건 아닐 거 아냐? 애초에 우리 조직 찾으려고 돌아다닌 걸 테니까. 보통은 관여하지 않잖아.”
애초에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에 대한 것도 백우진 때문이었으니, 그가 대답하는 게 맞는 것일 테지만.
‘…조직에 보고하기 위함인가?’
백우진이 조용히 옐레나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파벨이 캐물어 대답하게 될지도 모른다.
옐레나는 질문을 던진 것도 잊었다는 듯 닭다리를 뜯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첫날엔 교양도 없이 맨손으로 뜯고 즐겼는데, 요즘은 눈치를 보는지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느라 뭐라 대답하든 흘려 들을 듯했다.
그 단순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재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건…….”
한데 대답을 한다 쳐도. 백수아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딸이라고 하기엔,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도 아니고 믿을 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럼 사촌 동생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너무 멀리 간 느낌이 있었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섭니다.”
가족.
그 안에서 딱히 정확히 무어라 지칭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 백우진의 말에, 닭고기 외엔 뵈는 게 없어 보이던 옐레나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거 큰일이잖아!”
옐레나는 자기 일인 것처럼 몰입하며 포크로 백우진을 가리켰다.
“이런 데에서 뭉기적대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백우진도 그거야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를 옐레나에게서 듣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그 시장은 당신 아버지가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앙?”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백우진의 말에 옐레나는 포크를 테이블 위애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저씨. 잠깐 일어나 봐.”
“……?”
백우진이 의아해하며 말에 따랐다.
“좀만 옆에 서 봐. 좀 더. 더, 더. 오케이. 거기. 딱 좋다.”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게 하더니, 옐레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빡!
옐레나의 미들킥이 백우진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큭……!”
불의의 일격에 당한 백우진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상황이 도저히 파악이 되지 않았다.
옐레나는 남자가 뭐 그리 약골이냐는 듯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도율은 말릴 생각도 없이 배를 붙잡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게 무슨…….”
“거드름 피우지 마, 이 쪼다 새끼야!”
옐레나가 윽박질렀다.
“자기 가족이 걸린 일이면 자기 가족이 먼저인 거지. 무슨 남 걱정을 하고 있어! 그러고도 남자냐? 알 달려 있냐고!”
“…….”
“이런 곳에서 시간 끌지 말라고!”
타당하신 말씀이었다.
백우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다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발차기가 맵군요.”
“뭐? 썅……. 변태야? 맞는 거에서 맛을 느껴?”
“그게 아니라. 한국에선 아프다는 걸 맵다고도 합니다.”
“오호. 그렇구만.”
옐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의 상처는…….”
“어?”
“배의 상처는 맞은 겁니까?”
옐레나가 발차기를 하는 순간 상의가 말려 올라가며 배가 슬쩍 보였다. 그리고 백우진은 선명한 멍 자국을 볼 수 있었다.
그 질문에 옐레나는 애써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옷자작을 내렸다.
“씨발. 변태 맞잖아. 그 잠깐 사이에 그게 눈에 들어와?”
“우리 때문입니까?”
옐레나는 백우진과 도율을 감시, 관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 건지.
그러나 옐레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아저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그에 백우진도 더는 묻지 않았다.
식사 시간은 이후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 * *
“아까 봤던 멍이 신경 쓰입니까?”
옐레나가 방에 들어간 사이. 백우진과 둘이 남게 된 도율이 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옐레나에게 들었던 말대로였다.
백우진은 백수아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그것이 백우진에게 있어서도 익숙한 일이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안타깝고 가여운 사람들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역할에 있었다.
그러나 길드의 지시에 따르며 그 모든 가책으로부터 도망친 건 자신이었다.
부길드장이라는 직위가 없어졌다 해서 그 알량한 본성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올바르고 꿋꿋하게 사는 건 강자의 특권이다.
“모두 자신의 선택에 불과한 겁니다.”
옐레나가 시장 대표의 딸이면서도 그곳을 없애려 하는 남자의 밑에 들어가 있는 것도.
그 사정을 모른 척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도.
그때 도율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멍 자국이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생긴 게 바뀌는 법입니다. 맞은 직후에 태가 나는 경우는 잘 없죠.”
그건 백우진도 알고 있었다.
“백우진 씨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전 겉으로만 봐도 대략 어느 정도에 생긴 상처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못 믿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도율은 상당한 실력을 갖춘 각성자였다. 의사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있다 말한다면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랑이나 하자고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아닐 터였다.
“…언젭니까?”
“시장에 갔던 날.”
“…….”
그건 조금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날은 시장에 방문하고 나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파벨이나 칼을 만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옐레나 혼자 따로 만나러 간 걸지도 모르지만…….
“그날 백우진 씨는 옐레나를 두고 먼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부녀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지 않겠냐고.”
“…….”
그랬었다.
옐레나의 부친에게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백우진은 먼저 자리를 떠 도율에게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옐레나가 부친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제법 오래 기다렸다.
시장에서 해산물 구경에 정신이 팔린 도율에게 어울려 주느라 그 시간이 길었어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야 오랜만에 만나는 부녀이니까, 그만큼 풀 회포가 많았으리라 넘겨짚었을 뿐.
“그럼, 그건…….”
도율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백우진은 답을 들은 것 같았다.
미처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조직에 들어간 소녀가 고운 취급을 받지 못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본인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 가족에게. 아버지에게 그런 학대를 당하고 있던 거라면.
“이도율 씨.”
백우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파벨에게 갑시다.”
이미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율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죠.”
* * *
“이미 늦었다.”
파벨은 두꺼운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마주 앉은 백우진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파벨이 시가를 내려놓고 답했다.
“방금 전. 다른 조직원이 다녀갔다.”
“다른 조직원이라면…….”
“니콜라이 파벌. 이 근처에서 상당한 세력을 키우고 있는 놈들이지. 데리고 있는 각성자의 수만 해도 두 자리가 넘는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인지. 놈들의 이름을 담을 때 파벨의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그가 다리를 꼬고 설명을 이어 갔다.
“이 근처에서 보호비 받아먹고 사는 구시대적인 양아치 놈들이지. 나처럼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쪽이랑은 잘 안 맞아.”
“그래서. 그게 어쨌단 겁니까.”
평소와 달리 백우진이 답을 독촉했다.
“하……. 그쪽에서 그러더군. 시장도 이쪽에 보호비를 바치기로 했으니, 이제 한 식구끼리 밥그릇 놓고 싸우지 말자고.”
그쪽에서 선수를 친 것이었다.
철거를 당하느니 보호세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을 지키겠다고.
“그게 우리 쪽에서 데려온 수상한 놈들 덕분이라며 이죽거리는데……. 거기서 주먹을 한 대 갈기지 않은 내 인내심에 칭찬을 해 주고 싶은 기분이라고.”
파벨이 투정을 부렸지만, 백우진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보기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파벌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파벌. 내 말하지 않았나? 이쪽 지부장이 공석이라고. 그런데 뭐, 그쪽한테 밥그릇이 하나 공짜로 넘어갔으니 판이 좀…….”
“이대로 넘겨줄 생각입니까?”
백우진의 질문에 파벨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되물었다.
“물론, 아니지. 난 아주 배가 아파. 그런데 난 비즈니스를 하는 놈이라고. 무식한 놈들과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가.”
파벨이 옆통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쪽은 무식한 놈들이야. 각성자만 해도 두 자리지. 그런데 우리를 봐.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곤 나나 칼. 두 사람에… 당신은 각성자도 아니지. 그래도 댁이 데려온 남자까지 하면 셋인가?”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칼밥 먹고 사는 각성자 수십을 상대하는 건 얘기가 달랐다.
“전면전을 해선 승산이 없다, 이 말인데. 뭐 방법이라도 있나?”
방법이라면 있었다.
파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전면전.
도율에게, 고작 이런 범죄 조직의 끄나풀 무리 하나를 휩쓸어 버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길드 하나를 단신으로 박살 낸 전적이 있으니까.
“새 비즈니스를 시작해 봅시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