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제일 비싼 거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라니.”
도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벨은 백우진에게 니콜라이 파벌의 아지트를 알려 줬고, 그걸 백우진이 번역해 도율에게 전달했다.
처음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도율은 의아하게 환대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어를 할 줄 몰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이해한다는 듯 말 한마디 없는 자신을 굽신거리며 극진하게 모시는 놈들 뿐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는데…….
‘다른 놈이랑 착각한 거였나.’
보스로 보이는 니콜라이라는 남자가 옆에서 술을 따르더니, 새로 등장한 남자를 보며 자신과 번갈아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축제 분위기더니. 대단한 사람이라도 모시려다가 자신과 착각한 모양.
본의 아니게 오해를 샀지만, 이제는 일을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한국말로 뭐라 말을 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고. 어색한 영어를 지껄여서 분위기를 깨는 것도 신통치 않고.
도율은 니콜라이가 자신에게 따라 준 술잔을 들어 테이블 위로 흘려보냈다.
쨍그랑!
도율이 떨어뜨린 유리 술잔이 테이블과 부딪쳐 깨졌다. 유리 조각이 고인 술을 타고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니콜라이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죽여.”
그러자 가까이 있는 남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품에서 칼을 꺼냈다.
쉬익!
수 자루의 칼날이 도율을 향해 사방에서 짓쳐들었다.
칼날에 마력을 두른 날카로운 비수들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몸이었다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마력으로 두른 방패마저도 가볍게 뚫어 낼 위력.
거의 동시인 것처럼 다가오는 칼날을, 도율은 실낱같은 차이를 가진 순서를 파악해 모두 하나씩 쳐 냈다.
“큭……!”
칼을 찌르던 남자들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퍼졌다.
이 수많은 공격을 순식간에 파악해 재빠르게 대처할 뿐만 아니라, 맨손으로 밀어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력. 마치 거대한 바위로 쳐 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설 이들이 아니었다.
곧바로 다음 연계로 도율의 발을 묶는 동안 한쪽에서 총을 꺼냈다.
마나 건. 몬스터와 같이 두꺼운 피부를 가진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긴 어려운 물건이었지만, 사람을 상대로는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불법 개조까지 거친 놈들이었으니. 제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그냥 맞아 주는 건 악수였다.
“끄아악!”
도율이 한 놈의 손목을 밟아 부러뜨리는 사이, 한쪽에서 연속된 총성이 울렸다.
타타탕!
등을 향해 발사된 총알들. 도율은 등 뒤로 손을 뻗는 듯 싶더니 허공을 움켜쥐고 휘둘렀다.
그러자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풍경과 함께 총알들이 모두 궤도를 이탈했다.
“이런 미친…….”
차라리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각성자인 그들은 도율이 어떻게 총격을 대처했는지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건 미리 대비를 갖추고 온 자의 철저한 대응이 아니었다.
궤를 뛰어넘은 강자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어떤 작전을 짜고 숨겨 둔 무기를 꺼내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총알은 모두 도율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원거리 무기는 귀찮은데.”
도율이 손가락을 튕겨 탄환을 날렸다.
“크악!”
그러자 사내들이 쥐고 있던 마나 건이 모두 폭발했다. 위력을 높이기 위해 안정성을 버린 탓에 외부의 충격에 그대로 작은 폭탄이 되어 그들의 손을 덮쳤다.
그 짧은 순간에 벌써 절반이 넘는 인원이 당했다.
죽은 놈은 없어도 대부분이 어딘가를 다치거나 더는 싸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반해 도율은 상처는 커녕 지친 기색도 없이 태연했다.
멀쩡한 인원이 절반 정도는 남아 있다 해도, 양상을 보면 그 결과가 뻔했다.
“……누구지?”
결국 습격을 멈추고 니콜라이가 대화를 시도했다.
“노조프에서 보낸 놈인가? 아니면 이반? 드미트리?”
니콜라이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경쟁자 겸 원수라고 할 만한 상대가 너무 많았다. 그들의 파벌은 상대를 짓누르고 꺾어 버리는 것으로 세력을 불려 왔으니까.
제로섬 게임. 누군가로부터 빼앗지 않으면 자신이 얻는 몫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의 강자를 고용할 수 있는 놈들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 정도의 강자라면 분명히 엄청난 몸값을 자랑할 텐데. 고작 파벌 하나 날리기 위해 그런 큰돈을 쓰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못 생각했다고 전해. 지금 날 없애 봤자 지부장 자리를 날로 먹을 수 있는 놈은 없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상황은 다시 백지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네 고용인은 멍청한 놈이야. 어때?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약속할 테니, 나와 손을 잡는 건…….”
니콜라이가 그럴싸한 말로 도율을 구슬리고자 애썼다.
그러나 도율은 대답이 없었다.
‘그야 러시아어로 물어본다 한들…….’
말이 안 통하면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나.
도율이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깡패들을 쓸어버린다는 것 외의 방법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니콜라이가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도율은 다른 목소리에 주목했다.
“한국인?”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한국어로 하는 말이었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방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백발의 외국인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 호남이었다.
화보에나 나올 법한 이국적으로 생긴 이 남자가 한국말을 꺼낸 게 맞나? 도율은 의아함이 들었다.
도율이 움직임을 멈추고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한 말인가?”
그러자 남자는 긴 담배 연기를 뿜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초대를 받아서 왔더니, 이런 난장판이 벌어져 있을 줄이야. 원체 근본이 없는 놈들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손님 대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줄은.”
그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흐르는 술 위에 비벼 껐다.
“안 되겠군, 이놈들은.”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도율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였다. 외산 더빙 영화라도 보는 듯한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국 땅에서 고향의 말을 들으니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신은?”
“안드레이 노비코프.”
안드레이가 대답 후에 물었다.
“댁이 작살 내고 있는 놈들이 속한 조직의 간부지.”
그러자 도율이 전투 태세를 풀었다.
누구와 대화해야 하는지 분명했다.
* * *
“이런 젠장…….”
파벨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칼 또한 과묵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내심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도율에게 손도 못 쓰고 제압당해 그를 보내 주고 말았지만, 정말 그가 니콜라이 파벌을 모두 손봐 주고 돌아올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히 엄청난 실력을 숨기고는 있었지만, 모든 일엔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니콜라이는 머리는 안 돌아가도 잔머리는 돌아가는 놈이다. 혹시나 당하기라도 한다면……. 이 일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면 그놈 성격상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실패할 가능성을 대비해 추후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태연한 건 단 한 사람.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백우진 뿐이었다.
일종의 인질 역할로 남아 있는 것이었지만, 전혀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건가?”
파벨의 물음에 백우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제가 아는 가장 강한 각성자입니다.”
“그야 그러시겠지.”
파벨이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비아냥거렸다.
이 동네에선 흔한 허풍이었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자기가 가장 강하다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그 개구리를 우러러 보는 올챙이들이 한가득한 세상이었다.
하나 그건 그가 백우진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좁아 터진 땅덩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국력을 가진 나라, 대한민국에서 4대 길드라고 불리던 거대 길드 플레이아데스에서 전 부길드장 직책을 맡고 있던 남자다.
당장 백우진은 파벨이 올라서고자 하는 고르곤이란 조직의 보스와도 대담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자가 봐 온 각성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은, 양지와 음지를 더불어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파벨만 초조하게 발을 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따릉!
문에 달린 경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파벨이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돌아왔나?!”
파벨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도율이 아니라 니콜라이 파벌의 누군가가 도율의 모가지라도 던지러 온 거라면…….
‘당장 이 백우진이란 놈도 손발을 묶어서 진상해야 하나?’
아니, 니콜라이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놈이 아니었다. 전면전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래서야 승산이 없으니 결국 판을 접고 어디 시골로 도망쳐 쥐 죽은 듯이 숨어 살아야 할 터였다.
‘이런 빌어먹을…….’
그간 한 고생이 얼만데, 그럴 수는 없었다.
‘남자 한 명 무사히 돌아오길 이렇게 애타게 기다린 적은 난생 처음이군.’
가게 문앞을 스쳐 들어오는 건 그가 알고 있는 도율이었다.
파벨은 환호성을 내지려던 입을 꾹 틀어막았다. 그의 뒤에 따라 들어오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장신의 키에 백발을 가진 남자. 모델이라 해도 믿을 외관이었지만, 위험한 낌새를 풍기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이쪽’ 인간이었다.
“이봐, 그쪽은…….”
“안드레이 노비코프.”
남자의 이름을 대답한 건 백우진이었다.
“안드레이 노비코프? 그게 누구…….”
“이런 데서 다 보는군.”
안드레이가 백우진에게 아는 척을 했다.
피차 서로를 잊었다기엔 기억력이 좋았다. 두 사람이 얼굴을 보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으니.
안드레이가 백우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봐, 거긴 내 자리…….”
“저자는 역시 댁이 데려온 남자였나?”
“예.”
“대체 뭐라는… 얌마! 거긴 내 자리라니까!”
백우진과 안드레이는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백우진은 그렇다 치고. 누가 봐도 서구인으로 보이는 저 남자는 대체 왜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고 있는 건지. 파벨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안드레이라 불린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누가 봐도 좀 치우라는 제스처였다.
“대화에 방해가 되는군.”
“이런 씨……!”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신을 아주 우습게 본다.
머리나 굴리고 돈놀이 하는 샌님 취급을 받지만, 파벨도 나름대로 한 성깔 하고 한 주먹 하는 남자였다. 그 정도 깡과 빠이팅이 없어서야 이 바닥에 설 자격이 없다.
파벨이 팔을 걷어붙이려는 찰나, 안드레이의 손가락에 껴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 반지는……?’
알이 커다란 촌스러운 반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 어떤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배경에 하얀 뱀이 새겨진 그림.
조직 고르곤의 간부 이상급만이 수여받을 수 있다는 반지였다.
“서, 설마…….”
이 남자가 그 남자였다.
파벨이 그토록 바라던 출세를 위한 길로 이어지는 자.
“나가 있어.”
자신의 방.
나가 있으라는 안드레이의 말에 파벨은 칼과 함께 얌전히 방을 나섰다.
“칼.”
“…예, 형님.”
파벨이 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술 까 와.”
칼이 숨을 들이쉬었다. 할 말이 가슴에 가득 들어찼지만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이 빵빵하게 들어차서 답답했다.
“……예.”
칼이 내려다보니 파벨은 예상과 달리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제일 비싼 거 한 병 따자고!”
“…어, 예.”
걱정과 달리.
파벨은 간부를 모시게 되어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