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사육장
“좋아. 말이 잘 통하는 친구들이구만.”
턱수염을 기른 중후한 사내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파벨은 그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자신이 거주하는 곳인데도 염치가 없었다.
주위에 서 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또한 만만치 않은 위압감을 흩뿌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아니더라도 느꼈을 법한 압박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상대는 무려 그들이 속한 조직 ‘고르곤’의 유력한 차기 보스 후보인 남자.
‘미하일 로미노프…….’
그를 목전에 두고 나면, 모스크바의 지부장 자리를 놓고 벌였던 온갖 다툼들이 모두 어린애 장난으로 여겨졌다.
파벨의 턱을 따라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칼이 미하일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가게에서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술이었다.
미하일은 그 술병 라벨을 흘긋 보고는, 술잔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잘 마시겠네.”
싱긋 웃으며 말하는 것과 달리 그는 술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저기, 그런데 이런 곳까진 어쩐 일이신지…….”
“아, 참. 그렇지.”
미하일이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원래는 이곳에 올 예정이 없었다네. 다른 친구들에게 일을 맡겨 뒀는데, 이게 웬걸. 모처럼 약속 시간에 맞춰 장소에 나왔더니 심부름을 하기로 한 친구들이 싸그리 다 뻗어 있지 뭔가.”
미하일은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푸념이라도 늘어놓듯 가볍게 말했지만, 듣고 있는 파벨의 심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물었다.
“…도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감히 미하일 님의 약속을 바람맞힌단 말입니까?”
“한 대 피우겠나?”
“아니, 괜찮습니다.”
미하일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한 대 권했다. 그가 동의도 구하지 않고 불을 붙였으나 감히 제지할 순 없었다.
파벨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시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상대가 궐련을 피는데 자신이 시가를 태워도 되는 걸까? 건방지게?
손가락 끝에 걸린 시가가 미하일의 다음 말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니콜라이라는 친군데, 자네랑은 사이가 안 좋지 않나?”
“…….”
니콜라이 파벌.
그건 분명 파벨이 무너지길 바라 마지않았던 파벌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그 파벌이 하루아침 사이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에 기여를 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나, 이 친구.”
“그… 그들이 미하일 님의 분파인 걸 알았다면 결코 손대지 않았을 겁니다.”
파벨이 바짝 얼어붙어 하는 말에 미하일이 파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나? 괜찮아, 이 친구야. 난 딱히 그 친구들이랑 친했던 건 아니야.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고. 그냥 쓸 만한 일을 시키면 쓸 만하게 해내는 놈들인지 궁금했을 뿐이지.”
미하일은 니콜라이 파벌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다.
정체는 그 일을 제대로 완수했을 때 보상 삼아 알려 줄 예정이었다. 중간 과정까지는 잘 진행되기에 마지막에 직접 행차했더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하던 일을 방해하게 되어서… 몹시 면목 없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미하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건 그가 성품이 올바른 인간이기에 나오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주름잡는 범죄 조직 고르곤의 보스였던 알렉세이의 친동생. 핏줄엔 암흑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형과 다른 인간이었다면 지금처럼 명분도 없이 수많은 간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터였다.
“대신 이렇게 새로 유능한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나?”
“예……?”
미하일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저희… 말씀이십니까?”
파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친구들! 뭘 빼고 그러나. 그만한 덩어리들을 간밤에 다 정리해 버렸으면서. 하는 일은 스케일이 큰데, 간은 영 작군. 그것도 나쁘진 않아. 난 겸손한 친구들을 좋아하거든.”
미하일은 니콜라이 파벌을 단숨에 정리한 일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 일은 파벨이 직접 한 일은 아니었다. 칼과 함께한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중계만 했을 뿐, 그 실행력을 지닌 남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미하일이 파벨에게 제안했다.
“어때, 좀 더 큰 물에서 놀 생각은 없나?”
그 말에 파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하라고 해 봐야 겨우 하나나 둘. 그나마 쓸 만한 건 칼 정도고, 옐레나는 잘 쳐줘 봐야 동네 코흘리개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원래라면 작은 골목 하나 원활하게 관리하지 못할 패거리였다.
‘지금은…….’
이 일을 시작한 순간부터 제 명에 못 살 건 알고 있었다.
미하일을 상대로 허풍을 치다가 걸린다면, 제 명이고 나발이고 곱게 죽는 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파벨은 역경을 앞에 두고 한 걸음 나아갔다.
‘배팅할 때다.’
파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만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토록 잡고자 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이 기회를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자 미하일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팔을 활짝 벌렸다.
“좋아! 그럼 환영하네, 새 친구들!”
곧바로 미하일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럼 갑작스럽지만 부탁이 있네.”
“부탁이라면……?”
“내 친구가 될 뻔한 자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지. 안타깝지만 나도 내 사정이 있는 법인데, 할 일은 마저 해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파벨이 수긍하자 미하일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각성자를 모아 와. 여자. 나이는 어리면 좋고.”
“……?”
“아, 수준은 아무래도 좋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지시였다.
여자를 구하라면 구하는 거고, 각성자를 구하는 거라면 구하는 건데. 왜 그 둘 모두를 포함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걸까.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물어도…….”
파벨의 말에 미하일이 처음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실례했습니다.”
파벨이 곧바로 고개를 처박으며 사과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죽음의 위기를 회피한 것이라고.
* * *
“자세한 장소는 듣지 못했다고요?”
“이 근처에 있을 거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정확한 위치는 안드레이도 알 수 없답니다. 이곳은 미하일이란 자의 구역이니까.”
백우진과 도율이 있는 곳은 안드레이가 말한 거리였다.
모스크바도 크긴 참 큰 도시였다. 그런 곳을 이 잡듯 뒤질 생각을 하니, 도율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 미하일이란 놈이 있는 곳을 불라고 하죠?”
안드레이, 그 뻔뻔한 놈한테 좋은 일을 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미하일이란 놈을 직접 찾아가서 모조리 패 버리고 백수아를 돌려받는 게 빠르겠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미하일이란 자는 철저한 성격이어서 같은 정보를 흘리는 법이 없다 하더군요. 안드레이가 우리에게 미하일의 거처를 알리면, 그 거처의 위치를 흘린 자가 안드레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합니다.”
“하…….”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이 완전히 작살을 내 주겠다 말한다 한들, 안드레이가 그 사실을 믿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도율도 말이 잘 통한다면 딱히 미하일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을 생각은 없으니. 반드시 지킬 약속은 아니기도 했다.
‘어쩔 수 없나.’
도율이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뭡니까, 그건?”
“…있습니다.”
도율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백우진이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대답하기엔 얽힌 이야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백우진은 가능하면 모르면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고둥.
망량이 건네준, 나무로 만들어진 소라 고둥이었다. 망량의 누이인 이매의 흔적을 쫓는 장치라고 받았지만 이 물건은 백수아에게 강렬하게 반응했다.
‘별로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이 물건에 흔적이 새겨지면, 망량은 그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 가능하면 백수아의 근처에선 이 물건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고둥은 미약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무리 백수아에게 반응을 보인다곤 하지만, 모습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감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한국에 있을 때엔 그랬다.
그렇다고 이 근처에 백수아가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랬다면 도율의 기감을 통한 감지에 걸렸을 테니.
그렇다는 건, 이곳에 와서 더욱 반응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왜?’
그다지 바람직한 이유는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고둥의 반응이 강해지는 방향을 향해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여긴…….”
도율이 주먹을 꽉 틀어쥐고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병원이로군요.”
백우진이 간판을 읽고 말했다.
사실 러시아어를 할줄 모르는 도율도 건물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새하얀 건물에 투명한 유리창.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나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는 곳은 병원 외엔 달리 없을 테니까.
굳게 걸어 잠근 주먹 안에 든 고둥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수아를 직접 눈앞에 두었을 때보다 훨씬 더.
지금 도율은 그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신경 써서 손을 닫아 놓았다.
“진료받아야 합니까?”
“그럴 필욘 없을 겁니다.”
도율과 백우진은 달리 진료를 신청하지 않고 안쪽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걷길 한창. 다른 환자들이나 방문객들의 모습이 뜸해지고, 관계자로 보이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무렵.
누군가 길을 가로막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 안쪽으론…….”
러시아어를 모르는 도율도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두꺼운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평범한 철문이 아니었다. 마력으로 된 보호 장치가 걸려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으니.
“돌아가려면 지금입니다.”
도율이 백우진을 향해 말했다. 이 앞은 위험할 수 있다는 뜻.
그러자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야죠.”
그 시선은 철문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데리고 돌아가야죠.”
“…….”
사람이 언제 이렇게 터프해졌담.
“저기요! 여긴……!”
콱!
도율이 시끄럽게 소리치는 여자의 뒷목을 내리쳤다.
여자가 쓰러지며 무전 같은 장치를 떨어뜨렸다. 이 비밀 장소를 지키는 누군가들에게 연락을 넣은 게 분명했지만.
어차피 들키지 않고 몰래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쾅!
도율이 철문을 걷어찼다.
두껍고 육중한 문이 몇 겹이나 덧댄 보호 마법을 뜯어내며 날아갔다. 그 너머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우진을 보호하며 도율이 먼저 걸어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그러나 진해지는 건 어둠뿐만이 아니었다.
“냄새가…….”
백우진이 중얼거렸다.
이곳에선 어떤 냄새가 풍겼다. 각성자가 아닌 백우진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짙은 냄새가.
꺼림칙하다는 느낌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을 뿐, 백우진은 그게 무슨 냄새인지 알지 못했다.
피의 냄새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건 이렇게 애매모호한, 달콤하게 유혹하는 듯한 실마리를 늘어뜨리지 않는다.
앞서 걷는 도율이 답을 알려줬다.
“약입니다.”
“약……?”
도율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하실. 소독약과 피의 냄새. 그리고 그보다 짙은 약의 향기. 좋지 않은 추억을 자극하는 요소들뿐이었다.
쿠득!
도율이 손에 쥐고 있던 고둥이 박살났다. 점점 강해지는 반응을 이겨 내지 못한 탓이었다.
“…….”
이곳에 와 보니 알 수 있었다.
고둥이 그토록 격하게 반응을 보인 건, 백수아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망량이 준 고둥에 반응을 일으키는 존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긴…….”
어둠에 눈이 익은 백우진이 뒤늦게 위화감을 깨달았다.
도율과 그 뒤를 따르는 백우진이 걷고 있는 건 얇은 복도였다. 그 좌우로 창살과 같은 것이 달린 무언가가 길게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의 광경을 도율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육장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에 달린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