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진짜 걱정거리
“놈들이 알아챈 모양이군요.”
환해진 조명.
이곳을 관리하던 누군가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백우진과 도율이 이곳에 침입한 지 몇 분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알아챘다는 것은, 평소에 그만큼 신경을 쓰는 구역이라는 뜻이었다.
도율이 주위를 싸늘한 눈으로 훑었다.
‘당연히 들키기 싫겠지.’
시선을 거둔 도율이 이곳의 유일한 출입구를 바라봤다.
어쨌거나 지금은 대응을 할 때였다.
“백우진 씨는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도율이 지시했다.
그의 손가락이 출구로부터 멀어지는 깊숙한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도율과 백우진이 들어온 곳 외의 출입구는 없었다. 그러니 상대도 그쪽에서 올 게 뻔했다. 적을 상대할 도율은 이곳에 남아야 했다.
“도율 씨는?”
“전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도율은 딱히 걱정할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적들을 마주친다 해도 위협을 느낄 만한 각성자가 아니니까.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었다.
‘다른 사람을 지키며 상대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휘말릴 걸 걱정하느라 큰 기술을 쓰기 곤란할 수도 있고, 인질이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여유가 있다 해도, 모습을 숨기는 게 차라리 도와주는 거였다.
그럼 그동안 자신이 할 일은…….
백우진을 더욱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도율이 전했다.
“백수아는 가장 안쪽에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질문을, 백우진이 삼켰다. 이 남자는 불확실한 말을 가볍게 던지는 자가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알겠습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지금은 도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걸 걱정할 만한 약자가 아니었고.
자신은 지금부터 백수아를 데리러 가야 하는 몸이었다.
‘…그런가.’
도율이라면 백우진과 함께 따라 들어오면서도 뒤따라오는 적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탈출할 땐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여유롭게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키겠다고 굳이 남아서 백우진을 먼저 보내는 이유. 그것은 모두 백수아에게 보내는 길에 다른 방해꾼을 들여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맙습니다.”
백우진의 말에 도율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을 내저었다.
“얼른 가 보세요.”
“예.”
백우진이 잰걸음으로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백우진의 뒷모습을 보느라 뒤돌아 있던 도율이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검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남자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율을 발견한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도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안하지만.”
어차피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이 뒤로는 못 지나간다.”
도율이 그렇게 고했다.
* * *
“…….”
백수아는 쪼그리고 앉은 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벽을 보고 있으라고 벌을 세운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 그러고 있었다. 딱히 재밌는 게 그려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광경은 오래 보기에 좋지 않았다.
쓸데없이 소리를 내거나 비명을 지를 기력이 남은 것들은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 일찍 죽거나, 오래 살아남을수록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꼴을 보자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해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차라리…….’
벽을 보고 있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고요한 침묵 속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나타났다.
이곳의 아이들은 일체의 호기심도 가지지 않고 더욱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숨을 곳조차 없는 방에서 눈을 가리고 아웅하듯 작은 몸을 더욱 조그마하게 웅크렸다.
저 소리가 들릴 때에는 으레 좋은 일이 없었다.
누구 하나가.
혹은 둘 모두가 죽는 날을 의미했다.
주변의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에 동정과 연민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에 피하는 것뿐.
‘…이상해.’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발자국 소리가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두 개의 발만이 교대로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한 사람……?’
이렇게 한 사람만 방문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혼자 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무리를 지어서, 그것도 역할이 나눠진 게 뻔한 채로 방문했다.
누구는 뒷짐 지는 높으신 분 역할. 누구는 손바닥 비비는 부하 역할. 누구는 차트를 확인하며 설명하는 연구자 역할.
그러나 가지런히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그 사람이 곧은 걸음걸이로 곧장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백수아는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야트막한 기억이 발가락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쑥스럽지만 싫지만은 않은, 그런 기분.
‘이상한 기분…….’
발걸음 소리는 백수아의 등뒤에서 멈췄다.
백수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당장 느끼고 있는 기분을 놓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고 나면 사라질 것이란 걸 알았기에.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리러 왔다.”
그 목소리는, 익숙하다고 하기에는 오래, 자주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잊어버리고자 애써 봐도 결국에는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백수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백수아가 벽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에 힘을 꽉 주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온힘을 다해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했잖아. 데리러 왔다고.”
그렇게 말한 백우진은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돌아가세요.”
거절의 말에도 백우진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면 그냥 끝나진 않을 거라구요.”
범죄 조직 고르곤.
그들이 꼭 뒷세계의 법칙만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양지에 발을 걸치고 있던 플레이아데스 길드와도 몇 번 거래를 주고받았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체면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곳은 고르곤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운영하는 시설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 발을 들였다면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들개의 먹이로 던져질 게 뻔했다.
설령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조직이 완전히 무너지지라도 않는 이상 계속해서 추적자를 보낼 것이었다.
백수아가 아는 백우진은 그런 걸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각성자조차 아니니까.
“저기……. 알고 있겠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제 이름이 백수아라는 것도. 아저씨와 사촌이라는 것도. 지어낸 이름에, 지어낸 관계. 모두 가짜라구요.”
백우진은 알고 있었다는 대답도 굳이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런 어린 아이가 혼자서 사촌이 사는 곳에 찾아올 수 있었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것도 지금껏 존재조차 몰랐던 아이가.
백우진이 알고 있다는 걸 백수아도 알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두 사람은 서로 그 거짓말을 모른 척했다.
물거품이지만, 누구도 그걸 터뜨리지 않는다면 방울은 영롱한 빛깔을 비춘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러니까… 사실은 절 돌봐줄 필요 따윈 없어요.”
백수아의 그 말은 스스로 그 물거품을 모두 터뜨리는 일이었다.
쓰라린 고백이었다.
스스로 그 거짓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이 관계를 아름다운 추억 삼아 영원히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기어코 제 손으로 모든 것을 허위로 되돌려 놓고 마는 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리라는 숙명에 따르는 걸까.
“난 아저씨가 알던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에요. 내가 이곳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 알면, 아마 아저씨도 깜짝 놀라 도망치고 말걸요.”
백수아가 키득거렸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백우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도 물불 가리지 않고 헌터 업계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시설을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을 만한 이유라면 오히려 더욱 뻔했다.
차라리 돈 많은 괴짜의 변태 취미라고 한다면 나을 지경의 일이었을 거다.
그래도.
“전에도 말했지.”
백우진의 생각을 굽힐 순 없었다.
“네 이름은 백수아다.”
“…….”
백수아가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뭔데요?”
“네 가족.”
가족.
백우진은 그게 어떤 건지 겪을 기회가 없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엮인 피가 이어진 어른은 숙부이자 아버지의 길드를 이어받은 남자였고. 그 외의 친척들도 모두 끝내 각성자로 거듭나지 못한 호랑이 새끼에게 실망하고 떠났다.
하지만 다른 이름을 가진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백수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백우진도 피가 이어지지 않은 누군가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돌아가자.”
백우진이 담담하게 사실을 전했다.
“난 여기서 널 강제로 꺼낼 방법이 없다. 보다시피 일반인이라서. 결정하는 건 너야.”
“…….”
백우진과 백우진의 사이는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일반인인 데다가 맨몸으로 온 백우진은 이런 걸 치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봐라.”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백우진이 철창을 쥐고 흔들었다. 나름대로 팔에 힘을 넣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수아가 몸을 일으켜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우드득.
어린 여자애의 손길에 철창은 간단하게 우그러졌다.
“…되게 폼 안 나네요, 아저씨.”
백수아가 백우진을 올려다보며 키득거렸다. 말과는 달리 실망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백우진도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원래 가족끼리는 못난 꼴도 보이며 사는 법이다.”
* * *
“으욱…….”
옐레나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사방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널부러진 시체와 피의 흔적. 그리고 이곳 시설의 원래 풍경까지.
모두 평범하게 학교에서 연필을 잡았던 아이였다면 견디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울고불고 난리 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냐.’
도율은 옐레나를 제외한 다른 조직원들을 모두 제거한 상황이었다.
이런 작자들을 상대로 손대중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아 모두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넌 또 왜 여깄냐.”
도율의 말에 옐레나가 입을 틀어막고 눈빛만으로 뭐라는 거냐는 듯이 쏘아봤다.
결국 도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르곤 입장에서 옐레나를 왜 이런 곳에 데려왔는지는 뻔했다. 이곳에 있는 다른 수많은 실험체 중 하나로 삼을 생각이었던 거다.
옐레나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아채곤 식은땀을 흘렸다.
쿵!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반복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누군가 계단을 뛰어내리듯 급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가능한 짓은 아니었다. 각성자라 해도 제법 튼튼한 부류.
쾅!
마침내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등장한 건, 말 그대로 바위 같은 사내였다.
갈라진 돌조각 같은 피부와 커다란 몸뚱이를 가진 사내는, 입고 있는 정장만 아니었으면 정말 바위라고 착각할 뻔한 인간이었다.
그 얼굴을 본 옐레나가 기겁을 하며 도율의 팔을 두드렸다.
“브이아이피, 브이아이피……!”
짧은 영어로 호들갑을 떨며 설명하는 모습에 도율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남자가 러시아어로 무언가 짧은 말을 지껄였다.
도율도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거 어디서 맞췄냐?”
말이 안 통하자 바위 남자가 잠시 굳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어차피 대화가 필요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순한 바위라고 해도 도율 앞에선 계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단단하다고 상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치직!
남자의 몸 주위에서 자그마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손톱자국처럼 허공에 검은 틈을 만들었다.
남자가 그걸 눈치채자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남자의 몸을 반 이상 삼켰다. 그 크기는 키가 큰 남자 하나가 여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
그리고 바위 남자는 그 균열 사이에 끼인 몸이 사라진 것처럼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목숨을 잃었다.
마치 그 공간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몸뚱이가 사라져 있었다.
“하아…….”
그 광경을 본 도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다. 그렇기에 가능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진짜 걱정거리가 나타났군.”
도율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균열.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