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진짜 가족
“제안하신 이야기는…….”
모스크바 소재지의 고급 레스토랑.
그곳에서 두 명의 남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봉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의 고급 정장을 걸치고, 셰프가 완성을 위해 고뇌를 기울인 절묘한 맛의 요리를 둔한 혀 위로 고민 없이 털어넣었다.
상대방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미하일이 입가에 미소를 품으며 술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였다.
‘역겹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작자의 인중에 파인 홈과 자신의 손가락 마디 크기를 비교해 볼 것만 같았다.
가지고 있는 심경이야 어떻든, 그걸 상대에게 드러내서는 안 됐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미하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상대는 이 나라에서 제법 힘 좀 쓴다는 거물 정치인이었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경찰이었던가, 판사였던가.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에브게니 위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선대와는 긴 인연이 있었지요.”
그는 선대 보스인 알렉세이와도 연이 있는 자였다.
그만큼 오래 힘과 인맥을 쌓아 온 노괴라는 뜻이었다. 알렉세이는 그와의 관계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을 예정인 미하일에겐 아직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오랜 친우의 유언을 못 들은 체하기가 곤란하군요.”
그건 즉.
알렉세이의 말에 따라 그의 딸인 카르멘을 차기 보스로 점찍어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직 내에서는 알력 관계에 따라 자신에게 많은 세력이 붙긴 했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미하일이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태양이 뜨고 지듯이, 세월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옛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은 항상 오기 마련이지요.”
“…그런 법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뭡니까?”
미하일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는 듯했다.
“태양이 언제나 대지를 내리쬘 거란 사실 말입니다.”
“흐음…….”
그러자 늙은 위원이 흡족한 표정으로 냅킨을 들고 입가를 닦았다.
다음 세대.
조직 고르곤의 선대 보스인 알렉세이가 타계하고, 그의 동생인 미하일이 자리를 잡기 위해선 조직 내에서의 지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의 인정 또한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 온 조직의 위상과 명성이 흔들리게 되니까.
미하일은 선대와 같이 정치 거물들에게 뇌물과 청탁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 전한 것이었다.
‘거절할 테면 거절해 봐라. 추잡한 돼지 놈.’
에브게니 위원이 고민하는 척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미하일은 느긋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죽은 자와의 의리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새로운 태양.”
그가 일어서 악수를 제안했다. 미하일이 깍듯하게 악수를 받았다.
그렇게 식사 자리와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는 시점. 누군가 급하게 달려와 미하일의 귓가에 전언을 속삭였다.
“…중요한 자리라고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안이 급해서…….”
미하일은 부하가 소식을 전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런 자리에 앞뒤 분간 못 하는 놈이 들어오게 두진 않았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 만한 놈이 실례를 무릅쓰고 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일일 테니까.
그 정도도 지키지 못한 머저리는 이미 그의 곁에 없었다.
“시설이…….”
부하가 말을 전하자 미하일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난 시점이었지만, 상대보다 먼저 자리를 뜨는 건 접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런 걸 잴 겨를도 없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다른 조직에서 보낸 놈들이냐? 아니면 협회에서 가디언이라도 파견했나?”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아직…….”
“설마 카르멘, 그년이?”
짐작을 이어 나가던 미하일이 머리를 털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장 출발해.”
지금은 무엇보다도 사태의 수습이 먼저였다.
* * *
균열.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갈라짐이 크기를 넓혀 가며 주위를 집어삼켰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와 같이 단단한 인간은, 도율이 보기에도 튼튼하기로는 제법 자신이 있어 보였지만.
검은 균열에 삼켜진 부분은 물 먹은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손쉽게 갈라지고 말았다. 그 절단면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게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현상이 아니란 점이었다.
‘왔군.’
검은 균열 사이로 누군가 몸을 드러냈다.
사뿐하게 풀밭을 거니는 듯한 걸음걸이로 맨발을 먼저 뻗어 내며, 한 남자가 이곳으로 걸어 나왔다.
기다란 장삼 같은 옷을 걸치고, 길게 기른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늘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는 입이 아니라 손에 가볍게 들려 있었다.
도율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망량.”
“여어.”
그러자 망량이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호기심에 고개를 빠끔 내미는 옐레나를 등 뒤로 숨기며 도율이 물었다.
“어쩐 일이지? 이런 곳까지.”
‘바깥’에서 망량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단순히 도율이 망량과 마주친 적이 없다는 의미를 넘었다.
망량은 스스로도 말했다. 도율이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넘어가는 차원이 그의 은신처이고, 초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발견할 수 없는 비밀 공간이라는 것을.
그는 다른 위협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사도라는 자들에게 뒷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그런데도 왔다는 건…….’
그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율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망량은 지금까지 지켜 온 금기를 깬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느긋한 태도로 도율에게 물었다.
“내가 줬던 건 잘 가지고 있어?”
도율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윽고 나온 그의 손바닥 안엔 망량이 줬던 나무 고둥이 조각난 채 펼쳐져 있었다.
결국 고둥은 강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괜찮아. 그렇게 됐을 줄 알고 있었으니까.”
고둥이 깨질 정도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망량이 이곳을 알아채고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와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여기선 내 누이의 기운이 느껴져.”
그렇게 말한 망량이 주위를 둘러보며 부드러운 눈매를 한층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긴 누님이 머무르기에 좋은 곳으로 보이진 않네.”
살풍경한 지하실. 커다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선 사육장.
이곳에 아는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좀 비켜주겠어?”
망량이 느끼는 누이의 기운은 도율이 가로막고 있는 복도의 저편, 깊숙한 안쪽으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복도는 좁은 편이 아니었지만, 도율은 그 너머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한 자세였다.
지금까지 침입자를 상대하고 있었으니 그게 당연했지만.
망량 또한 침입자 중 하나로 취급할 것인가.
도율이 가볍게 눈을 감고 물었다.
“거절한다면?”
그러자 망량이 가볍게 피식 웃었다.
“정이 없네.”
망량이 도율을 향해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여기 위치를 보니 제법 깊숙한 땅 밑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 둘이 부딪치면 너나 나는 괜찮다 쳐도……. 여기 있는 다른 네 동족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망량이 팔을 뻗어 주위를 가르켰다.
망량의 말과 달리, 동족이라고 해서 도율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인간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같은 인간을 차별하는 족속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위할 이유는 없었지만.
‘문제는…….’
도율의 등 뒤에는 옐레나가 있었다. 안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기분이 찜찜했다.
게다가 여기엔 백우진과 백수아도 있었다. 그들도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었다면 말로 해서 들었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거다. 전과가 있는 몸으로 망량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나가라.”
도율이 길을 비켰다.
* * *
“누굽니까? 당신은.”
백수아를 데리고 나오던 백우진이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고 물었다.
신기한 남자였다. 이 시기에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장삼을 걸치고 있었으니.
길게 기른 머리와 붉은 눈동자가 한층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걸음걸이로부터도 무언가 신선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어쨌습니까?”
이곳은 도율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몰래 들어왔다는 가능성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도율 정도 되는 각성자라면 탐지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을 게 뻔했으니.
남자는 순서대로 백우진의 질문에 답했다.
“이름은 망량. 그리고 여길 지키고 있던 남자라면, 좋게 이야기해서 지나갔지.”
“이야기……?”
백우진이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망량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망량의 붉은 눈동자가 백수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곳에 있던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는지, 백우진이 벗어 준 정장 재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백수아는 그런 망량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
백우진의 등 뒤로 몸을 숨긴 백수아를 꿰뚫어보며, 망량이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이윽고 그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적막한 지하를 가득 채웠다.
“하하… 하하핫!”
광인의 몰골이었다.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몸을 흔들며 크게 웃어 제끼는 모습에, 백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하기도 잠시, 망량의 웃음소리는 가위로 잘린 것처럼 뚝 멈췄다.
“이런 짓을…….”
손가락 틈 사이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전에 보던 것보다 더욱 붉어 보였다.
“내가 어리석었어. 깨닫는 게 너무 늦어 버렸네.”
망량이 지상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두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음을.”
백우진은 묘한 진동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수만 겹으로 겹쳐 이곳에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맞잡은 백수아의 손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각성자인 그녀는 이 현상을 보다 민감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망량이 그런 두 사람을 돌아보더니 애써 웃음지었다.
“아차. 여기선 얌전히 있기로 약속했지.”
그 미소에는 아까와 같은 친절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애는 내가 데려갈게.”
“누구 마음대로…….”
백우진이 거절할 틈도 없이, 백수아는 어느새 망량의 손을 잡고 있었다.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백수아는 백우진의 등 뒤에 있었는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무슨…….”
“그럼.”
치지직!
허공에 검은 균열이 벌어지더니, 망량이 백수아의 손을 잡아 끌고 그곳으로 넘어갔다. 백수아로선 감히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저씨……!”
손을 뻗어 백우진을 불러 봤지만, 곧 망량에게 이끌려 균열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다……!”
백우진이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균열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균열이 이렇게 순식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도, 그 너머로 누군가가 넘나드는 것도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백수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백우진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던 복도를 지나쳤다. 뛰다시피 하는 속도로 되돌아 나오자, 그곳엔 여전히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도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주위에 다다르지 못한 조직원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도율의 모습엔 상처 하나 없었다.
옐레나가 같이 있는 건 의외였지만, 백우진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혼자 왔나.”
도율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 마침내 벌어지고 만 것을 확인한 듯했다.
백우진도 도율이 저 망량이라는 남자를 모르고 흘려 보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누굽니까? 그 남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백우진이 물었다.
그러자 도율이 대답했다.
“백수아의…….”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결국 내뱉었다.
“진짜 가족.”
그 대답에 백우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