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대답할 이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백우진이 물었다.
“진짜 가족이라니, 그게 무슨…….”
도율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기 어려웠다.
백수아가 아까 봤던 망량이라는 남자와 진짜 가족이라니.
백우진이 알아봤을 때, 백수아는 가족이 없는 천애고아였다. 그걸 알아볼 때에는 끈 떨어진 연 신세였지만, 센터장 최강현에게 부탁해 알아본 것이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망량, 그 남자는 애초에 인간이 맞긴 한 겁니까?”
“…….”
백우진의 날카로운 질문에 도율이 인정하듯 중얼거렸다.
“눈썰미가 좋은데.”
도율의 경우에는 기를 통해 망량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력을 각성한 각성자에게도 비슷한 일이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백우진은 오로지 스스로의 경험과 판단력으로만 그걸 눈치챘다.
백우진이 심증으로만 추측한 걸, 도율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그에 백우진이 강하게 요구했다.
“알려 주십시오.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전부.”
그런 백우진을 도율이 의외라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줄 알고 있었다. 백우진은 계산이 빠르고 매사에 냉정한 사람이었으니, 승산이 없는 싸움에 시간과 힘을 쏟을 성격이 아니었다.
도율이 한 말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의외로 고집이 있군요. 아니면 사람이 변한 건가…….”
“이도율 씨한테 배웠겠죠.”
“저 말입니까?”
그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변명이냐고 말하려던 도율이 입을 닫았다. 찔리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도율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이야기는 여길 빠져나간 후에 합시다.”
도율의 시선이 출구를 향했다. 그러나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도율이 등 뒤에 선 백우진과 옐레나에게 손짓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 숨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우진도 알아챌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모르는 것도 좀 물어보고.”
이번엔 급하게 보낸 놈들이 아니었다.
* * *
“바실리까지 당했다고?”
암석 거한, 바실리.
비유가 아니라 정말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남자는, 조직 고르곤에서 가장 신임하는 전투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지하실에 침입한 겁대가리 상실한 놈들을 정리하러 간다고 들었을 때, 다른 조직원들은 더 이상의 투입은 불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다른 조직에서 크게 움직인 낌새는 느껴지지 않으니. 고작해야 좀도둑 수준.’
어쩌다가 지하실까지 침입하긴 했지만, 결국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이 다할 놈들. 그게 놈들의 운명이었다.
그래야 했다.
“…….”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무전에선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지하에 도착하기만 하면 금방 상대를 제압하고 사태가 종료되었다는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설마 늑장을 부리는 걸까. 아니, 그 우직한 남자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바실리가 당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전 조직에 연락 때려라. 1급 비상 상황이다. 미하일 님께도 알려.”
결국 시간이 흐르고.
미하일의 세력에 붙은, 사실상 조직 고르곤에서 투입 가능한 대부분의 전력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겉보기엔 단순한 종합 병원이기에, 험상궂은 남자들이 자꾸 들이닥쳐 주변 시민들이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이 위원과의 대담을 가지고 있던 미하일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죄송합니다.”
누군가 고개를 숙이자 미하일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쓸데없이 사과나 듣고자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고 상세하게 보고해 보라고.”
새로 잡아 온 매물을 집어넣기 위해 찾아온 몇 명이, 이곳 현장이 훼손되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 후 지하로 내려간 뒤에는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이야기.
그 후로 근처에 있던 몇몇이 급하게 소집되었고. 조직이 믿는 전력 중 한 명인 암석 거인 바실리와 함께 투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당한 것 같다는 정황.
부하가 전하는 보고를 전해 들으며, 미하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할지. 일을 가늠해 보던 미하일이 고뇌 끝에 전했다.
“전 병력 투입.”
“예!”
손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순서를 지켜 지하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행렬의 마지막에 미하일 역시 행차했다.
“보, 보스께서도 가십니까?”
“지금 사람 늙었다고 무시하나?”
“아뇨, 그럴 리가…….”
지금은 보스의 뒤를 잇기 위해 일선에서 물러나 높으신 분들과의 회담을 주로 소화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대 보스 알렉세이의 오른팔이자 미친개라 불리던 자가 바로 미하일이었다.
고르곤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카르멘이 아닌 미하일을 따르기로 결정한 이유에는.
카르멘이 단순히 풋내 나는 애송이 계집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하일이 수십 년간 조직을 위해 헌신하고 앞장서 어깨를 들이밀던 실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길게 이어지는 비상 계단을 타고 내려가, 깊고 깊은 지하에 다다르면.
이미 안개처럼 가득찬 혈향과 함께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좀 봐줘라.”
시체의 산 사이에 홀로 우뚝 선 남자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새로이 나타난 자신들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사람 지나다닐 길도 안 남겠다.”
여우 가면을 쓴 남자였다.
이만한 광경을 만들어 놓고, 자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옷자락이나 가면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있는 남자였다.
이 끔찍하고 잔인한 풍경 속에 녹아든 이질적인 존재.
“한 명……?”
단 한 명의 손에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사실은 저 남자도 이런 짓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방금 막 내려와 이 참상을 함께 관람하는 관객이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조직원이 아닌 남자가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죽일 이유로는 충분했다.
“뒈져!”
몇 조직원이 달려들었다.
몇 번이나 있었던 다른 조직과의 패싸움에서 앞장서 돌격하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흉터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채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여우 가면의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앞으로 뻗었다.
“여뢰(如雷), 비산(飛散).”
그러자 검은 번개가 몰아쳤다.
번개와 같은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 검은 줄기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검격이었다.
사방으로 퍼져 동시에 덮쳐들던 남자들이 그대로 엎어졌다.
놀라운 건.
“무슨…….”
쓰러져 죽은 건 그들뿐만이 아니란 점이었다.
‘암살조까지……?’
앞에서 휘젓는 돌격조가 있으면, 뒤에서 몰래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눈에 띄지 않게 잠입하는 암살조가 있다.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곳이라지만, 엄폐물이 없으면 숨을 수 없는 반쪽짜리 암살자들이 아니었다. 모두 은신을 기본 소양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 또한 모두 목숨을 잃고 투명하던 모습을 피로 적신 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암살조의 정확한 타이밍과 위치는 조직 내부에서도 공유되지 않는데…….’
자신들 또한 이쪽 업계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놈들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격전이 일어지는 러시아의 뒷세계에서 이름 좀 떨치는 조직이 되려면 단순히 각성자로서 강한 것 이상의 자질이 필요했다.
스스로 가진 힘이 강하다고 거기에 취해 설치는 애송이들이 잠에 들거나 술에 쩔었을 때 멱을 따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마력은 사람이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힘.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전면전이 아닌, 기습과 계략.
그러나 눈앞의 남자에게는 그조차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뻔해.”
통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암살자들의 위치를 알아낸 건 기감을 통해서였다. 도율은 이 공간 전체에 자신의 기를 퍼뜨려 거미줄을 친 것처럼 모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취한 것 자체가 이미 상대의 수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쪽에선 일상이었으니까.’
이미 정면에서는 승산이 없는 압도적인 강자로 통하던 도율을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거는 바보는 몇 없었다.
도율을 제거하기 위해선 몸값이 어마어마한 고수를 섭외하는 게 아니라, 싼값에 쓰고 버리는 살수들을 고용하는 게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었다.
덕분에 집요하게 시달린 경험이 쌓여,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기습 정도는 숨쉬는 것처럼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 * *
“커헉…….”
모든 조직원이 당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건 미하일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남자가 조절을 했기 때문인 걸 알았다. 그는 미하일이 보스인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사실 주위 놈들이 계속 보스라고 불렀기 때문에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상처 하나 없는 몸이었지만 온 힘이 다할 때까지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도 남자는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 나이에 격한 운동은 자제하라고 의사가 그랬었지…….”
미하일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 보낸 놈이지……?”
그런 미하일을 내려다보던 도율이 고민하더니 백우진을 데려왔다.
“말이 안 통합니다.”
“…….”
통역이었다.
“동료가 있었나? 네놈들은 누구지?”
여기 나자빠져 있는 중년은 백우진도 아는 남자였다. 카르멘이라는 알렉세이의 딸은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오른팔로 활동하던 미하일은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 백우진이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기에 못 알아보고 있었지만.
백우진이 가면을 벗고 눈높이를 맞췄다.
“제가 누군지 기억합니까?”
“너는…….”
지금은 사라진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던 사내, 백우진이었다.
“그럴 리가……. 넌 그때도 아무런 권한 하나 없는 애송이, 꼭두각시였을 텐데.”
그런 미하일의 평가는 정확했다.
백우진은 길드에 있을 때 뒷처리만을 도맡은 백정이었다. 심지어 그 길드조차 지금은 완전히 해체당했다.
그런 그가 이 정도의 각성자를 데리고 자신의 구역을 침입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직접 목도하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런 신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백우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옛날 일 따윈 아무래도 좋습니다. 질문은 내가 합니다.”
예전이야 어쨌든, 지금 당장의 상하관계는 명확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겁니까?”
거대한 사육장.
알몸으로 방치된 각성자 소녀들.
조금이라도 정보가 바깥에 새어 나가면, 아무리 범죄 조직이라 해도 지탄을 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조직원 대부분이 당한 지금 와서야 조직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었지만, 미하일은 이제 잃을 게 없었다.
“내가 대답할 이유라도 있나?”
그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거절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한 변태 취향의 구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밀 내용을 백우진에게 낼름 넘길 이유 또한 없었다.
“편히 죽게 해 주겠다고 협상이라도 할 셈은 아니겠지? 그래. 자네가 빽이 없었지 머리가 안 돌아가진 않았잖나. 사람 잘못 볼 친구는 아니었지, 아마?”
썩어도 범죄 조직의 보스. 정식으로 거기에 이르진 못했어도, 실질적인 오른팔로서 곱게 죽으리란 꿈은 애저녁에 버린 지 오래였다.
도율이 물었다.
“뭐랍니까?”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 건 알았다.
백우진이 대화 내용을 간략히 전달했다.
“사실일 겁니다. 온갖 거친 일을 해 온 남자입니다. 죽이는 건 쉬워도, 입을 열게 만들기란…….”
그러자 도율이 손가락을 곧게 폈다.
“뭐 하는 겁니까?”
“점혈.”
도율이 그 손가락으로 미하일의 몸 어딘가를 깊숙이 꾹꾹 찌르며 물었다.
“분근착골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곧이어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