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당장 출발합시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백우진이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그의 눈앞엔 아직까지 멀쩡히 목이 붙어 있는 미하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조직 생활에 몸을 담아 목숨을 물가에 내놓고 살아온 남자답게, 죽는 순간이 다가와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줬던 자가.
“제, 제발… 내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말하겠네. 아, 아니면 내가 빌까? 응? 부디 들어주길 바란다고…….”
아까와는 태도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담배 한 대 입에 물려 주는 게 어울려 보이던 남자가 지금은 추잡하게 바짓가랑이 붙들고 엎드리고 있었다.
미하일이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도율의 탓일 게 분명했다.
불과 몇 분 전.
도율이 손가락을 뻗어 미하일의 몸을 몇 번 찌르고 나자, 직후 미하일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근육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런 미하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눈알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입에선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뭐지……?’
잠시 후, 도율이 다시 손가락을 찔러 넣자 미하일은 그제야 온몸을 뒤틀며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신음을 내뱉었다.
“끄르륵…….”
미하일은 개구리가 우는 듯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 미하일의 반응에 의아해 하는 건 백우진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백우진에게, 도율이 태연하게 턱짓했다.
“자. 이제 물어보십시오.”
도율은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미하일이 정상적인 대답이 가능한 상태이려나.
백우진이 다시 한번 시선을 낮추고 미하일에게 말을 걸었다. 앉아 있던 걸 넘어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미하일에겐 보다 낮은 눈높이가 필요했다.
“…이보세요.”
백우진이 말을 걸자 미하일이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헉, 허억… 대, 대체 뭐냐, 방금 그건?!”
“…저도 모릅니다.”
“빌어먹을… 내, 내 몸은… 놀랄 정도로 멀쩡하군. 젠장. 그러니까 아팠겠지. 차라리 팔다리를 뽑아 버린다 해도 그보단 나았을 거야.”
미하일이 자기 몸을 더듬거렸다.
자기 팔과 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나 확인하는 걸로 봐서는 거열형이라도 당하다가 꿈에서 깨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도율이 미하일의 팔다리를 잡아당긴 건 아니었다. 마음 먹는다면 능히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가 한 건 고작 손가락으로 몸 어딘가를 쿡쿡 찌른 게 전부였다.
“환각이라도 당했습니까?”
“환각이라니!?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이 고통은 절대로 환각이 아니야!”
…이렇게 역정을 낼 정도의 질문이었나?
백우진이 떨떠름하게 도율을 올려다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런 백우진의 시선을 다르게 해석한 도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을 다시 뻗었다.
“대화가 잘 안 풀립니까?”
미하일이 역정을 내는 게, 제아무리 고문한다 해도 입도 벙긋 안 하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 도율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며 미하일이 백우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아, 아니야! 말할게! 전부 말할게! 그러니까 제발! 곱게 죽게만 해 다오!”
“…….”
백우진은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 * *
“으엑. 이게 다 뭐야?”
긴 계단을 타고 내려온 카르멘은, 지하실에 펼쳐진 참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결국 그녀도 범죄 조직 보스의 딸로 자라고, 그 뒤를 이을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다. 피나 시체를 보고 까무러칠 정신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카르멘이 씁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같은 조직 소속. 그것도 그녀의 아버지를 따르던 조직의 주요 인물들이라면 당연히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대부분 미하일에게 포섭되어 그의 명령 한마디에 이런 곳까지 달려와 이렇게 개죽음을 당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광경이 통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야.”
감상에 빠진 카르멘과 달리, 이 광경을 지켜보는 안드레이에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공포.
‘꿈인가?’
조직 내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것도 모두 목이 달아난 채로.
그들이 같은 장소에 모이면, 제아무리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 해도 묘한 긴장감 같은 게 피어올랐다. 파벌이나 라인에 따른 알력 관계가 있었기에.
그 사이에 끼면, 나름대로 실력에 자신이 있는 안드레이도 태연히 있긴 힘들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모조리 흙으로 돌아갔다니. 서로 싸우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을 상대하다가?
‘괴물을 건드릴 뻔했군.’
안드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왔습니까?”
인사를 건넨 건 백우진이었다. 그의 곁에는 도율과 옐레나가 있었다.
그들은 현장을 뜨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곧바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뒷처리였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됐습니다.”
고르곤의 유력한 차기 보스 후보였던 미하일이 죽고, 그를 따르던 조직원들도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조직 입장에서는 커다란 손해였다. 적지 않은 전력이 타격을 입었으니.
하지만 그게 반으로 나눠져 싸우고 있던 조직이라면. 그리고 그 반대 세력을 이끌고 있는, 지금은 조직의 유일해진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에게라면.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 소식은 아니었다.
“뒷일은 맡겨도 되겠습니까?”
백우진이 주위를 가리켰다.
카르멘은 눈동자를 굴려 주위 풍경을 둘러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럼. 걱정하지 말라고. 조직 입장에선 큰 화를 입은 거지만, 차기 보스인 이몸께서 친히 사면할 테니까. 하나 빚진 걸로 칠게. 그래도 되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래그래. 여기 있는 애들도 내가 책임지고 집에 돌려보내 줄 테니까.”
카르멘이 지하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백우진은 그게 지켜지지 않을 약속인 걸 눈치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린 됐습니다.”
“그래?”
백우진도 마냥 사람 좋은, 깨끗하고 떳떳한 일만 하며 지내 온 건 아니었다.
억울하고 불쌍한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로는 대부분이 살처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집이나 시설에 보낼 순 없어. 대부분은 죽을 거야. 애초에 본인들도 별로 살고 싶은 의지가 없을 테니까.”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음색이었다. 카르멘은 어쩐지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뭐, 굳이 살고 싶어 하는 별종이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카르멘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조직에서 개처럼 구르는 수밖에.”
백우진은 카르멘의 말을 곱씹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점은 아버지를 닮았군요.”
전대 보스인 알렉세이를 알고 있던 백우진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자 카르멘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어, 음…….”
이후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 되게 오랜만에 들어 보네.”
조직 내의 사람들 대부분이 미하일의 세력으로 돌아서고 난 후, 그녀는 끊임없이 보스로서의 자질이나 아버지의 핏줄에 대한 의심을 받아 왔다.
실제로는 의심이 아닌 모멸과 험담. 그렇기에 백우진의 그런 별거 아닌 말이 실로 간만의 인정이었다.
그렇게 사후 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카르멘이 농담거리처럼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대체 뭐야? 미하일한테 이런 변태 취미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감옥 조교, 뭐 그런 플레이야? 그 뭐야, 너희 나라에서 나오는 치한 플레이 성인 비디오처럼?”
“전 한국 사람입니다만.”
“아, 그래? 아무튼. 미하일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없습니다.”
백우진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연기에 서투른 자가 아니었다.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능숙한 표정 관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는 카르멘 역시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생각은 다르게 품었다.
“거짓말이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자의 감.”
방금 출신 국가도 틀려 놓고서 여전히 감을 믿어도 되나.
틀린 것도 아니었다. 백우진과 도율은 미하일으로부터 이곳의 시설이 본래 어떤 목적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자행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낱낱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그걸 굳이 카르멘에게 전할 필요는 없었다. 이 시설은 오늘부로 폐기된다. 그거면 됐다.
“그래서, 미하일은?”
“죽었습니다.”
“그건 알아. 시체는?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
백우진이 도율을 돌아봤다. 도율도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무언가를 카르멘에게 던져 줬다.
미하일의 수급(首級)이었다.
양손으로 미하일의 머리를 받아 든 카르멘이 그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되게 웃기는 얼굴로 죽었네.”
그러고는 작별 인사를 하듯 미하일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잘 가요, 삼촌.”
그 직후, 더는 미련이 없는 돌멩이를 버리는 것처럼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바로 돌아갈 거라고?”
“마무리 지을 일이 있습니다.”
백우진이 그리 대답했다.
도율과 백우진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일정을 잡았다. 아직 이번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카르멘이 짐짓 아쉬운 척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같아선 며칠 머무르라 하고 싶지만, 덕분에 이쪽도 당분간은 꽤 바빠질 것 같아서. 대접할 여유가 없을 것 같네.”
주요 간부진이 싸그리 다 날아간 상황이니, 조직을 재정비하려면 앞으로 며칠, 어쩌면 몇 주는 정신이 없을 게 뻔했다.
겸사겸사 뒷방 늙은이들도 같이 정리하고. 이참에 조직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통성을 내다 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명맥으로부터 발휘하는 힘 역시 포기하기엔 아쉽기에.
“관심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긴.”
카르멘이 쓸쓸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어차피 진심은 아닐 터였다.
“저 왔습니다.”
도율이 돌아왔다.
도율은 옐레나를 파벨과 칼에게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파벨과 칼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완전 무장 한 채로 병원까지 왔으니까.
사색이 된 얼굴로 팔다리를 벌벌 떨며 각오를 다진 채 미하일의 관할 구역에 쳐들어갔는데, 도율과 백우진이 옐레나를 데리고 있는 모습에 턱이 땅에 닿을 듯 벌어졌다.
그 와중에 안드레이와 카르멘을 보고 잽싸게 무릎을 굽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러 모로 바쁜 놈들이었다.
–야, 이 멍청아! 네가 무슨 사탕 사 준다고 쫓아가는 코흘리개냐?!
–멍청이는 누가 멍청이야! 보스가 더 멍청하다! 꼴랑 둘이서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
그렇게 시끄러운 놈들을 떠나 보내고.
카르멘이 도율과 백우진이 탈 만한 차량을 하나 수배해 줬다. 렌트했던 차량은 미하일의 부하들이 타이어에 펑크를 내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왜 이런 짓까지…….”
안드레이가 새로운 차를 몰고 나타나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조직은 당장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이 모자란 상태였으니까. 그 원인을 제공한 남자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도율과 백우진이 차에 올라탔다.
운전대는 모처럼 도율이 잡았다. 각성자도 아닌 백우진은 요 며칠 체력을 소모한 탓에 피곤해 보였으니까.
그들을 배웅하며 카르멘이 물었다.
“언제 또 와?”
“계획은 없습니다만.”
“당신, 나한테 빚 있잖아.”
그러고 보면 그러기로 했던가.
“안 되겠다. 당신 까먹을 것 같으니까 그냥 지금 받자.”
“미안하지만 지금은…….”
카르멘이 불쑥 차창 너머로 팔을 집어넣어 백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도율과 안드레이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카르멘이 백우진의 몸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음.”
도율이 시선을 피했고, 안드레이는 입을 떡 벌리고 지켜봤다.
백우진은 일반인이었던 만큼 힘으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보, 보스! 제정신입니까?!”
안드레이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카르멘은 만족할 만큼 즐기고 나서야 백우진을 놓아주었다.
“왜? 처음 봤을 때부터 말했잖아. 내 취향이라고.”
“…….”
그때야 술에 취해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줄 알았다. 그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기실 누구보다 당황한 건, 러시아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도율이었다. 둘이 언제 이런 사이가 됐는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도율이 백우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뭐, 하루 정도는 더 머물러도…….”
“당장 출발합시다.”
백우진이 운전대를 빼앗을 기세로 명했다.
진짜 그래도 되나 싶었지만 일단 도율이 페달을 밟았다. 차가 떠나가는데도 카르멘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백미러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도율은, 왠지 모르게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서늘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