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재밌어?
“그럼 실례하겠소.”
최강현이 노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어느새 길게 자란 하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도 슬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할 나이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무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었다.
[얼마든지.]마른 나뭇가지 같은 앙상한 몸의 노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손가락만으로도 흔적도 없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몸을 가진 노인네에게, 그들은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의 세월을 도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근래 들어 그에게 도전하는 건 최강현 한 사람에 불과했다.
[아쉽구로. 가능한 많은 이들과 손을 섞는 게 노구의 즐거움이거늘…….]노인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최강현은 웃을 수 없었다.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건지 모른다. 어쩌면 수십 년이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은 정신의 세계인 덕분인지 생리 현상으로 곤란해질 일은 없는 건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정신력, 그 자체다.’
그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노인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는 건 어지간한 끈기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츰 포기하는 인원이 늘었다. 단순히 포기에 그치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법을 서겠습니다.”
“…부탁하마.”
백건우가 창을 들었다.
그는 노인과 싸우는 것이 아닌데도 무기를 든 채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노인과 마주할 때에 손에 무기를 쥘 필요는 없다. 그 노인과의 대결은 보다 깊은 심상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다.
백건우가 싸우는 건 다른 존재들이었다.
“오오-!”
성대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쓸데없을 정도로 넓은 새하얀 공간. 시야가 허락하는 만큼 멀리 내다 뻗어 볼 수 있는 풍경에, 저 멀리 점으로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서 거대한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기형에 가까운 거인이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는 다발과 같은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그 위를 손톱과 같은 비늘들이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을 다루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지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몇 걸음은 걷다가 실패해 커다란 몸뚱이를 바닥에 처박았다.
쿠웅-!
지축이 울리는 듯한 충격을 냈다. 그대로 움직이는 게 더 편한지 거인은 엎드린 채로 손과 발로 바닥을 밀어 몸을 움직였다.
가가가각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뚱이가 다가왔다.
그 광경을 보며 백건우가 중얼거렸다.
“윤태성…….”
그는 한때 백건우의 동료였던 자였다.
이곳, 정신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노인에게 도전을 거듭하다가 깨닫게 된 것은. 이곳에서는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에 그치지 않았다.
-이걸 봐라.
윤태성이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를 불러 모았었다.
커다란 근육을 자랑하는 그는 근손실이라는 게 온다며 이곳에 온 후로도 매일 운동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깨달았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커진다.
그렇게 말하며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보여 줬지만, 다른 이들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저기, 뭐가 달라진 건데?
-쯧! 봐봐! 삼두근이 좀 더 커졌잖아!
-기분 탓 아니야?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그의 분석은 정확했다.
여긴 정신의 세계여서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다. 그들 또한 시간이 흐르는 것만을 느낄 뿐 몸 상태는 그대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생각만으로도.
-더 강한 힘! 더 튼튼한 육체! 성장의 한계를 모르는 이곳에서라면, 언젠가 저 노인을 족칠 수 있다.
그렇게 말한 윤태성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다지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점점 그 근육이 커지고. 그와 더불어 키와 같은 것도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너 너무 커진 거 아니냐.
-그런가?
그런 말을 들은 건,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적당히 하다 그만 자라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크기의 몸을 가지고도 노인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하여 더 크고 강력한 몸을 추구했고, 그렇게 윤태성은 끊임없이 커져 갔다.
이윽고 손가락이 팔뚝만 해지고, 피부가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져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때 근육을 받치기 위해 손톱이 자라나 그 위를 덮었다.
그가 인간의 모습을 잃어 갈수록, 인간성 또한 마찬가지로 사라져 갔다.
[정신이 버티지 못한 게지.]노인이 남의 일처럼 설명했다.
이곳에 가둬 두고 있는 장본인이면서 설명은 아끼지 않았다.
[무학이란 단순히 심줄이 질기냐에 달린 게 아니거늘. 거기에 기대기 시작하면 짐승과 다를 게 뭘꼬. 쯧쯧…….]그러나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난 건 윤태상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팔이 세 개, 네 개가 되면 더 많은 무기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머리가 많아지면 보다 넓게 보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직 이론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 손을 댔다. 결국 한낱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 육신을 버리고 마력과 하나가 되면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주장했다.
누군가는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손에 넣으면. 혹은 검과 하나가 된다면 보다 강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던 자들은 모두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고 정신을 갉아먹혔다.
이윽고 남은 건 두 사람.
최강현과 백건우뿐이었다.
노인과 최강현이 마주 앉자, 저 멀리서 한때 동료였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자들이었다.
백건우의 상대가 바로 그들이었다.
백건우가 창을 쥐었다.
* * *
“요정주…라고?”
이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레나를 노려보았다.
마계의 존재들 중 무언가의 주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건 그들 모두를 지배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뿐이었다.
달리 말해,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이매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마계의 다섯 사도 중 하나인 요정주, 세레나였던 것이다.
다섯 사도의 존재까지는 알고 있어도 그 개개인이 모두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자들이 아니라면, 상대가 정말 사도인지 확신할 순 없었다.
이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웃기지 마. 네가 정말 사도라면 이곳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사도란 하나같이 거대한 힘의 결정체와 같은 자들이었다.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제멋대로인 성격을 앞세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폭탄들이었지만, 드물게 그 커다란 힘이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현현(顯現)이었다.
“진짜 사도가 여기까지 내려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매가 확신을 담아 추궁했지만, 세레나는 오히려 받아쳤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왜냐니…….”
“너도 할 수 있었으면서.”
“그건……!”
솔직한 말로, 이매의 힘은 사도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대답하려던 이매가 숨을 들이켰다. 사도에는 미치지 못할 뿐, 이매 또한 너무나도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가 인간들 세상에 녹아들기 위해 했던 건, 그 커다란 힘을 일부 봉인하는 것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라고 할 수 없단 법은 없잖니?”
확실히 방법은 있지만. 아직 이매는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도의 힘은 보다 커다랗기 때문에, 아무리 봉인한다 해도 불가능했다. 아무리 최소한으로 압축한다 해도 지나갈 수 없는 크기였다.
그 힘을 완전히 포기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힘을… 버렸다고?”
이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세레나를 쳐다봤다.
사도란 자들이 각자 성격이 제각각이고 개성이 강하다 해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자는 없었다. 힘이야말로 사도란 존재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레나는 그 추측을 단칼에 부정했다.
“내가 왜?”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올 수 있게 됐지.”
“그러니까, 어떻게?”
“그 이유를 나한테 물어야 하니?”
세레나가 이매에게 눈짓했다.
“너 때문인데.”
“나라고……?”
세레나의 말에 이매는 웃기지 말라고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설마…….”
사도와 같은 자들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수 없는 건 그만큼 커다란 힘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무리하게 큰 힘을 가진 자들이 오가게 된다면, 두 세상 모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스로 그 커다란 힘을 포기하거나 감추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네가 이쪽 세상에 넘어와서 힘을 회복한 만큼 격차가 줄었잖니.”
이매가 인간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조용히 힘을 회복하는 동안, 사도들이 존재하는 세상과의 격차 또한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매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웃기지 마. 내가 그 정도도 계산 못 했을 것 같아?”
“그럼 계산이 틀렸나 보지.”
세레나가 담담하게 반박했다.
어쨌든 지금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이매가 틀렸다는 걸 의미했다.
“너 또한 이쪽 세상 인간들에겐 이질적인 존재란 걸 잊지 않았겠지? 원래 이곳에서 살아가던 자들이 힘을 키우는 것과 너라는 이물질이 덩치를 늘리는 건 얘기가 다르니까.”
“그건…….”
미처 알지 못했다.
세레나는 당연한 것처럼 말했지만 이매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야 사도에 비하면 그런 지식은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세레나가 이매에게 말해 준 것도 일종의 알심이었다.
덕분에 세레나는 가지고 있는 힘의 대부분을 봉인한 채로나마 이쪽 세상의 던전에 현현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힘을 봉인한 데다가 완전히 인간계로 갈 수 있었던 건 아니기에 누구도 시도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게 가능해졌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내가…….”
이매가 갈 곳을 잃은 눈동자를 하고 중얼거렸다.
인간들을 돕기 위해 헌터들을 키우고 스스로의 힘을 회복한 것이, 오히려 사도를 불러 모으는 꼴이 되다니.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좀 더 많은 준비를 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이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레나가 말을 붙였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난 전쟁 같은 건 관심 없거든.”
“…….”
이매의 의심스러운 눈길에 세레나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정말이야. 난 딱히 기회가 생기자마자 인간들을 사냥하러 온 미친 전쟁광이 아니야. 애초에 그랬다면 이렇게 던전 안에 얌전히 있진 않았겠지.”
“그건…….”
설령 사도인 세레나가 아직 던전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성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다.
이매가 좀 더 힘을 회복하도록 조용히 지켜보다가, 인간계에 올 수 있을 때가 될 때를 노리는 게 더 적절한 판단이었다. 정말로 침투하길 바란다면.
하지만 세레나는 성급하다 싶은 타이밍에 던전에서 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매 또한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세레나가 답했다.
“궁금한 게 있었거든.”
“궁금한 거라고?”
“그래. 너한테밖에 물어볼 수 없는 거.”
이매가 이를 빠득 깨물었다.
사도인 세레나가 물어볼 거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동족의 위치에 관한 것. 사도들에 의해 고향을 파괴당하고 낯선 땅으로 도망쳐 숨어든 동족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 사도들이 궁금해할 만한 거라면 그게 분명했다.
“내가 답할 것 같아?”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
이매가 조용히 노려봤다.
“좋아, 얼마든지 물어봐. 내가 대답할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다면.”
이매의 코웃음에도 개의치 않고 세레나가 물었다.
“재밌어?”
“뭐?”
이매는 순간 세레나의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레나는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건조하고 태연한 태도를 모두 벗어던지고, 반짝이는 듯한 눈망울을 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인간 세상 말이야, 재밌냐고.”
이매에게 있어선,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