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응원할게
[뭐야. 벌써 끝인 게냐?]노인이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최강현이 바닥에 무릎을 붙인 채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이었다. 신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노인과의 대결 속에서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휴식을 취하고 다시 덤빌 수 있었다. 그러나 최강현은 더는 일어설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바로 그 점을 꿰뚫어 보고 물었던 것이었다.
“…오늘은, 그렇소.”
최강현이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지만.
오늘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최강현은 더는 노인에게 도전할 결심이 서지 않았다. 벌써 몇 년이나 같은 짓을 반복했다.
노인은 늙지 않고, 자신도 늙지 않는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발전은 아득하기만 하다. 자신이 한 걸음 걸어가면 노인은 웃으며 열 걸음 제친다.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 정도면 오래 버텼나.]노인에게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제정신을 잃으면, 정신의 세계인 이곳에서는 곧 신체 통제권을 잃고 이 새하얀 공간을 떠도는 괴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건우에게 가는 부담이 늘어난다.’
백건우는 안 그래도 인간을 벗어난 괴물들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판국이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건 정신이 파괴된다는 뜻.
괴물이 되어 버린 자들은 이곳에서 나간 후 치료를 통해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에 이른 정신까지 되살아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의지를 잃고 괴물이 되어 이곳을 방황하면, 누구도 평생 탈출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
그렇게 남은 두 사람인 백건우와 최강현은 서로 역할을 나눴다. 백건우가 괴물이 되어 버린 자들을 막아서고, 최강현이 노인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처음엔 한 명의 괴물만 찾아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전을 그만둬야 했지만. 최강현이 노인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최강현이 먼저 지칠 정도로.
“돌아가지!”
최강현이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백건우를 찾았을 때,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네…….”
“오셨습니까.”
백건우는 창을 꽂아 둔 채 어딘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쯤 숨 가쁘게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으리란 최강현의 예상과는 달리,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 운이 좋게도 아무런 불청객도 찾아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다…….”
최강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잃은 자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건 백건우가 아니라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바닥 위를 기고 있는 괴물들이었다.
백건우가 앉아 있는 건 거대한 몸뚱이를 자랑하던 거인의 가슴 위였다. 그 또한 팔과 다리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백건우는 창을 뽑고는 거인의 가슴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동합시다. 이렇게 해 놔도 시간 지나면 회복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백건우가 그들을 향해 보내는 시선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동료였던 자들을 상대하는 경외심은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나마 숨통을 끊지 않는 것이 동료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완전히 숨통을 끊어 다음부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게 편한 길이겠지만, 일말의 회복될 가능성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그런 번거롭고 어려운 일을, 백건우는 어느새 손쉽게 해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노인과 괴물들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벌린 후, 백건우가 물었다.
“얼마나 쉬시겠습니까?”
최강현이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 동안 경계를 서겠다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식사나 수면은 불필요했지만, 휴식은 필요했다. 특히나 노인에게 다시 도전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하지만 최강현은 그게 불필요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다음은… 없네.”
그런 최강현의 말에 백건우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까.”
백건우는 최강현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 또한 최강현이 얼마나 숱한 좌절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강현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네가 하게.”
“…저 말입니까?”
“그래.”
최강현의 말에 백건우는 어색하다는 듯 창대를 긁었다.
“너무 오랜만이군요.”
백건우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노인에게 도전하는 동안 몰려오는 괴물을 막는 역할을 했다.
최강현과 백건우,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괴물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막습니까?”
백건우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성을 잃은 자들이 적었던 때에는 모두가 힘을 합칠 수 있었다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 됐다.
“내가 하지.”
“하지만…….”
“조용. 됐네.”
최강현에겐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백건우도 만류하려 했지만, 최강현은 듣지 않았다.
“더는 힘들어. 저들도 언제까지 저 모습으로 괜찮을지 모르고.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데, 나로서는 기약이 없지.”
백건우가 수없이 벌어다 준 기회를, 최강현은 유의미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곳에서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건 백건우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현실적인 문제로 계속 순서가 뒤로 미뤄져 왔지만.
이제는 그 가능성에 걸어야 할 때였다.
“그러니, 부탁하네.”
최강현이 백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 * *
“난 전쟁 같은 건 관심 없어.”
세레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화려하게 생긴 무늬가 그려진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내려앉았다.
빛이 반사되어 형형색색의 색깔로 빛나는 듯한 날개를 가진 나비는, 이매의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필시, 세레나가 만들어 낸 나비였다.
“전쟁엔 관심 없다고?”
“정말이야. 사도들이라고 해서 죄다 남의 주머니 터는 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사절이야.”
세레나의 말대로 사도들의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침략과 약탈을 통해 주머니를 불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누군가는 치열한 싸움과 희열에 눈이 돌아가 있었고. 또 누군가는 모종의 질서와 규율에 얽매여 있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른 와중. 세레나 역시 그들 중 누구와도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난 말이야, 뭐가 됐든 재밌는 걸 원해.”
세레나의 관심은 재밌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과 즐거움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말이야, 네 인간계 생활은 아주 재밌어 보였단다. 그래서 그 감상을 듣고 싶은 거야.”
“재밌어 보여?”
이매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눈앞의 여자 또한 다른 사도들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동족들을 뒤로하고 홀로 인간 세상에서 구르는 건 모두 너희가 저지른 짓 때문이야. 그런데 그게 재밌어 보여?”
이매가 세레나의 손가락에 내려앉은 나비를 움켜쥐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 보이면, 내가 너희도 똑같은 신세로 만들어 줄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도, 얼마나 힘이 들어도. 반드시 그렇게 해 줄 테니까.”
이매가 움켜쥔 손바닥을 펼쳤다. 그 틈새로 가루가 흘러내렸다.
“기대하고 있어.”
탁상 위에 발을 올리고 내려다보며 으름장을 놓는 이매를 올려다보며, 세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했잖니.”
“넌 존재 자체가 시비를 걸고 있어.”
“음…….”
세레나가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자꾸 그렇게 나오니 상처받는걸. 나도 배려해 줄 여유를 잃고 있어.”
“배려?”
확실히. 이곳에서 세레나는 일절 무력 행사 없이 대화만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리한 현현으로 대부분의 힘을 봉인한 상태인 그녀로서는, 아직 힘을 회복해 둔 이매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일 터.
아직은 성장 중인 인간 헌터들의 싹수를 짓밟아 놓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는 듣기 거북했다.
“배려는…….”
“너도 즐겼잖아.”
세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소매로 입가를 가리자 반짝이는 눈동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깊이 소용돌이치는 구멍과도 같았다.
이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게 무슨…….”
“나는 요정주 세레나. 네 알량한 정신머리 따위는 속속들이 파헤칠 수 있단다.”
세레나가 앞으로 걸었다. 그 눈동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매는 거리를 벌리든 고개를 돌리든, 그 시선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레나의 입에서 주문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도 즐겁다고 생각했잖아. 인간들과 지내는 생활이, 신기하고 생소해서 재밌게 여겼잖아.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누군가를 알아 갈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잖아.”
세레나의 말대로였다.
처음엔 단지 더 빠른 복수를 위해 인간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피어 올랐다.
“그대로 복수는 잊고,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죄책감도 묻어 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어울려 지내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나?”
“닥쳐…….”
“그야 그렇겠지. 그도 그럴 게, 넌…….”
이매는 소매로 가린 세레나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미소 짓는 걸 느꼈다.
“사랑에 빠졌으니까.”
이매가 정신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그 입 닥치라니까!”
콰앙!
꼼짝하지 못하던 이매의 팔이 거세게 휘둘리며 천장을 덮쳤다. 그로 인해 팔각정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세레나는 그 여파만으로 크게 물러났다. 전투 능력은 거의 갖추지 못한 듯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섰다.
“이제 네 수법을 알겠어. 그 잘난 입만 꿰메 놓으면 아무 문제 없단 걸.”
“그건 곤란한데.”
세레나가 충고했다.
“중요한 문제로부터 눈 돌리고 스트레스 해소부터 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조언 고마워, 심리 상담사 선생.”
이매가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더 할 거냐?”
“설마. 항복이지.”
근접 전투에서 세레나는 이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원래의 두 사람이었다면,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 전투가 성립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레나는 이매의 주먹이 코앞에 닿기 직전에도 곧바로 멈출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원래의 힘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면.
지금 상태로는 이매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상처받게 될 거야.”
“내가 알아서 해.”
이매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종족부터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
처음엔 깨닫지 못했다. 이매는 백건우가 풋내 나는 애송이일 때부터 알고 지냈다. 심지어 그를 지금의 헌터로 키워 낸 것도 그녀였다.
그런 백건우에게 마음이 쏠리는 건 일종의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스승이 제자를 아끼는 감정이거나.
세레나가 자신의 감정을 까발렸을 때 쪽팔려서 벌컥 화를 내긴 했지만, 결국 부정하지는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진뿐이야.”
이매의 다짐에 세레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진심인데, 응원할게.”
“퍽이나 고맙다.”
이매의 주먹이 세레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공격을 당하기 전 몸을 내뺀 것이었다.
이곳에선 더 이상 세레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녀가 만들었던 풍경 또한 녹아내렸다.
이매의 추억 속의 공간이, 불타 사라지던 때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또 보진 말자고.”
추억은 추억 속에.
이매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