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최후의 들숨
“그럼, 부탁하마.”
최강현이 백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 날. 그렇게 불러도 좋을 만한 시간이 지났는지는 확신할 수도 없이, 백건우가 최강현을 대신해 노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로 인해 대결 중인 백건우를 지키는 건 반대로 최강현의 몫이 되었다.
이성을 잃은 자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노인을 공격하러 오는 것이지만, 자연스레 근처에 있는 도전자 또한 휘말리게 된다.
그렇기에 최강현이 다른 모든 괴물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강현 형님.”
“뭐냐?”
“약속 하나 합시다.”
“웬 약속?”
백건우가 낮은 목소리로 단단히 일러두었다.
“위험해지면 도망치는 겁니다.”
“에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약속해 주십시오.”
승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더는 동료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최강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알았네, 이 사람아.”
그렇지 않아도 쉽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최강현과 백건우뿐이었다. 저 괴팍한 노인에게 도전할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하지만, 주변의 방해를 치우기 위해선 또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자신이 당한다면 백건우는 마음 놓고 노인에게 도전할 수 없게 되니,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다.
‘그때까진 살아남아야지.’
백건우에게 가능한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최강현에게 남은 마지막 역할이었다.
다짐을 받아 낸 백건우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제와 달라진 도전자의 얼굴에 노인은 놀라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오늘은 너냐.]“그렇게 됐습니다.”
백건우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인의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주름이 깊게 팬 노인은 입을 열지도 않고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싸울 수 있었다.
노인과의 싸움은 이렇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수를 떠올리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와라, 애송아. 노구는 항상 선수를 양보하나니.]“실례하겠습니다.”
머릿속에서, 백건우는 창을 쥐고 있었다.
노인의 주름지고 앙상한 몸이 지근거리에 요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몸을 찌르는 건, 거부감이 느껴지는 행위라는 것만 감안하고 나면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창날을 뻗자 노인의 손가락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움푹 팬 눈두덩이 사이로 노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창날을 비틀어 빼자 노인의 손가락이 미련 없이 창을 놓아 줬다.
백건우가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다. 창날이 긴 호를 그리며 노인에게 가까워졌다. 창대를 붙들고 있는 백건우의 손가락이 마냥 단단하지만은 않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에 노인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고얀 놈. 늙은이가 일어서게 하는구나.]말투와 달리 노인은 아주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 한창이지 않습니까.”
[끌끌. 그런다고 안 봐준다.]노인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도 온갖 공격을 막아 대는 고수였으나,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고 발바닥을 놀리기 시작하면 더욱 까다로워졌다.
[오라.]노인이 손바닥을 까딱였다.
백건우가 창을 쥐고 발을 내디뎠다. 너무 성급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걸음걸이였다. 그건 백건우의 호흡이었다.
발을 뻗을 때 발밑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으니 시야가 자유로웠다. 넓게 보이는 모든 곳이 백건우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창은 길게 뻗어 노인을 노렸다. 성과를 거두지 못해도 흐름은 이어졌다.
까다롭지 않게 공격을 막아 내는 노인을 상대로, 백건우 역시 필사적이지 않은 연격을 펼쳤다.
오랜만에 상대하는 백건우의 변화에 노인이 중얼거렸다.
[힘이 빠졌군.]백건우가 노인에게 도전하지 않는 동안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최강현을 지키기 위해 이성을 잃고 괴물로 변한 옛 동료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자신과 다르다는 건 그도 자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던전과 게이트에 들어가, 피부가 질기고 덩치가 큰 마수들을 상대로 있는 힘껏 창날을 후벼 파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엔 태산을 능히 무너뜨릴 힘을 갖는 것이 목표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여겼다.
지금은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대충 하는 건 아닙니다.”
[안다. 노구를 뭘로 보느뇨? 노구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사람은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통설이 있었지만. 때로는 높이 날기 위해 가벼워질 필요도 있었다.
[네 스승은 누구였지?]“스승은…….”
백건우에게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은 이매뿐이었다.
그 전엔 단지 창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력으로 강인해진 몸을 믿고 단순하게.
그런 백건우에게 창술의 기본기를 가르쳐 준 건 이매였다. 그녀의 고향에서 쓰이던 것이었다. 그걸 펼치기 위해서는 상당한 완력과 체력이 필요했다.
힘을 쏟으면 쏟을수록 백건우는 더욱 활약할 수 있었다.
[안 맞는 옷이었다.]노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백건우는 군말 없이 이매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그조차도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더 많은 노력으로 부족함을 메우려 애썼다.
[최고의 스승은 자기 자신인 법이니.]이곳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축적한 백건우는 어느새 자기 자신만의 기술을 갈고닦은 것이었다.
아이는 모두 부모로부터 독립할 때가 온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스승이 저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 말하는 백건우의 표정은 시원스레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살피던 노인이 무언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무얼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변하지 않은 이유.]이곳에선 더 많은 성장을 할수록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최강현은 원래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원래의 모습을 버렸다.
반면 백건우는 자기 자신을 지킨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보였던 게로군.]백건우는 노인의 말이 머리로는 정확히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입으로는 인정하는 말이 나왔다.
“예. 그럴지도요.”
그런 백건우의 눈에 검은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건 백건우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하게 펼쳐진 새하얗고 광활한 공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검은 아지렁이는 그렇게 사라지고 난 빈자리였다.
노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시간이 다 됐군. 돌아가실 모양이야.]“예?”
[지금까지 잘 버텼네.]노인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무언가 다른 이유로 이곳이 사라지고 있었다.
[짧았지만 즐거웠다네.]노인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백건우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이곳에서 얼마나 긴 세월을 보냈기에 그 긴 시간을 짧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창을 쥐고 태세를 갖추는 백건우를 보며 노인이 물었다.
[이런, 분이 덜 풀렸나?]“그런 건 아닙니다.”
이대로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마지막까지 어울려 드리지요.”
백건우의 말에 노인은 한동안 벙찐 얼굴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크핫핫!]아직 이곳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워낙에 넓은 공간이니, 저 붕괴가 이곳에 올 때까진 아직 멀었다.
설령 남은 시간이 일 분, 일 초라 하더라도. 백건우는 마지막까지 창을 놓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거야.]노인이 답을 알려 주었다.
[자네 동료들. 되돌릴 수 있어.]“…정말입니까?”
[인간의 몸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면, 길을 벗어난 자들도 돌아올 수 있어. 다른 이들의 등불이 되어 주면 돼.]백건우의 동료였던 자들의 이성을 좀먹은 건 두려움과 엇나간 욕망이었다. 사람의 길 위에서 탈선해 황무지를 달리면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런 그들에게 다시금 믿음을 심어 주는 것이 백건우의 역할이었다.
노인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려면 이 노구를 쓰러뜨려야겠지? 남은 시간, 많지 않을 걸세.]“압니다.”
수십 년간 도전해도 꺾을 수 없던 노인이었다. 노인의 실력은 아득하기만 해서 손에 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건우는 아득한 것을 좇길 즐기는 학도였다. 닿지 않는 별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백건우의 창날이 반짝였다.
[깨달았나.]그 목소리는 백건우에겐 닿지 않았다.
노인, 허자도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손과 발을 놀렸다. 이런 때에 흥을 깨는 눈치 밥 말아먹은 노인네는 아니었다.
“허억, 허억…….”
저 멀리, 노인을 향해 몰려온 괴물들을 상대하던 최강현이 숨을 고르던 와중. 이상 사태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온통 새하얘서 천장과 벽의 구분조차 없던 이곳에 검은 실금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나 균일했던 빛에 불균형이 나타나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벽이 허물어지고 천장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은 끝 모를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이게 무슨……?”
최강현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성을 잃은 자들 또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멀리, 아주 작은 갈라짐으로 시작한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무너지고 있는 건가, 이곳이?!”
최강현이 노인과 백건우가 있는 곳을 향해 돌아봤다.
지금이라도 건우를 깨워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도망칠 만한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 공간이 무너지고 나면 그들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들은…….’
한때 백건우와 최강현의 동료였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헌터였던 자들. 이성을 잃은 채 이곳을 배회하는 괴물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싸우고 있을지언정,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이 있다면…….
어느새 무너지기 시작한 바닥이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최강현이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도 보다 안쪽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중심지는 누가 봐도 노인과 백건우가 마주 앉아 있는 지점이었다.
“저기는…….”
이 모두가 거기로 달려들면, 분명 집중은 끊기고 말 게 뻔했다. 최강현이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달려 나갔다.
그때 거대한 손바닥이 그것을 낚아챘다.
“오오-.”
“너……!”
거인이 붕괴를 피해 달아나려는 몇몇을 붙들었다.
붙들린 자들이 미처 저항하기도 전에, 거인은 끝없이 펼쳐진 검은 심연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인이 가라앉으며 최강현과 눈을 마주쳤다.
최강현도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믿는다, 건우야!”
최강현 역시 남은 이들의 발을 붙들었다. 홀로 다른 자들을 모두 상대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붕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자도 있었다.
결국 최강현이 백건우에게 가는 모든 방해를 막아 내고 떨어졌다.
그 넓었던 공간도 이제는 조각만 한 땅밖에 붙어 있지 않았다. 허자와 백건우는 좁디좁은 땅 위에 발끝을 붙이고 계속해서 서로를 몰아붙였다.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불안정한 땅 위. 두 사람은 마치 허공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정신의 세계.
허자는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니었다. 신세를 지고 있을 뿐, 그에겐 이곳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 주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면 공간 또한 없어진다.
그리고 허자는 그곳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낡을 대로 낡은 몸뚱이가 마지막 숨을 내뱉기 직전, 시간을 무한히 늘어뜨릴 수 있는 이곳에 온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백건우가 창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이 허공을 박찼다. 그의 발을 지지해 주던 마지막 땅마저 한줌의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졌다.
공간이 사라짐과 함께 허자 또한 주인을 따라 사라져야만 했다.
[…그동안.]그러나 이 젊은 무인의 상대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신세 많이 졌소.]들리지 않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몸이 무거웠다. 눈꺼풀이 눌어붙었다. 바짝 마른 눈알은 앞을 제대로 보기나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온몸의 관절이 돌처럼 굳어서 삐걱거렸다.
허자는 제 역할을 한 지가 오래인 탓에 쭈그러든 폐로 깊게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오라!”
최후의 들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