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도망치자고는
‘어둡다.’
백건우의 눈동자엔 어둠만이 비치고 있었다.
빛이 한 줌도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득할 정도로 넓고 밝았던 장소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후였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가까이, 아직 노인이 있다. 백건우의 상대로서 숨을 쉬고 살아 있다.
숨을 거둘 날이 머지않은 늙어 빠진 몸뚱이로 최후의 순간까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예민해진 백건우의 감각은 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
저 멀리, 다른 이들이 느껴졌다. 백건우가 던전에 들어올 때 함께했던 동료들이.
시간이 지나 이성과 원래 모습을 잃고 광활한 백야를 배회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 자들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도 그들은 계속 같은 공간 안에 있었다. 노인과의 대결이 정신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것일 뿐.
그러나 지금, 그 모든 허상이 깨지고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이라는 매개를 빌려 이루어지려 하고 있을 때.
백건우는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이들의 앞길을 비춰 주는 등불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말을.
지금 다른 이들에게 노인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저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나?
노인은 지금 최후의 시간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금세 죽음에 이르겠지만, 그걸로는 승리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으며.
노인이 영원에 가까운 여흥을 내던지고 맞이하는 최후의 시간을 그에 걸맞은 예우로 보내 주어야만 했다.
그러기엔 이곳이 너무 어두웠다.
이토록 어두운 곳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밤눈이 밝아도 달빛이 비춰야만 볼 수 있다. 그조차도 모자라다면 하늘에 점처럼 박힌 별빛들이 뿌리는 부스러기라도 긁어모아야 한다.
이곳엔 별빛이 필요했다.
“빛이 필요하다면…….”
백건우가 어둠을 들추듯 창날을 들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마력이 흘렀다.
마력을 통해 동작을, 무기를 보조하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다. 형태를 빚어내 현실에 간섭하면 그 파괴력은 곱절이 된다.
뛰어난 헌터라면 보다 강한 힘을 지니기 위해 누구나 의식하고 훈련하는 그 행위를, 백건우는 이제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었다.
그의 의식에는 마력을 움직이겠다는 의지조차 없었다.
인위적으로 만드는 흐름이 아닌, 행동을 통해 유도하는 흐름. 자연스러운 동작을 펼치면 근육이 반겨 주는 것처럼, 마력 또한 제자리를 찾아가듯 요동쳤다.
그 파동은 백건우를 은은하게 비추듯 미약한 빛을 뿜어냈다.
백건우가 가진 마력이 퍼져 나가며 어두운 공간 속을 질주했다. 끝을 모르게 달려 나가는 마력들이 꼬리처럼 짙은 반짝임을 남겼다.
검은 공간 속, 백건우의 마력이 반짝이는 알갱이처럼, 때로는 흩뿌려진 기체처럼 빛을 남겼다.
그 가운데에 선 백건우는 천체의 중심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였다.
“날, 봐라-!”
의지를 잃고 인간의 몸을 버린 자들에게.
창 한 자루와 맨몸으로 선 백건우가 외쳤다.
“흡!”
노인의 손바닥이 찔러 오는 백건우의 창날을 틀어막았다.
본디 살과 뼈에 불과한 고기로 날카롭게 벼린 강철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노인이 지닌 고강한 무위가 그걸 가능케 했다.
그 광경을 의식만 남아 이곳을 부유하는 모든 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한때는 노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길 바라는 자들이었다. 같은 염원을 꿈꿨던 자들이 일제히 그 마음을 되새겼다.
마음에 품은 소망이 별들에 전해졌다. 인간이 밤하늘의 별에 대고 소원을 비는 것은 무의미한 사색이지만, 같은 인간인 백건우에게는 전해졌다.
백건우의 주위로 빛이 가루처럼 모여들었다. 그 궤적은 곧은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백건우의 창이 그 경로를 따라 쏘아졌다.
최후의 일격은 저항을 덧없는 물거품으로 만든 채 노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섬광이었다.
“훌륭하다.”
노인이 입가에서 검은 피를 토해 냈다. 그러나 괴로움도 없는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편히 쉬십시오.”
백건우가 묵념했다.
* * *
“형!!”
몇 날 며칠을 닫혀 버린 균열 주위를 지키며 지낸 백건영은, 눈부신 빛무리가 나타나자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던전 공략을 위해 균열에 입장한 헌터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던전 공략에 시간이 소요되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 균열이 닫힌 채 아무도 나오지 못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내에서의 첫 대형 던전 공략인 만큼, 그 관심은 더욱 뜨거웠다.
대형 던전이니 그만큼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건 당연한 거라는 반응도 잠시, 며칠이 지나자 결국 던전 속에서 공략에 난항을 겪고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뉴스에는 자칭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나와 떠들었다.
[측정한 수치에 의하면,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던전을 공략하고도 남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건 모종의 이유로 일이 틀어졌고, 인원이 부족해져 더는 공략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겠지요.] [에……. 아무래도 이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비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남은 생존자들도 던전 공략이 불가능해졌다면 결국…….]던전에 있는 모든 인원이 사망에 이르면 균열은 다시 열린다. 그러나 굳게 닫힌 균열이 열리지 않는 것은 아직 생존자가 있다는 뜻.
백건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은 푸른 빛과 함께 사람의 그림자를 뱉어 냈다.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이럴 수가! 속보입니다! 놀랍게도 국내 첫 대형 던전은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닌, 생존자들의 귀환을 알리며 공략 완료를…!”
함께 대기하던 기자들이 카메라를 앞세워 다가가려 했으나, 마치 어떤 장벽에 가로막힌 듯 나아가지 못했다.
‘마력이……!’
그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마력이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헌터로 활동하던 각성자였던 백건영만이 힘겹게 밀도 높은 마력을 헤치고 백건우에게 다가갔다.
“형……?”
강렬한 빛과 짙은 마력으로 인해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으나.
다른 이들이 모두 쓰러져 정신을 잃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것에 반해, 유일하게 창을 쥐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백건영은 그가 형인 백건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기다리던 형이 서 있었다.
“…내 동생.”
백건우가 확인하듯 곱씹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형?”
백건영은 그런 백건우의 반응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왠지…….’
백건우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책임감 강하고 어른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막중한 무게에 짓눌려 지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경험으로 인한 변화인 걸까. 백건우는 한층 가벼운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지친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 며칠이나 던전 안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을 테니, 피곤하기도 피곤할 테지만.
“걱정했잖아.”
“미안하다.”
“후…….”
살아 돌아오면 쏘아붙여 주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왠지 얼굴을 보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백건영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무사히 돌아왔으니 일단 됐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아, 좀.”
백건영이 장막 바깥에 있는 기자들을 가리켰다.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지금이 가장 뽑아 먹기 좋은 타이밍인데 대체 뭐 하냐는 듯이 핀잔을 줬다.
백건우는 아랑곳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매는?”
“못 봤어.”
돌아온 사람들 중 이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최강현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은 채 앉아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깨어난다 해도 과연 제정신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선 최강현이 보다 잘 정리해 줄 테니, 백건우는 이매를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또 시작이군,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백건영에게 백건우가 전했다.
“길드 이름 정했다.”
“뭐라고?!”
백건우가 백건영의 귀에 한 단어를 속삭였다.
플레이아데스.
그게 백건우가 말한 길드의 이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등장에 백건영이 백건우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게?”
“길잡이라는 뜻이다.”
“길잡이라…….”
백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백건영이 만족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백건우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뒤는 부탁한다.”
“뭐?! 잠깐!”
그 새하얀 공간에서도, 부서지고 깨진 후의 우주와 같은 공간에서도 이매의 모습이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당장 이곳에 없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도 같이 빠져나오긴 했겠지.’
이매를 찾아 백건우가 몸을 날렸다.
* * *
‘이쪽인가.’
의아하게도 백건우는 이매가 있는 위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과 마력에 대한 운용이 그걸 가능케 했다.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건우는 마력을 넓게 펼쳐 손으로 헤집는 듯한 수색이 가능했다.
당하는 쪽에서도 단번에 눈치챌 만한 조악한 컨트롤이었지만, 이매라면 백건우를 피하거나 하지 않을 테니 괜찮았다.
“이매?”
이매가 있는 곳은 사람의 흔적이 적게 닿은 숲속이었다.
막상 와 보니 이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도.
백건우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매를 찾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
거기엔 커다란 나무 위 높게 자란 가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이매가 있었다.
“내가 가지.”
백건우가 뛰어올라 단숨에 이매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충격으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도 없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걸 지켜보던 이매가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치켜세웠다.
“몸놀림이 가벼워졌는걸.”
“그런가?”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백건우는 정신의 세계에서 아주 오랜 시간 몸과 창을 다루는 법을 익혀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을 잡은 순간에서부터 그곳에 가기까지 배워 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곳에서 익힐 수 있었다.
이매의 곁에 앉은 백건우가 참았던 질문을 쏟아 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던전에 같이 들어간 줄 알았는데, 어디서도 널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네가 도망치거나 한 건 아니겠지만, 궁금해서…….”
“나도 바빴어.”
이매는 사도를 만나고 왔다.
그건 단순히 바쁘다는 말로는 표현 못 할 중대사였다. 다른 이들과 함께였다면, 그들은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가.”
다소 생략된 설명을, 백건우는 무리하게 캐묻는 일도 없이 받아들였다.
“…뭐 더 안 물어봐?”
“네가 바빴다면 정말이겠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설명하지 않는 이유도 있을 테고.”
“…….”
그 말대로였다.
사도를 만났다 해도 백건우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 건 고민해 봐야 할 일이었다. 단순히 그가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먹을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사도란 자들은 이름과 존재가 알려지면 더욱 쉽게 넘어올 수 있다. 지금 시기에 그런 짓을 하는 건 패배를 앞당기는 자충수였다.
백건우는 이매에게 더 질문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이쪽은 신기한 일이 있었다. 같이 들어갔던 동료들이 모두 널 잊어버렸는데……. 따로 떨어진 것과 관련 거였겠지? 그나저나 원래대로 돌아왔을지 모르겠군.”
백건우는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처럼 털털하게 웃어넘겼지만, 이매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나에 대해 잊었다고……?”
“그래. 이름이나 얼굴은커녕, 존재 자체도 다. 강현 형님까지 영문 모를 얼굴을 하셨었으니, 말 다 했지.”
이매가 세레나의 말을 떠올렸다.
응원하겠다는 말. 그때는 고약한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정말로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거라면…….
“건우야.”
“왜?”
백건우를 부른 이매가 잠시 주저했다.
웃음도 안 나올 이야기였다. 그녀가 동족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 뛰쳐나온 이유는 인류를 성장시켜 마족에 맞서 싸울 대항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백건우는 그녀가 키운 최고의 제자였다. 직접 갈고닦은 창날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망치자고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