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그게 누군데?
“이매? 왜 그러지?”
백건우가 이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무슨 일 있었나?”
백건우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매는 늘 밝고 기운차거나, 불같이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는 여자였다. 항상 기운이 넘쳤고, 피로나 고민 따위는 없는 것처럼 굴곤 했다.
-앉아서 대가리 싸맨다고 뭐 바껴? 움직여!
이매가 곧잘 백건우나 백건영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하는 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말수가 적어진 채로 침울하게 앉아 있으니, 백건우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일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기운을 잃지 않을 줄 알았는데.
“…됐어, 인마.”
이매가 눈을 치뜨고 쏘아붙였지만, 여전히 평소와 같은 기백은 없었다.
“그보다, 너한텐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설명해 봐.”
“우리 쪽 말인가…….”
이매는 세레나와 따로 시간을 보내느라 백건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간단히 귀띔 받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탈출하기 어려운 곳에 갇혀 있었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지만.
단순히 어딘가에 감금 당해 시간을 보내고 왔다기엔 그 변화가 눈에 띄었다. 겉보기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지만.
‘마력이…….’
이매가 처음 만났을 때의 백건우는 미물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웃기지도 않는 패거리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지만, 대요괴인 그녀의 눈엔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그걸 몇 년에 걸쳐 애송이에 가까운 수준으로 키워 놨는데, 지금은.
이매도 백건우가 그녀를 찾기 위해 마력을 펼쳐 주위를 훑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숨기는 데에는 서투른 걸 넘어서, 숨길 생각이 없는 짓이었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백건우가 지닌 마력의 밀도였다.
‘어느새…….’
애초에 어지간한 마력으로는 꿈도 못 꿀 짓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 버리는 걸 보면,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거기서…….”
백건우가 느릿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거기서 있었던 일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던전에서 나온 직후만 하더라도 모든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남에게 얘기하려니 기억이 흐려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오랜 꿈을 꾸었던 것처럼.
백건우는 그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이매에게 전달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빠져 있었지만 굵직한 우여곡절은 모두 전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어림잡아 수십 년의 세월은 보낸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막상 나와 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았다.
‘꿈은 꿈인가.’
그런 백건우를 바라보며 이매가 중얼거렸다.
“애들은 금방 자란다더니…….”
“누가 애냐.”
백건우가 애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물론 이매가 보기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됐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매가 백건우에게 물었다.
대형 던전이라는 어설픈 이름을 붙인 곳에 들어갔다가 그 고생을 하고 나왔다. 까딱하면 거기에 영원히 갇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매가 세레나를 쫓아낸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사도에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앞으로의 던전 공략에 상상도 못 한 위험이 뒤따르리란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던전이나 게이트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전국민 앞에서 대형 던전을 공략한 일등공신이 되었으니, 이제와서 뒤로 뺄 수도 없다. 앞으로의 여정은 이와 같이 목숨을 건 도박의 연속이다.
그걸 깨닫고도 계속할 거냐고, 이매는 묻고 있었다.
“길드 이름을 정했다.”
“뭐?”
지금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이매는 이해하지 못했다.
“플레이아데스. 이야기해 준 것, 기억하나?”
“기억 안 나.”
이매는 백건우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긴 했지만, 그 대부분의 내용은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곤 했다.
“우주의 지도를 그릴 때, 기준점이 되어 주는 성단의 이름이지. 나는 드넓은 우주의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백건우의 눈동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은 알려진 게 많지 않은 미지의 세상을 밝히기 위한 기준점이 되어 주는 별들. 나는 우리 길드를 그런 존재로 만들 생각이다.”
별을 올려다보는 백건우의 눈동자.
그의 시선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키며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낼 때마다, 이매는 어딜 봐도 똑같이 생긴 하늘에 어떠한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백건우가 떠들 때마다, 이매의 눈이 향하는 곳은 결국 백건우의 옆얼굴이었다.
“…두렵지는 않고?”
백건우도 한때는 막연한 공포를 품었던 적이 있었다.
우주 공포증이라는 말도 있던가. 새까만 어둠 속,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하고 먼 존재들을 맞닥뜨렸을 때. 한없이 작은 인간의 보잘것없음에 등골이 쭈뼛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럴 때 위안이 되는 건, 그래도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건우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이 아니라 이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곁에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래…….”
백건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매는 쓸쓸함을 느꼈다.
백건우가 말하는 이매는 지금의 이매와는 다르다. 언제나 걱정 없이, 앞장서서 백건우를 타박하곤 하는 이매였다.
사도와 재회하고 두려움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에 가라앉은 지금의 이매와는 달랐다.
이 청년의 마음속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반짝이고 빛나는 별은. 지금의 자신이 사라져야만 앞으로도 영원히 밝게 빛나리라는 것을.
‘내가 이 녀석을 그렇게 키웠지.’
두려움 앞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전사로.
‘나 자신은 그럴 수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면, 그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네.”
“이매?”
이매가 나뭇가지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백건우가 뒤따라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매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뒤돌아 선채로 외쳤다.
“하산이다!”
“뭐……?”
“넌 이제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잖아. 더는 네 옆에서 붙어먹어 봤자 효율이 안 나와.”
이매의 말대로, 지금의 백건우라면 그녀가 없어도 나아갈 수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백건우는 이매가 계속해서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랬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매는 누누이 말해 왔다. 자신은 요괴이며 나약한 인간들을 키우기 위해 온 거라고.
세상에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두루 키우는 게 효율이 좋은 게 당연했지만, 미숙한 자신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걸 생각하면 붙잡을 염치가 없었다.
뒤돌아본 이매는 백건우가 익히 알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뭐야, 아직도 이 누님한테 껌딱지처럼 붙어 있고 싶은 거야?”
“아니, 괜찮다.”
“그래?”
그제야 백건우는 이매가 인기척 드문 숲속에 와 있는 이유를 알았다.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되나?”
“글쎄, 정해지진 않아서.”
“그런가.”
이매의 대답에 대책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답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
“…그럼.”
이매가 휙 뒤돌았다.
백건우가 그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또 볼 수 있는 거겠지?”
“…….”
이매는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입매가 웃음을 짓고 있던가. 백건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이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던전에서의 일을 겪고 나름대로 이매에 견줄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걸 느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영원히 이별인 것도 아닐 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며 꾸준히 앞을 향해 걷다 보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제자를 기르고 있는 이매와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백건우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형!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숲에서 빠져나오자 동생 백건영이 잔뜩 성이 난 모습으로 백건우를 반겼다.
“어디긴. 이매를 찾으러…….”
그러고 보니 이매가 떠나며 백건영에겐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백건영은 뭐라고 반응할까. 그런 눈엣가시 같은 여자가 제발로 떠나 준다니 감사하다며 절을 올릴까. 아니면 인사 한마디 없이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에 경우가 없다며 성을 낼까.
그걸 예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백건영의 반응은 백건우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게 누군데?”
“누구냐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백건영 역시 잘 알고 있지 않나.
잊은 거냐고 물으려던 백건우가 입을 닫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재주도 많군.”
백건우가 이매와 이별을 나눴던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건영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 시선을 따라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백건우가 술병을 기울였다. 하얀 도자기로 빚어 낸 듯한 조그마한 잔 안에 투명하고 맑은 액체가 담겼다.
그 맞은편에 있는 건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린 주대현이었다.
“술 마실 때마다 떠나간 여자 얘기 주절거리는 것 좀 그만두면 안 되겠나?”
푸념 들어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주대현은 벌써 몇 번이나 이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건우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샘은 끝이 없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달달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주대현의 핀잔에도 백건우는 뻔뻔하게 웃어넘겼다.
“어떡합니까? 이매를 기억하는 사람이 저 외엔 어르신뿐인 걸.”
“쯧. 나이 먹더니 얼굴 거죽만 두꺼워졌군.”
백건우의 말대로, 이매가 떠나며 그녀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졌다.
그날 백건우와 함께 대형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갔던 헌터들은 물론이고. 던전에서 귀환한 직후엔 이매를 기억하고 있던 백건영 역시 까맣게 잊었으며.
길드에 이름을 붙이기 전부터 함께 활동하며 이매에 대해 알고 있던 오랜 길드원들조차 모두.
설령 백건우가 술김에 이매의 이야기를 흘린다 하더라도.
-어……. 그런 얘기를 했었나? 미안, 어제 너무 달렸나? 왜 기억이 안 나지?
어떠한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다음 날이면 모두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그런 와중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주대현이 유일했다.
“아내도 있는 놈이…….”
그건 일종의 협박이었지만.
“얘기해 봤자 기억 못 합니다.”
백건우에겐 먹히지 않았다.
이매가 떠나고, 해가 바뀐 것도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동안 플레이아데스 길드는 크게 성장해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가 되었으며, 그 길드장인 백건우 역시 한국 최고의 헌터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성창(星槍) 백건우.
그날 대형 던전을 공략했던 자들 또한 당대에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헌터들이었으나, 모두 정신적 상처를 얻었고. 일부는 회복한 후에 일상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길, 백건우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백건우가 우주 속에서 빛나는 별빛을 벼린 창으로 최후의 일격을 내지르는 장면을, 그들 모두가 꿈결에서 본 듯한 흐릿한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한 헌터가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길드 또한 백건영의 보조하에 최고의 길드에 이르렀다. 길드의 앞날을 위해 유력한 정치가의 딸과 정략결혼까지 했다.
승승장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삶이었으나, 백건우는 세월이 지날수록 주대현을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잦아졌다.
“다음엔 더 쓸 만한 놈들로 갈아치워야겠군.”
그런 백건우가 찾아오는 게 몸서리치게 지겨워서 주대현은 호위를 고용했지만.
누군가는 백건우를 보자마자 허리를 굽히며 사인을 받고 돌아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맡은 역할을 다하려 했던 자들도 죄다 백건우에겐 상대가 안 됐다.
염증을 내는 주대현에게 백건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 아니면 누가 이런 산골 오두막까지 어르신을 찾아온다고 그러십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주대현이 바라 마지않는 게 바로 그거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렇게 그리워할 거면 차라리 직접 찾지 그러나.”
술 마시며 궁상이나 떨 게 아니라.
그런 주대현의 말에 백건우가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찾고 있는 겁니다.”
“뭐?”
백건우가 한쪽 입가를 끌어당기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언젠가 만날 겁니다.”
“…….”
우수에 찬 눈빛으로 투명한 수면을 바라보는 백건우. 그 수면에 무엇이 반사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 가사 같은 말귀를 진지하게 지껄이는 걸 보니 맛이 가도 단단히 간 게 분명했다. 주대현이 백건우와의 술자리를 기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주대현도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술 없이는 견디기 힘든 놈이었다.
“네놈은 나이를 거꾸로 처먹는 게 분명하다.”
칭찬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