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됐다
“이젠…….”
클레어의 턱 끝까지 독 안개가 차올랐다.
밀폐된 공간. 뱀의 입속에 들어와 있는 클레어는 서서히 차오르는 독 안개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뱀의 입 안 가죽을 타고 위로 올라가 보려 해도 칼이 박히지 않았다. 베어 내고 나가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직 들이마시지 않았는데도 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갑옷의 보호와 회복도 소용이 없었다. 독의 안개는 클레어가 입고 있는 갑옷의 마력을 뒤덮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더욱 빨리 당했겠지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방법이…….”
필사적으로 궁리를 짜내어 봐도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진동이 한 차례 울려 퍼졌다.
구웅-!
“어……?”
그에 뒤따르듯 초저주파의 울림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괴로워하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는 클레어가 있는 이 안쪽 공간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 위로부터 빛줄기가 내려왔다.
아주 좁은 틈으로 밝은 빛이 쏟아 내리는 것처럼 선명한 광채가 클레어가 있는 곳을 밝히고 있었다.
클레어가 그 광원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틈새는 점점 더 크게 벌어져, 쏟아져 내리는 빛의 양과 밝기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이곳을 가로막고 있는 천장 따위가 없었던 것처럼 환한 빛과 함께 하늘의 색이 드러났다.
그 커다란 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잠깐……!”
이 안엔 독이 가득하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착지한 누군가가 클레어의 팔을 잡아당겼다.
남자는 능숙하게 클레어의 무릎 아래에 팔을 집어넣고 안아 올렸다.
직후 가볍게 발돋움하는 것만으로 클레어를 안고 드높은 상공까지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어두운 입속을 빠져나가 새파란 하늘 속에 둘러싸이게 됐다.
클레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빛에 아직 시야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
동료들에겐 구조 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점을 눈치채고 와 줬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가볍게 누군가를 들고 뛰어오를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탁.
땅 위로 착지하는 느낌이 들자, 클레어가 지면으로 다리를 뻗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런 건…….”
원래도 클레어는 다른 헌터와 친분을 나누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를 상대로는 더욱 매몰찼다. 굳이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지금의 자신은 나름대로 유부녀이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들어 올리듯 안겨서 옮겨진 건 불편했다.
“그래요?”
그런데 상대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싫었어요?”
설마.
“도율 씨?”
“네. 전데요.”
클레어가 눈가를 비볐다.
클레어의 눈앞에 있는 건 정말로 도율이었다. 검은 정장 차림에, 가면조차 쓰고 있지 않은 채로.
얼굴을 보면 뭐라 불만을 쏘아붙여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클레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그 피는……?!”
“아차.”
도율의 셔츠 위로 검붉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다친 거예요?!”
놀라움 반, 걱정 반이었다.
그야 남편이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나면 당연히 걱정이 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예전 자신이 아무리 이겨 보려 애써도 불가능했던 도율이 이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긴! 피가 이렇게 많이 났는데요!”
“벌써 다 나았죠.”
도율이 보란 듯이 셔츠를 들어 올려 몸을 보여 줬다.
“어……. 네. 그, 그렇군요.”
가까이 들여다보던 클레어가 헛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그런데, 정말 여긴 어쩐 일인가요?”
“어쩐 일이긴요. 같은 목표를 갖고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그렇다는 건, 도율 씨도 이 거대 몬스터를 막으러?”
“비슷합니다.”
다만 도율의 경우 더 커다란 목표가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요괴, 현무를 포함한 다른 모든 요괴들을 막아 세우는 것. 현무는 목표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게 가능한 건 여러 사정을 알고 있고 내공을 다룰 수 있는 도율뿐이었다.
‘그동안 요괴들을 막는 건…….’
이곳엔 마침 클레어와 그녀가 속한 팀이 와 있었다.
현무가 이대로 계속 이동해 사람들의 터전에 도착하면 큰 피해가 발생하리라는 건 도율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다간 복구 작업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게 될 테니, 주대현이 준비하는 작전에 차질이 생길 게 뻔했다.
“우선, 팀장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도율의 요구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연락할 방법이 있었다.
* * *
“그러니까.”
클레어의 연락을 받고 청진명을 비롯한 다른 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하지만 도율과 함께 있는 건 청진명뿐이었다. 도율이 맨얼굴인 걸 발견한 청진명이 팀원들을 모두 물렸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팀장의 의사였기에, 클레어 역시 다른 팀원들과 함께 있었다.
“댁이 갑자기 나타난 이 요상한 몬스터들을 죄다 집에 보낼 계획을 꾸리고 있다 이거지?”
“비슷합니다.”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괴들은 모두 삶의 터전을 잃고 도망쳐 망량의 은신처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습격을 시작한 이상. 그곳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다시 숨을 순 없었다.
“좋아. 협력하지. 우린 뭘 하면 되지?”
“정말입니까?”
“속고만 살았나. 나 청진명이라고. 호쾌한 거 빼면 시체인 남자.”
자칭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 목적이 이 거대 몬스터를 막는 거였으니까. 누가 누굴 돕는다고 할 것도 아냐. 협력. 맞지?”
무엇보다도.
청진명의 팀은 도율에게 빚이 있었다.
일전, 사도라는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도와준 게 다름 아닌 도율이었다. 도율은 딱히 생색을 부릴 생각이 없었고, 청진명도 거창하게 갚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갚는다. 은혜는 그런 식으로 털어 버리는 편이 마음 편했다.
“그럼, 제가 아는 현무에 대한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청진명이 진지한 기색으로 도율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사신수라 불리는 존재들을 비롯해 현무가 그 중 하나라는 것. 담당하는 방위와 다루는 능력에 대한 정보. 신체의 구조와 강점과 약점 모두 전달했다.
그 설명을 들은 청진명이 중얼거렸다.
“역시, 몬스터는 아니군.”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말이었다. 청진명의 말대로 현무는 몬스터가 아닌 영물.
마력이 아니라 내공을 바탕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결과와 현상으로부터 그 원리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청진명의 직감과 경험이 어우러진 통찰이었다.
“여기까집니다. 다시 들려드릴까요?”
“됐어. 모두 기억했으니.”
“그럼, 팀원들과 함께 약점을 공략하며 최대한 저지해 주시길 부탁하죠.”
“저지?”
청진명이 코웃음을 쳤다.
“내 팀을 너무 물로 보는구만. 처치를 잘못 말한 거겠지.”
“예, 뭐. 모쪼록…….”
청진명이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질질 끌 시간은 없었다. 이미 혼란스러운 상황에 거대한 재앙을 서비스로 얹어 줄 순 없었다.
진지하게 마음을 다잡은 청진명을 보며 도율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의외로군요.”
“응? 뭐가?”
“대련, 하자고 할 줄 알았더니.”
“뭐?”
도율이 아는 청진명은 얼굴만 보면 대련 타령을 하는 남자였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도율이 직접 대련 약속을 인정하기까지 했는데. 이다음에 마주치면 정말 꼼짝없이 붙잡힐 거라는 예상과 달리, 청진명인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그를 입증하듯 청진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다.
“사람들 안전이 먼저인 게 당연하잖아.”
“…그렇네요.”
청진명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럼, 댁도 힘내라고.”
그렇게 격려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긴 채 청진명이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청진명이 몇 마디 말을 하고 팀원들과 함께 몸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본 후. 도율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나도 합류해볼 까.”
도율이 흰돌이와 백우진이 있는 곳을 향했다.
* * *
「싸한데…….」
또다.
백우진이 올라타 있는 건 거대한 백호였다. 어슬렁거리며 네 발로 걷기만 해도 웬만한 장갑차보다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다.
그 위에 타고 있으면 시야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평생을 헌터와는 거리가 먼 일생을 살아왔던 백우진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심지어 그 호랑이가 말까지 했다.
그게 귀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동물의 의사가 이토록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테이머 관련 스킬을 각성하면, 계약한 마수에 한해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겨우 등에 올라탄 정도로 계약이 됐을 리도 없거니와, 이 호랑이는 도율을 대협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뒤늦게 테이머 스킬을 각성했을 리도 만무했고.
「응? 안경. 싸하지 않냐고.」
“안경이라니……. 저 말입니까?”
「그래. 너.」
그 호칭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백우진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싸하다니. 뭐가 말입니까?”
「그야……. 지금까지 아무런 적도 나타나질 않았으니 그렇지.」
흰돌이는 도율이 일러 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곳에 도율이 찾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자신만 해도 그 앞에 심상치 않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대단한 게 있는 곳이라면, 그것을 지키는 호위 병사들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랬으면 이 안경이 죽을까 봐 그랬다고 하면 되는데…….’
당장이라도 튀고 싶은 기분을, 흰돌이는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
마땅한 변명거리도 나타나지 않은 채로. 조금씩 미혹을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초조한 이유였다.
“…이 앞에 뭐가 있다는 겁니까?”
하지만 백우진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흰돌이의 전음을 들을 수 있는 건 체질의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율처럼 싸우거나 먼 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힘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훈련도 성장도 하지 않고 방치했으니.
「하이고. 폐급이랑 팀이 됐네.」
“폐급…….”
「뭐, 꼬와? 잘 들어. 대협이랑은 내가 먼저 같이 지냈다고. 너 같은 신입은 당연히 막내. 내 밑인 거지!」
시기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 그렇지? 역시. 안경, 네가 쓸모는 없어도 머리는 잘 굴러가네.」
서열 꼴찌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에 흰돌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텃세를 부렸다.
백우진이 긍정한 건 도율과 알고 지낸 순서나 서열에 대한 이야기뿐만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취급까지도 포함이었다.
폐기물.
그것이 백우진이 곧잘 받아 왔던 취급이었기에, 익숙했다.
「그나저나 여긴 요괴의 등 위인데 무슨 나무도 자라고 새도 날아다니고. 아주 동물의 왕국이네, 무슨.」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흰돌이가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됐다.」
“예?”
갑자기 뭐가 됐다는 걸까. 도율이 도착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백우진이 주위를 둘러봐도 도율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모습을 숨기는 장난을 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흰돌이는 곱씹듯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잦됐다.」
“…예?”
흰돌이의 얼굴은, 하얀 털에 가려져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지만.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