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기다렸다
“대체 뭐가…….”
백우진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은 흰돌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각성자가 아닌 탓에 마력으로 무언가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지는 않지만.
평범한 인간에 가까운 그가 동물적인 감각으로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한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다.
“무언가 있군요.”
「무언가? 야, 안경. 네가 뭘 모르나 본데, 그렇게 가볍게 말할 게…….」
흰돌이가 투덜거렸다.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능력이 없어서일까. 백우진은 흰돌이와 달리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원래도 표정 변화가 적고,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명백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흰돌이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두려운 느낌이 아니다.’
백우진도 거대한 무언가를 느끼고는 있지만. 거기로부터 공포나 두려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왠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친근한 느낌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뭐지?’
그 의문에 답하듯.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쫄지 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엔, 어느새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모를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여자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갈기처럼 길게 기른 머리가 귤의 색을 띄고 있었다. 그 위를 가로지르듯 새겨진 검은 줄무늬가 마치 짐승의 가죽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비대한 근육이나 이렇다할 무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날렵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한쪽 입가를 비틀어 웃으며 덧붙였다.
“대화 정도밖에 못 하거든, 지금은.”
흰돌이가 공포에 질려 호들갑을 떨었다.
「와아악! 나왔다!」
다행히 마구 움직이며 날뛰지는 않고 제자리에서 가만히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랬다면 위에 올라탄 백우진이 튕겨 나갈 게 뻔했다.
반면 백우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당신은?”
백우진의 물음에 여자가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이매.”
이매가 이마를 찌르는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올렸다.
“그렇게 불러.”
* * *
-넌 아버지 같은 위대한 헌터가 되어야 한다.
백우진이 어머니로부터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야, 빽우! 피방?”
종례가 끝난 후. 교복을 입은 아이들 무리 중 하나가 백우진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백우진은 가방을 어깨에 매며 사양의 말을 전했다.
“미안. 운동 가야 돼.”
“아오. 체대 준비하세요? 하루라도 안 가면 빠따라도 맞아?”
그러자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야.”
“왜?”
“쟤네 엄마가…….”
“아…….”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어, 그래. 파이팅해라.”
그렇게 고등학생 무리가 떠나고 난 후. 교실에 남아있던 백우진도 뒤늦게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가 끝난 후 백우진이 도착한 곳은 화랑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일 찾아와 창을 배운 곳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각성자도 아닌 인간이 창을 배워 봐야 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게이트가 터지면 몬스터를 마주칠 수도 있는 시대라고는 해도.
어차피 긴급 출동 신고를 받은 헌터가 나타나 도와주는 데다가, 정말 걱정이 된다면 마나 건이라도 장만하면 된다.
나름대로 가격대가 있는 물건이지만, 백우진의 집이 그런 것 하나 구비하지 못할 사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가격을 따진다면 화랑원에 계속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딱히 환영받는 건 아니지.’
백우진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화랑원은 본격적으로 헌터를 육성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그저 무예를 가르치는 집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헌터로서 필요한 건 무예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에 대한 이해. 몬스터와 게이트, 던전 환경에 대한 조사. 그 외에 각성자로 살아가기 위한 각종 법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선 그 모든 걸 익혀야 하니,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화랑원에서는 그것을 졸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백우진은.
‘이 나이 먹도록 졸업도 못 한 머저리지.’
애초에 백우진에게 부족한 건 실력이 아니었다.
헌터가 되기 위해 필요한 필수 조건은 단 하나.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각성자로 거듭나는 것.
그거 하나만은 노력으로 어떻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약 없는 헌터를 목표로 하고 매일 창술 수련에 매진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우진아.”
“예.”
사범님의 부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
진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헌터가 되기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갈고닦아 온 창술 실력이 있기에 각성만 한다면 다시 따라잡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가능성이었다.
사범님이 제안했다.
“너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사범이 되어 보는 건 어떠냐?”
백우진의 실력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남을 가르치는 데에도 문제는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따로 생각해 둔 거라도 있냐?”
“대학에 갈 생각입니다.”
“대학이라……. 하긴, 네가 성적도 좋긴 하지.”
백우진의 성적은 이름 있는 대학에도 거뜬히 들어갈 정도였다.
“그래. 그게 잘 어울리긴 한다.”
마치 펜 대신 창을 쥐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한 말.
사범님의 말에 백우진이 쓰게 웃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백우진은 그 말에 숨은 뜻에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화랑원의 사범님들에게 얼마나 큰 고민거리이자 골칫덩이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괴롭혀 온 대가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도장에는 한동안 계속 나오겠습니다.”
백우진이 그렇게 말하는 건 의리나 재미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사범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학교에서는 학업을 이루고, 끝난 후에는 화랑원을 드나드는 매일을 거쳐. 수능을 치른 백우진은 경영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경영학과. 최근엔 길드를 경영하는 것에 대해 배우는 곳이었다.
“아오! 진짜 될놈될이네. 뭐 운동 다니는 놈도 합격하는 대학을 나는 못 가냐?”
“응~ 재수~”
“야!”
“야, 우진아. 솔직히 말해 봐. 너 운동 간다고 구라치고 공부만 했지?”
떠들썩한 졸업식을 지나.
남은 건 새로운 대학 생활뿐인 것만으로 보였지만. 백우진이 대학생이 되는 일은 없었다.
“예? 입학 취소요?”
[네. 분명히 본인께서…….]백우진은 대학에는 합격했지만, 입학 등록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백우진이 분명히 등록 과정을 마치고 입학 등록금까지 이체했지만, 그걸 스스로 취소했다고 전달받았다.
어머니의 짓이었다.
“헌터가 대학을 왜 가니?”
“…….”
그녀는 아직도 백우진이 헌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시잖아요. 이미 늦은 거.”
“늦었다니? 벌써 포기할 생각이니?”
“저도 이제 스무 살입니다. 이제 와서 각성할 가능성은…….”
“네가 누구 아들인데!”
백우진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네 아버지가 누군데? 한국에서, 아니.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헌터였던 백건우! 그 아들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니, 그게 말이 되니? 이러면 내가 친척들 사이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니?”
“…….”
“그래. 차라리 헌터 활동부터 시작하는 건 어떠니? 네 아버지도 처음엔 평범한 농부였단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농기구를 들었던 게 시작이었다지. 그러니 너도 실전 경험부터 쌓아 보면…….”
대화가 안 통했다.
백우진은 지금까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현실을 받아들일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가여운 여자지.”
“…숙부님?”
그런 백우진에게 찾아온 것이 숙부인 백건영이었다.
“그럴 만도 해. 형님 하나 보고 결혼했는데, 정작 형님이 금방 실종되고 말았으니. 버팀목이 사라진 거지.”
“…….”
원래라면 남의 어머니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을 테지만.
당시의 백우진에겐 그럴 만한 기력이 없었다.
“길드에서 일해 볼래?”
“길드… 말입니까?”
“그래. 우리 길드.”
백건영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네 아버지가 세운 길드 말이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백우진은 백건영을 따라가고 말았다.
* * *
‘…왜 지금.’
옛날 생각이 떠오른 거지.
백건우가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쳤다. 저 여자를 보니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 일부러 꺼내는 일이 없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다.
플레이아데스 길드와 숙부 백건영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도 마음의 병이 원인이었는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의 백우진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이리 와 봐라.”
그런 백우진을 바라보던 이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저 말입니까?”
“그럼 너 말고 누구겠냐?”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 볼까.
백우진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흰돌이가 소리쳤다.
「가지 마!」
“…왜입니까?”
「수상하잖아! 지가 오면 될 걸, 왜 오라 가라야? 가면 죽는닷!」
이매가 어이 없다는 듯 말했다.
“저 겁쟁이 말은 무시하고.”
「뼈도 못 추릴 거라고!!」
흰돌이의 우려와 달리, 백우진은 이매가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생긴 게 좀 특이하긴 하지만.
어쩌면 마력 따윌 못 느끼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몰라도 위험하단 건 확실하다니까!」
“그럼 제가 가 보겠습니다.”
「뭣…….」
백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했다.
“제게 해코지를 한다면 확실히 적일 테니까, 이도율 씨한테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됐습니까?”
「안경, 너…….」
흰돌이가 눈물을 삼켰다.
「그래! 네 용기는 내가 대협께 꼭 전달하도록 하마!」
그러거나 말거나.
백우진은 이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팔다리가 시원스레 뻗은 여자였지만, 키는 자신보다 아래에 있었다.
이매는 그런 백우진을 날카로운 안광으로 뜯어 봤다.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이곳저곳 뜯어 보는 이매는 백우진에게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기…….”
이번엔 이매가 말없이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숙여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백우진은 일단 이매의 말에 따랐다.
흰돌이의 반응에 따르면 상당한 힘을 가진 자인 것 하나는 사실인 듯했으니까. 창 한 자루 든 일반인인 백우진이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백우진의 머리가 적당한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이매는 손바닥을 정수리 위에 내려놓았다.
‘설마… 정신 계열 스킬?’
백우진의 그런 의심과 달리, 이매는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움직였다.
“잘 컸다.”
“…….”
어른이 아이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을 뻗고는 그렇게 말했다.
* * *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불꽃을 두른 새, 서오가 망량에게 그리 보고했다.
실패했다는 말을 들은 망량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니, 필시 이렇게 될 것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빠르지만.’
도율이었다면 언젠가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최종 국면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정면 대결은 피할 수가 없네.”
가능하면 도율과는 싸우지 않고 넘어가고 싶었다. 지금은 의견 차이로 틀어지고 말았지만,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가자.”
망량이 은신처를 거둬들였다.
그곳을 만들고 있던 망량의 모든 내공이 다시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검었던 그의 긴 머리칼이 점점 하얗게 물들어, 이윽고 완전히 백발이 되었다.
망량이 모든 힘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백귀야행 최후, 최강의 전력.
망량이 인간계에 발을 내디뎠다.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망량의 목적이 도율을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가능하면 이곳에서도 마주치지 않고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생각은 귓가에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사라졌다.
“기다렸다.”
“…이거.”
어디에서 나타나겠다고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그의 대적자는 당연한 것처럼 그곳에 존재했다.
“마중을 나오다니, 놀랐는데.”
도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