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닮았다니까
“서둘러라!”
이매가 멀찍이 앞서 나가며 소리쳤다.
백우진도 마음만 같아서는 서두르고 싶었지만, 거센 기운이 몰아치는 탓에 한 걸음 내딛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거대한 누군가가 바람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호랑이, 흰돌이였다. 그 커다란 몸집이 있으면 백우진의 앞을 지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흰돌이가 백우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타.」
그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흩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찝찝하게 의심만 하며, 감시하듯 멀찍이 뒤따라오던 흰돌이가 백우진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그런 백우진의 물음에, 흰돌이는 앞발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하.,어쩌겠냐. 당장 여기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협은 어디서 뭐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도율이라면 분명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떠안고 있을 게 뻔했지만.
여기는 여기대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도율이 오지 못한다면 동료인 자신들이 알아서 해야만 했다.
「뭐, 후배를 돕는 게 선배의 미덕 아니겠냐?」
그렇게 말하며 흰돌이가 등을 내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백우진이 흰돌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등 위에 올라탔다고 해서 거센 기운의 흐름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걸 뚫고 나아가는 건 흰돌이가 해 줄 수 있었다.
백우진의 몫은 등 위에 단단히 붙어 있기만 하면 충분했다.
「으그그극……!」
흰돌이라고 해서 이 격류를 버티며 나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둘이 신나게 동굴 안을 굴러다닐 것 같았다. 튼튼한 자신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백우진은 피떡이 될 게 뻔했다.
이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서 가로지르는 이매라는 여자가 한층 더 두려워졌다.
‘역시 괴물……!’
여긴 사신수 현무라는 놈의 혈관이었다. 심장부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크기와 기의 흐름이 증가하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대동맥이라고 봐도 좋았다.
덩치가 커다랗고 튼튼한 거야 뭐, 그렇다 쳐도.
혈관 속에 파고들어 심장 부근으로 이동하는데, 그 기의 흐름이 너무 거세서 나아가질 못하겠다고 인정하는 건.
-주제를 알아라, 거짓된 존재야.
죽기보다 싫었다.
「지들이 잘나면 뭐 얼마나 잘났다고!!」
비록 자신은 그림 한 장에서 탄생한 존재로, 그 대단한 사신수니 뭐니 하는 건 아니었지만.
고작 이런 일에 앓는 소리를 내면 진짜 패배였다.
백우진을 등에 업은 흰돌이가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자신이 가진 기를 전력으로 내뿜어 거센 흐름에 저항하고, 굳건한 네 다리로 지면을 박찼다.
바위를 꿰뚫는 것과 같은 사투의 끝에 긴 동굴을 지나 마침내 거대한 공동(空洞)에 도착했다.
「헥, 헤엑…….」
이곳은 나름대로 기의 흐름이 안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어디론가 떠밀려 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기의 밀도는 지금까지 봐 왔던 그 모든 곳보다 높았다.
‘물속에서 숨을 쉬는 기분이군.’
백우진은 가슴이 옥죄어 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온몸에 압박감이 느껴져 행동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이 뒤는 알아서 해라…….」
흰돌이가 바닥에 자빠져 누웠다.
* * *
“고생 많았습니다.”
흰돌이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백우진이 꿋꿋하게 걸음을 옮겨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이매에게 다가갔다.
“늦었잖아.”
“이래 봬도 죽을힘을 다해 쫓아온 겁니다.”
백우진의 모습을 훑어본 이매가 물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그 창은 버리고 오지 그랬어?”
“이건…….”
백우진도 이제야 알아챘다는 듯 손에 든 창을 바라봤다.
있는 줄도 몰랐다기보다는, 쥐고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버리고 온다는 생각 따윈 하지도 못했다.
‘그럴 만도 한가…….’
화랑원에서 창을 배울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것은.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창을 손에서 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수련할 때는 물론이고, 밥 먹을 때나 잠잘 때에도 창을 쥐고 자는 훈련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힘들게 배운 걸 단 한 번도 써먹을 기회는 없었지만. 그때 배운 습관이 아직도 남아 백우진의 손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수많은 해가 지나고 나서도.
“빌린 거라서, 함부로 버릴 순 없습니다.”
백우진은 그걸 구실로 삼았다.
그런 백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매는 왠지 모르게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닮았네, 정말.”
백우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가 심장입니까?”
“그래, 맞아.”
여전히 돌로 된 거대한 동굴.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기는 했지만, 생물의 심장이라고 할 만한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신수니까. 피가 흐르는 것도, 근육으로 똘똘 뭉친 심장이 24시간 내내 힘차게 뛸 필요도 없는 거지.”
“그런 겁니까?”
“그 대신, 이렇게 전신에 기를 순환시킬 중심지가 필요한 거고.”
설명을 하던 이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안 보이는 거야?”
“뭐가 말입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이매가 백우진의 안경을 가져갔다. 그 안경에 대고 무언가 기운을 불어넣는가 싶더니, 다시 백우진에게 돌려줬다.
“써 봐.”
백우진이 다시 안경을 걸치자, 이곳엔 전혀 다른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이게 기?’
거대한 공간 속에 은은한 빛을 띄는 기류 같은 것들이 맴돌고 있었다. 그 밀도가 높을수록 짙은 색을 띄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백우진이 곁에 있는 이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매의 기는 그다지 짙지 않았다. 몸 상태가 완전한 게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으니,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매는 그 적은 기로 복잡하고 정교한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신체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빛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실낱같은 고리였다.
마치 인간의 피부와 근육을 벗겨 내고, 혈관만을 남겨 둔 모형을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 경외로우면서도 두려운 광경이었다.
흰돌이가 괴물이라 칭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나한테 한눈팔 때가 아닐 텐데?”
이매가 백우진의 뺨을 찌르며 고개를 돌려놨다.
이매의 안내에 따라 바라본 곳에는 기의 흐름이 집중되어 있었다.
애초에 이 심장이란 곳은 지금, 대부분의 기를 순환시키기보다는 흡수하고 있었다. 심장의 역할을 한다면 분명히 흡수한 만큼의 기를 다른 어딘가로 보내 줘야 할 텐데도.
‘어디선가 이 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백우진이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갔다.
사신수 현무의 심장에서 이 모든 기를 흡수하고 있는 건 백우진도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다.
“백수아……!”
백수아였다.
편안하게 누운 듯한 자세로 공중에 떠올라 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두 눈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닫혀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맨눈으론 보이지 않을 지경까지 간 거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확실히, 백우진은 지금까지 백수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매가 안경에 무언가를 해 주기 전까진.
“신체가 영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야. 순수한 기로 이루어진 몸으로 바뀌고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이론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네 눈앞에도 벌어지고 있잖아.”
단, 그러한 일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동력이 필요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이곳에 쏟아붓고 있는 힘의 양을 보면, 문외한인 백우진도 이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왜 그 대상이 하필이면 백수아인 건지. 그리고 이러한 짓을 벌여서 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대답은 이매가 알고 있었다.
“그건 말이지. 내 동생이 날 되살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야.”
“…당신을 말입니까?”
“그래.”
이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뭐, 솔직히 나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의식을 되찾은 것만 해도 벌써 반은 성공했다는 뜻이고. 이대로 계속 기를 때려 박으면 아무래도 진짜 성공하고 말걸.”
그렇다는 건, 이매는 결국 이 일을 벌인 자와 한패라는 뜻인가.
그런 백우진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이매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난 그럴 생각 없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삶에 대한 집착은 모든 자들이 갖고 있는 본능이었다.
증명해 보라는 듯이 백우진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간단해. 이 기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돼.”
“간단한 일입니까?”
“당연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데, 나라면 가능해.”
당당히 말하는 이매의 모습에, 백우진이 나름대로 납득했다.
이매가 기를 다루는 실력이 월등하다는 건 이미 그녀의 내부를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
“그럼 부탁드립니다.”
“잠깐. 문제가 있어.”
“…뭡니까?”
“대상이 문제야.”
“대상?”
이매가 손으로 거대한 기의 격류를 가리켰다.
“저걸 지금 저 아이의 몸에 냅다 들이붓고 있는데, 그 대상을 바꿔야 해. 마음만 같아선 내가 하고 싶지만, 그럼 안 돼. 오히려 영체화가 가속될 거야.”
이매와 백수아는 한 몸을 사용하는 동거인이었다. 이매의 힘이 강해질수록 백수아를 밀어낼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고 허공에 뿌리면 여기가 완전히 작살날 거야. 아무리 현무라 해도 심장이 터질 정도로 들이닥치고 있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물론이고, 저 아이도 무사하기 힘들걸. 저 호랑이가 너흴 데리고 1초 안에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면 몰라도.”
이매의 말을 듣던 백우진이 물었다.
“결론은, 저 기를 감당할 자가 필요하단 뜻입니까?”
“저 호랑이는 못 버틸 걸. 태생이 그릇이 불안정해서 물풍선처럼 터지고 말 거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여기에 남은 건 백우진뿐이었다.
이매 또한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경고를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까놓고, 불가능한 건 아니야. 불행하게도 넌 나 때문에 마력이 아니라 기를 받아들이는 체질로 자랐으니까.”
그 일이 이제 와서 쓸모가 있었다. 그래도 불안 요소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뤄 본 적 없지? 이건 그냥 기가 아니라 요기(妖氣)다. 받아들이기 쉬운 정순한 내공도 아니고,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 이런 걸 몸에 넣었다간, 온몸의 혈관을 송곳으로 쑤시는 기분일걸.”
섬뜩한 비유였지만 백우진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기에 잡아먹혀 한낱 잡귀로 전락하겠지.”
이매는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진지하게 단언했다.
“그렇게 되면 널 죽일 수밖에 없어.”
이매도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백우진은 백건우의 아들이었다. 그 백건우가 죽은 것도, 사도가 저지른 일이라지만,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다면 사도들이 그렇게 빠르게 넘어올 이유도 없었고. 백건우도 인간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인 백우진 역시 자신과 관련된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차라리 도망쳐.’
그렇게 말한다면, 이매는 조금도 비난하지 않고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우진은 도망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참는 건 익숙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닮았다니까, 정말…….”
“뭐가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냐.”
이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었다.
“그럼 시작하자.”
“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널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이매가 백우진의 등 뒤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양의 기가 백우진의 몸에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