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차라리
[며칠 전 있었던 대범람(大汎濫)은 각종 길드들, 특히 국내 최고라 불리는 청진명 헌터의 활약하에 무사히…….]백귀야행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세간에서는 요괴들의 습격을 대범람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으니, 그 이름을 정확히 알아낼 방법 또한 요원했다.
라디오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분석과 수습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전대를 쥐고 있던 백우진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도율이 되묻자, 백우진은 턱을 가볍게 기울이고 답했다.
“공을 넘긴 것 말입니다. 결국은 청진명 씨가 모두 해결한 걸로 되었는데.”
“아, 그거.”
도율이 무심하게 뺨을 긁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별로 관심도 없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건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반면 청진명은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 헌터인 주제에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방송에 출연하거나 했던 걸 생각하면 분명히.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 가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청진명 씨도 내켜 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요?”
“예. 남의 공을 가로채는 건 싫어한다고 말하더군요.”
그것 또한 청진명의 성격대로였다.
싫은데도 굳이 도맡아서 공을 차지한 건, 도율이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율이 백우진을 향해 물었다.
“그러는 백우진 씨야말로 괜찮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아도.”
“뭘 말입니까?”
“뭐냐니. 이제 더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지금까지 비각성자라고 멸시하고 조롱하던 놈들을 향해 본때를 보여 준다거나…….”
“됐습니다.”
당연하지만 백우진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도율이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곧바로 떠오른 사람과 사건이 얼마든지 있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끝도 없이 꺼낼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백우진은 뚜껑을 열지 않고 덮었다.
“애초에 이 힘, 마력과는 다른 성질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각성자라고 떠들 만한 상태가 아니겠죠.”
당신이 그러하듯이.
백우진이 도율을 곁눈질하며 그리 덧붙였다. 요기를 몸에 지니게 된 백우진도 도율에 대해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각자 알아서 책임을 지겠지만, 방향이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다 왔습니다.”
백우진이 서서히 차 속력을 줄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깡촌 시골이었다. 넓게 논이나 밭 따위가 보이고, 드문드문 파란 양철 지붕을 가진 집들이 있었다.
산등성이 어귀 근처에 대충 차를 세우고, 백우진이 앞장서 산을 올랐다.
오래 걷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흙더미가 있었다. 그 위로 잡초가 자라 있었고, 근처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묘입니다.”
“여기가……?”
백우진의 아버지라면 그 유명한 백건우다.
성전사 백건우라 불렸으며, 아직도 오랜 헌터들 세대에서는 전설이라 회자되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백건우의 제사 역시 국가나 헌터 협회에서 주관하는 커다란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그 장소가 이런 조촐한 곳은 분명히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그 의문에 답하듯 백우진이 설명했다.
“외부의 행사가 아니라, 가족끼리 인사를 올릴 때 오는 장소입니다. 어차피 시체도 뭣도 없으니, 무덤은 어디에 있어도 중요하지 않은 셈이죠.”
“…그렇군요.”
백우진은 초를 꽂고 사 왔던 소주를 뿌렸다.
“절은 올리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할 줄 모르니까.”
오늘이 백건우의 기일인 것도 아니었다.
“처음 와 봅니다.”
“예……?”
백우진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에 가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비롯한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실종된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고 어디서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숙부를 도와 길드 일을 시작한 이후로도 찾아뵌 적이 없었다. 길드의 얼굴인 백건영은 당연히 백건우의 제사 따위에도 얼굴을 내비치곤 했지만, 백우진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왠지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패작이니까.’
헌터는커녕, 각성자조차 되지 못한 반푼이가 찾아 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제 와선 모두 바보 같은 생각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의 동료를 만났기 때문인가.’
이전에도 아버지의 동료였다 자처하는 자들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료가 아니라, 일종의 추종자에 불과했다.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는 영광에 취한 자들.
그걸 위해 백건우를 치켜세우기 바빴지만, 사실 백우진은 모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속내를.
하지만 며칠 전 만난 여자는 실체가 있는 것도, 인간인 것조차도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는 달랐다.
그 여자와 아버지 백건우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우진은 왠지 모르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버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의 영웅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지만.’
아니. 사실 아버지는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았을 거다.
백우진이 술병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다 못한 도율이 앞으로 나섰다. 술을 뿌리는 게 아니라 무덤 위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거 줘 봐요.”
“예?”
술병을 받아든 도율이 능숙하게 무덤 주변에 흩뿌렸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세 번 하고는 그만두었다.
아무리 시신이 없는 가짜 묘라고 해도 무덤 위에다가 소주를 들이붓는 건 눈 뜨고 못 봐줄 짓이었다.
“…그렇군요.”
백우진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들어왔다.
“……!”
백우진의 놀란 표정을 보며 도율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깨어났다는군요.”
“깨어났다면…….”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아의 이야기였다.
* * *
“아저씨……?”
백수아는 그날 이후 며칠이나 잠에 빠져 있었다.
큰 병원에 눕혀 놓긴 했지만, 의사들도 제대로 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건 신체적인 이유도, 마력에 의한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현장에 있던 백우진과 기를 감지할 수 있는 도율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탈진이다.’
어린 몸으로 지나치게 많은 양의 요기를 받아들여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도와주려 하는 건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킬 가능성이 컸다.
결국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백수아가 이렇게 병원에서 눈을 떴다.
“체력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의식을 되찾았으니 이제 천천히 회복할 일만 기다리면 됩니다.”
아직은 퇴원하기 이르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의식은 회복하긴 했지만, 아직 요기로 인한 독이 남아 있었다. 깨끗한 식사와 재활 운동으로 모두 빼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기…….”
정신을 되찾은 백수아는 도율과 백우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존재로 하여금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심에 백수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사과를 들어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율과 백우진은 백수아가 왜 고개를 숙이는지 알 수 있었다.
“꼬마야, 그건…….”
딱히 백수아의 잘못인 건 아니었다.
도율은 그렇게 말해 주려 했지만, 백우진은 그에 관해 달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 나으면 돌아가자.”
“…돌아가요?”
“집으로.”
백우진의 말에 백수아가 떨궜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사실은 사촌도 뭣도 아니고, 고작해야 실험실에서 도망친 아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백우진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우진이 백수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때까지 의사 선생님 말 잘 듣고 있어라.”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아주 제대로 일을 벌였더군.”
주대현이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대범람, 백귀야행.
그것이 망량이 이끄는 요괴 군단의 습격이었다는 것을 주대현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과거에 이매를 만났고, 그녀를 기억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도율이 뚱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남일처럼 얘기하시긴. 따지고 보면 다 그쪽이 활동하던 시기의 이야기잖아.”
“내가 활동하는 시기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이다.”
“예, 그러십니까?”
백건우와 이매의 이야기는 도율에게 있어선 한참 과거의 일이었다.
그 과거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주대현이 이 일의 해결에 손을 거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뻔뻔한 노인네는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뒀다.
“지휘하느라 바빴다.”
“길드는 댁 손녀가 굴리잖아.”
“길드뿐만이 아니라 의료, 교통, 정치. 그런 상황에선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지. 피해가 더 커지지 않게 막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도록.”
“아, 예. 감사……. 아니, 내가 왜?”
툴툴거렸지만 주대현의 말도 사실이었다.
결국 대요괴들과 사신수를 막아 낸 건 헌터인 청진명과 도율의 역할이 컸지만, 그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를 재빠르게 수습한 건 대현 그룹의 지원 덕분이었다.
사회의 위기에 몸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나누는 기업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은 덤이었다.
‘손해는 안 보는 늙은이라니까.’
도율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주대현이 물었다.
“이번 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졌다. 알고 있나?”
“그야 뉴스를 보면 알지.”
백귀야행의 습격은 비단 국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바다 너머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모두 요괴가 나타나 피해를 입혔다. 결국은 도율에 의해 모두 쓰러지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에선 번개를 내리는 어린 소년에 의한 피해가 컸다더군. 어느 순간 휙 사라졌다지만.”
청룡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준비하고 있던 일에도 영향이 있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겠지?”
“끙…….”
도율이 멋쩍게 뺨을 긁었다.
주대현은 전 인류의 자원과 힘을 집중해 마계를 역으로 타격한다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 핵심 전력은 도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원들이 제대로 협력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판을 깔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재해가 벌어졌으니.
그 준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셈이었다.
“아니,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잘했다.”
“뭐?”
그러나 불만을 토할 거라던 예상과 달리, 주대현은 만족스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덕분에 밍기적거리던 놈들의 발등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란 걸 이번 기회에 배운 셈이지.”
주대현의 계획을 헛소리나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치부하던 수뇌들이, 이 전세계적인 대습격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지금까지 무난하게 승승장구해 가며 던전과 게이트에 대해 판정승을 거뒀다는 안일한 생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됐다.
“그건……. 좋은 건가?”
“우리에게는.”
지금은, 실체는 어떠하든 일단 평화로운 시대였다.
하지만 다시금 긴장감 가득한 전란의 기운을 풍기며, 평범한 사람들 역시 삭막하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싫으면, 죽어도 성공할 각오로 임해라.”
주대현의 의지는 뚜렷했다.
도율도 결국엔 동의했다.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걱정해야 할 건 이 일이 실패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뿐.
“그럼, 그동안 난 뭘 하면 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주대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래. 제발 이젠 아무것도 하지 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찔리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색시와 연애 행각이라도 하고 있어라. 쓸데없이 밖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
“제발 부탁이다.”
말의 내용과 달리, 주대현의 음색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