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나 욕했죠
“왠지, 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지 않나요?”
“예……?”
화창한 아침.
클레어는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흰돌이를 주물럭거리며 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클레어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자, 도율은 클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했다.
“클레어 씨는 원래 하얬는데요.”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새하얀 피부. 거기서 더 하얘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지. 되레 걱정을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도율의 대답에 클레어가 허둥지둥하며 말을 고쳤다.
“제 얘기가 아니라, 흰돌이 말이에요!”
“음…….”
애써 화제를 돌리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클레어의 말대로 흰돌이의 털은 이전보다 한층 더 새하얘져 있었다. 원래도 흰색에 가까웠던 털이 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히려 반짝거리는 것 같은데…….”
“햇빛 때문이겠죠.”
그리 대답한 도율이 흰돌이를 바라봤다.
기분 탓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렇지 않았다. 흰돌이는 빛나고 있었다.
「뭐, 숨겨진 힘에 눈을 떴다랄까요?」
도율의 시선을 느낀 흰돌이가 자신만만하게 콧숨을 내뿜었다.
「사신수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진정 위대한 존재는 이름 없이도 위대한 법 아니겠습니까? 남이 떠받들어 주는 이름에 의존하는 건 삼류…라고나 할까요? 음하하!」
“…….”
도율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흰돌이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던 사신수 백호가 아니라, 그걸 흉내 낸 그림 속의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니 당연히 겉모습만 흉내 냈을 뿐, 진짜 사신수의 힘에는 미치지 못해야 하는 게 당연했는데.
‘백우진 씨가 건네준 요기가…….’
주작, 서오의 불꽃에 화상을 입고 쓰러진 백호를 치료한 건 망량의 요기를 받아들인 백우진이었다.
그러나 치료의 과정에서 서비스가 지나치게 들어갔는지, 흰돌이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걸 넘어 분에 넘치는 힘을 손에 넣고야 말았다.
「바람과 하나가 되는 기분을 압니까? 대협.」
덕분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샴푸를 바꿨거든요.”
「샴푸……? 대협, 이 반짝임은 고작 샴푸 따위로 흉내 낼 만한 게……!」
“그렇군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되게 좋은 건가 보네요.”
클레어가 흰돌이의 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확실히 전보다 털이 윤기 있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했다.
문득 클레어가 시간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대범람 이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 정세 속에서, 청진명의 팀이 처리해야 할 일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당연히 클레어 역시 바삐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있었다.
클레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전 나가 볼게요.”
클레어는 가볍게 겉옷을 걸치고 목걸이를 둘렀다.
바깥 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숙련된 각성자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목에 두른, 인식을 저해하는 아티팩트 쪽이었다.
준비를 마친 클레어가 집안을 돌아보니, 도율이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도율은 평소와 달리 잘 가라는 배웅의 말 대신,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네?”
클레어가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다.
* * *
“거짓말 했죠? 도은이한테.”
“…….”
도율의 물음에 클레어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기, 정말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됐으니까 가죠. 어차피 저도 시간 괜찮으니까.”
클레어의 만류를 가볍게 무시하고 도율이 운전석에 앉았다.
클레어는 조금 뚱한 것처럼 도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들통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얌전히 조수석에 앉았다.
도율이 이번에 클레어를 따라나선 건 동생인 도은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해.]
-뭐가?
도은은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그런 말부터 꺼냈다.
-[오빠도 대범람 때문에 지금 세상이 난리 부르스인 건 알지? 온갖 곳에서 복구다 배급이다 해서 인력이란 인력은 죄다 쥐어짜 내고 있거든.]
-그 정도는 알지.
-[어. 그래서 지금 청진명 씨네 팀도 한 임무로 묶여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각자 맡은 일을 따로 하고 있는 상황이야.]
-그래?
그야 일손이 모자라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도은이의 말대로 수상하다고 할 만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게 뭐가 수상해?
-[그래서 울 언니도 혼자서 사건 하나 조사하러 갈 건데, 현장이 위험해서 나보고 따라오지 말라고 했거든.]
-그래, 잘했네.
청진명의 팀에 들어간 후에도 도은은 여전히 클레어의 개인 매니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스케줄을 관리하고 몸 상태를 돌보는 등, 이런 저런 일을 도맡는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클레어가 향해야 하는 곳이 던전과 같이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라면.
안전을 위해 도은은 한발 물러서 있는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
-[혼자 가는 게 분명하다고!]
-그야……. 다른 팀원들은 바쁘다잖아.
-[거길 어떻게 혼자 보내?!]
도율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야. 클레어 씨가 애냐? 어딘지 몰라도, 그 정도는 당연히 혼자서 갈 수…….
-[거기가 진해야.]
-진해?
-[경남이야. 경남 진해.]
-뭐라고……?
마침내 도율도 사건의 중대성을 파악했다.
서울에서 경상도 남부까지. 국내선은 아직 상황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고, 바로 가는 비행기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KTX를 타고 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언니 말로는 팀원 바이크를 빌려 타고 간다지만……. 말이 안 되잖아?! 세상에 누가 서울부터 경남까지 바이크로 쏴 주냐고!]
-…….
그 부분은 크게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클레어의 팀원 중에는 바이크를 타는 걸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마석을 끼워서 불법 개조를 하고, 주행 거리가 긴 걸 오히려 좋아할 법한.
‘정말 태워다 주는 거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클레어가 몰래 운전을 하기 위해 둘러댄 변명이라면.
-[가라, 오빠몬! 울 언니를 뺑소니범이 되게 만들 순 없어!]
-벌써부터 뺑소니범 취급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율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클레어는 제법 똑 부러지는 여성이었지만,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건 운전 실력이었다.
심지어 연습을 한다고 나아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습이 재앙을 낳을 가능성이 컸다.
그건 조수석에 탔던 도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송민아 씨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면서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실제로 송민아가 데려다주기로 했던 건 사실이었다.
-응. 난 뭐,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개똥벌레니까…….
지난 작전 이후로 상당히 자신감을 잃어, 클레어의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겠다고 자처했었지만.
결국 그녀도 청진명의 손에 붙잡혀 다른 일에 차출되어 시간이 비지 않게 되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헛된 희망은 가볍게 무시하고.
도율이 페달을 밟았다.
* * *
“드디어 도착이다…….”
도율이 차를 세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대범람이라 불리는, 백귀야행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파괴된 곳이 있어 돌아가느라 시간이 지체되는가 하면, 톨게이트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교통 체증이 생긴 곳도 있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배는 시간이 걸린 듯했다. 피로도는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오래 달린 게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그 녀석 등을 타고 오는 게 나았겠군.’
도율이 흰돌이를 떠올렸다.
클레어에겐 속 편한 애완동물로 남겨 주고 싶어 밝히지 않았지만, 그 다짐을 뒤로해도 좋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털빛이 바뀌고 새로운 경지에 올랐다며 사진감에 가득 차 있던데, 이참에 제대로 고생을 시켜 볼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다.
“고생 많았어요. 피곤하죠?”
“…괜찮습니다.”
클레어의 얼굴을 보자 도율은 피로가 싹 달아났다.
딱히 팔불출인 건 아니고.
‘클레어 씨가 운전대를 잡았다면, 분명히 뉴스에 이름을 올렸겠군.’
공포가 피로를 지웠다.
“그나저나…….”
도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범람 이후 전국적으로 일손이 모자란 동시에, 그 후유증이라 할 만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혼란을 틈타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던전이나 게이트에 투입할 인력도 모자라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클레어가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평범한 각성자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이상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
“아무리 남쪽이라곤 하지만…….”
“덥네요.”
클레어가 챙겨 왔던 겉옷을 벗었다.
마력을 통한 체온 조절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그런 곳에 마나를 소모해 두고 싶진 않았다.
클레어의 말대로.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쌀쌀했던 날씨가, 이곳을 기점으로 완전히 풀려 있었다.
시기에 맞지 않고, 주변과는 확연히 다른 기온. 수상한 일이란 건 확실했다.
“여기서부턴 제가…….”
“이왕 온 김에 같이 가죠.”
도율이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어차피 말린다 해도 따라올 사람이었다.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은이라면 몸을 걱정해서 절대 따라오지 못하게 했지만, 도율이라면 그런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가요.”
도율과 클레어가 걸음을 옮겼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두 사람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지로부터 밀려 나오듯 열기와 마력의 풍파가 느껴졌다.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심지에 곧장 갈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가까이 올 수도 없겠군.’
이 근처에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정지! 여기서부턴…….”
누군가 진을 치고 길을 막고 있었다.
이곳에서 주로 활동하는 길드 소속의 헌터인 걸로 보였다. 민간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달리 다가오는 사람도 없건만,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건지, 피로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쪽 담당자인가?’
그가 도율과 클레어를 막아 세우자, 클레어가 앞으로 나섰다.
목걸이의 효과를 잠시 해제하고 대화를 나누자, 이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헌터라는 것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먼 길 오셨을 텐데, 휴식은…….”
“괜찮습니다. 곧장 해결하겠습니다.”
클레어가 딱 잘라 말하자, 입구를 지키던 헌터는 내심 기뻐했다.
지원이 와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전달 받은 것과 다른 내용이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 한 명이라도 와 준 건 고마운데, 두 명이나 도착해 있었으니.
“뒤에 분은……?”
그리 묻는 말에 클레어가 돌아보자, 도율은 어느새 가면을 쓰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동료입니다.”
“혼자 오신다고……?”
“급히 합류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듯한 모습에, 클레어가 조용히 덧붙였다.
“원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아, 예.”
갑자기 뭐라는 거지?
담당자가 더욱 아리송한 얼굴로 클레어를 바라봤다. 클레어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몰래 키득 웃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 진입하는 것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클레어가 도율의 근처에 돌아왔다.
“자, 가요.”
묘하게 신난 듯한 목소리에 도율이 물었다.
“클레어 씨, 아까 나 욕했죠?”
“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렇게 말한 클레어가 늦장 부리면 두고 간다며 앞장서 걸음을 재촉했다.
“백 퍼센트구만…….”
도율이 확신을 가지고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