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또 옵시다
“인간계로 간다.”
망량이 그 결정을 내렸을 때, 감히 토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장승 역시 다른 요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 채 망량의 말을 경청했다.
요괴라는 족속의 운명은 모두 망량 덕분에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부지한 목숨, 망량을 위해 태우는 것이 아깝지는 않았다.
‘하나…….’
자신은 그런 결말을 맞이할 각오가 있었지만, 다른 모든 이들까지 그러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었다.
백귀야행 당일.
장승은 무기를 쥔 채 거대한 몸을 이끌고 인간계에 도착했다. 하지만 인간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를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장승은 지키는 자였다.
그러던 와중,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 동료 요괴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망량에게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장승이 결계를 펼쳤다.
* * *
“보여 줄 것이 있다.”
장승은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무언가를 안 보이게 숨기거나 다른 차원에 보관했다가 꺼내는 재주는 없었다. 그 손길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아무런 변화도 없음에 클레어가 의문을 가질 무렵, 나무 뒤에서 빼꼼하고 작은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저……?”
하나가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작은 몬스터들……?’
모두 클레어의 무릎 정도에나 올까 싶은 크기였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그 기운을 파악하고 있던 도율은 짐작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어린 요괴들이군.”
“…그렇다.”
도율의 말에 장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요괴들이 후다닥 달려와 장승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뒤엔 몸을 숨긴 채 고개만 슬그머니 내민 아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이 아이들을 숨기기 위해 여길 만든 건가.”
망량은 모든 요괴들의 요기를 한곳에 빨아들였다. 그로 인해 인간계로 온 요괴들은 모두 순차적으로 모든 힘을 다해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장승은 그 흡수를 피하기 위해 격리된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아이들을 숨겨 놓은 것이었다.
“이 아이들은 아직 약하다. 인간계의 환경에는 잘 적응하지 못해. 자연의 기운이 풍만한 곳이 아니면…….”
이곳에 억지로 봄을 몰고와 꽃을 피워 낸 것도 아이들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못할 거다.”
장승이 확언했다.
공간을 격리한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억지로 봄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모두 장승의 원래 힘이 아니었다.
덕분에 장승의 건장한 몸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빼빼 말랐다. 말라 비틀어진 고목 같은 모습은, 그의 남은 힘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다못해 바깥 세상에도 봄이 찾아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네가 찾아온 건, 솔직하게 말해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장승이 도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한 짓을 생각하면 염치 없는 소리인 건 안다. 하지만 간청하게 해 다오. 부디 이 아이들을 부탁할 수 없겠나.”
도율의 침묵 속에서 장승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클레어는 그 광경에 조용히 충격을 머금고 있었다.
늙어 비틀어진 몬스터가, 어린 몬스터들을 부탁한다며 인간에게 부탁을 하는 상황이라니.
그녀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몬스터들은 모두 성체였다. 인간에 대한 확신에 가까운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숙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몬스터에게도 어린 개체와 가족이 있다는 발상은 떠올리지 못했다. 있어봐야 짐승에 가까운 형태이리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건 아마도…….
‘그래야, 죽이기 편하니까.’
사사로운 정을 품어서는 칼날이 무뎌진다.
혼란스러워 하는 클레어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도율이었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잘못된 것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모두 자신들의 명운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도율이 다시 장승에게 대답했다.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런가.”
거절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장승이 씁쓸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적임자를 소개해 주지.”
“적임자?”
그냥 거절하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던 건가.
도율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 * *
“뭡니까, 여기는?”
도율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백우진이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은 분명 아직 한창 쌀쌀한 늦겨울이었는데, 이곳만 완연한 봄이었다. 단순히 남쪽 지방으로 내려왔다고 느껴질 만한 차이가 아니었다.
“백우진… 씨?”
“…클레어 씨.”
백우진과 클레어가 어색하게 인사를 마쳤다. 인사라고 할 만한 단어는 한 번도 오간 적이 없었지만.
백우진이 도율에게 조용히 불만을 전했다.
“함께 있는 거라면 미리 말씀을 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왜요? 사이 안 좋습니까?”
“그야…….”
전 길드와 엮인 악연이 있으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보기엔 어려웠다.
그리 말하려던 백우진이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도율도 그 악연에 엮인 인물 중 하나였다. 이쪽은 또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도 있다.
“아닙니다.”
도율과 오래 대화를 나누려니 클레어가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둘이… 가까워 보이네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도율이 갑자기 러시아로 가게 된 것도 백우진과 함께였다고 들었고. 대범람 때, 거대 몬스터 현무가 나타났을 때 쫓아온 것도 백우진이었다.
게다가 지금, 몬스터가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괴상망측한 상황에 적임자가 따로 있다며 불러낸 사람이 또 백우진이다.
클레어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인 건 분명했다.
“아뇨. 그냥… 일만 하는 사이입니다.”
백우진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왜 내가 내연녀 취급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거지…….’
고개를 젓자 클레어가 새로운 화제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되게 빨리 왔네요.”
취조인가.
“예, 뭐. 호랑이 덕분에…….”
이곳에 오기 전, 도율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전해 들은 사실이었다.
상당히 먼 곳이니까 차 끌고 오지 말고, 자기 집에 가서 흰돌이 타고 오라고.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지 반신반의했지만, 도율의 집에 도착해 전음을 날리자 정말 흰돌이가 대답했다. 심지어 혼자서 현관문을 열고 나오기까지 했다.
인적 드문 공터로 가서 커다란 백호로 변할 땐 놀라지도 않았다.
백우진이 나눠 준 요기 덕분인지 흰돌이는 평범한 탈것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이곳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랑이?”
“…모르십니까?”
자기네 집에 키우고 있으면서.
클레어가 작아진 상태의 백호를 주무르고 노는 건, 백우진 역시 도율에 대해 관찰하다 얻은 정보를 통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도율이 클레어의 뒤에서 백우진을 향해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클레어에겐 비밀인 모양이다.
“…호랑이 호 타고 왔습니다.”
“호랑이 호……?”
“KTX 말입니다. 클레어 씨는 외국인이라 아무래도 잘 모르시겠지만.”
“잠깐… 내가 여기 몇 년을 살았는데.”
“자.”
도율이 클레어와 백우진을 떨어뜨려 놓았다.
이 둘이 사이 좋게 지내길 바라느니 차라리 도은이와 자신이 살갑게 지내는 게 더 빠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도율이 백우진을 장승에 앞에 데려가자, 장승은 한눈에 백우진을 알아봤다.
“이자가…….”
망량이 가지고 있던 왕의 그릇을 계승한 남자라는 것을.
장승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탁을 하기 위함이자, 새로이 왕위에 오른 자에 대한 예의였다.
“이 아이들을 부탁하오.”
어린 요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란 무릇 키우는 법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백우진에겐 왕의 그릇이 있었다. 가능한 요기를 거둬들이면,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수준까지 제한할 수 있었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야겠군.”
백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백우진이 아이들을 데리고 흰돌이의 등에 올라탔다.
도율과 클레어는 차를 가지고 왔기에 흰돌이의 등에 올라탈 수는 없었다. 백우진과 애들만 해도 이미 정원 초과였다.
「허리가 휜다, 휘어…….」
흰돌이가 전음으로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클레어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짐승들 생긴 게 거기서 거기죠.”
「거기서 거기라뇨! 대협! 제 엘레강스한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도율이 흰돌이의 뒷다리를 두들겼다.
“출발.”
「아오! 갑니다, 가!」
그렇게 떠나는 흰돌이와 백우진 그리고 요괴 아이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난 후.
장승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한 장승은 더는 움직임이 없었다. 미동 하나 없는 거목이 되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편히 쉬어라.”
장승이 힘을 다함에 따라, 이곳에 붙잡아 두고 있던 봄의 기운 역시 서서히 풀려 사라지고 있었다.
차고 쌀쌀한 바람이 밀려듬과 동시에 꽃잎들이 힘을 잃고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클레어의 어깨에 도율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얹어 줬다. 이 날씨에 있기엔 쌀쌀한 차림이었다.
서늘한 한기가 뺨의 달아오름을 식혀 주고 있었다.
“올해 벚꽃은 다 졌군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네. 올해는 힘들고, 아마 내년에야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곳 주민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이 장관을 볼 수 있는 게 자신들뿐이라니. 호사로운 일로만 여겨졌다.
“아깝네요.”
“뭐, 어쩌겠어요?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장승이 봄의 기운을 끌어다 쓰고 있었으니, 늦든 빠르든 이렇게 될 일이었다.
“우리라도 즐겨 줍시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꽃잎이 뒤섞인 하얀 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나뭇가지엔 여전히 화사한 꽃잎들이 남아 있었다.
거친 바람 앞에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풍경도, 언젠가는 끝을 다하는 시기가 온다.
“쓸쓸하네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보고 있으면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음에 또 오죠.”
“다음에……?”
올해는 이곳에서 더 이상 벚꽃이 피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던 도율이 다음이라는 말을 꺼내자, 클레어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런 클레어에게 도율이 대답했다.
“내년에요.”
“아…….”
그제서야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또 옵시다.”
약속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