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
22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이 세계로 처음 돌아왔던 날 만났던 영감은 내게 경고했다.
“자네,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왜죠?”
“혼란이 일어날 거야. 그것도 전 세계적인…….”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감은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싫다고, 마음대로 할 거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싸움이나 관심 같은 건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다. 여생은 가족과 함께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죽을 땐 침대 위에서.
나는 영감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했다.
“그래. 그럼 난 이제 자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거야. 자네는 기억을 잃은 거고. 나도 다음에 자네를 볼 땐,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하겠네.”
또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만.
하고 영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야박하잖아요, 영감. 하고 나도 웃었다.
* * *
“여기는…….”
클레어가 도착한 곳은 갈대가 허리 높이까지 자란 들판이었다. 어두운 하늘에 뜬 가는 초승달은 그 작은 빛마저도 구름 너머로 감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쌍의 붉은 안광. 그것들이 수를 놓듯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변종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몬스터들이 이곳에 가득 모여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손님에 대한 호기심과 적개심으로 거리를 둔 채 지켜보고 있지만, 신중한 태도는 오래 가지 않을 터였다.
‘…다른 두 명은?’
함께 들어온 두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변종 게이트여서 그런지 각자 다른 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주하린이라면 떨어져 있어도 걱정할 필요 없었지만, 도율과 멀어진 건 가슴이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도은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해야 하는 일 두 가지. 도은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과 도은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탓으로 병을 얻은 도은에게 가능한 유일한 속죄였다.
‘괜찮아.’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클레어는 침착하게 왼손 약지에 낀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서약의 반지.
이 반지가 가진 스킬 중 하나인 ‘붉은 실’은, 다른 한 쌍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위치와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마력을 머금은 반지가 붉게 빛나는 선을 그렸다.
붉은 선이 이어진 곳은 들판과 저 멀리 이어진 언덕, 그 위에 위치한 한 고성古城이었다. 천수각 형태의 높은 성. 감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빛을 흡수하듯 새까만 모습으로 그 윤곽만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크르르…….”
그곳으로 가는 길은 몬스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수풀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몸을 웅크리고 도사린 검은 짐승의 물결. 바다와 같이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게이트는 좋아.”
클레어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가 착용한 또 다른 반지, 차원 수납의 반지가 마력을 먹어 치웠다. 푸른 마력이 장막처럼 펼쳐져, ‘인벤토리’ 스킬에 의해 미리 보관해 둔 장비들이 나타났다.
빛과 함께 드러난 새하얀 갑주가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의 위로 순백의 갑판이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며 뻗어 나갔다.
마력을 통해 주인을 보호하는 마호예장魔護禮裝.
단순히 신체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이동과 전투에 이점을 가져다주는 보조 장비였다.
─쿵.
그런 그녀가 내디딘 다음 걸음은,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양손을 머리 위로 뻗은 그녀의 손아귀에 실체를 가진 손잡이가 생겨났다. 그녀가 손잡이를 붙잡으면, 그 위로 뻗어 나간 칼날이 빛의 베일을 벗었다. 검이 드러나고 올곧은 자태를 뽐냈다.
검의 이름은 성검 듀란달.
이명은 꺾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굴.
칼날을 타고 마력이 흘렀다. 검신을 두르고 넘쳐난 마력이 빛으로 승화하여 주변을 밝혔다. 어둠으로 가득한 이곳에 작은 태양이 이곳에 떠올라 그림자 세계 주민들의 눈을 태웠다.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검에 맺힌 마력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직선으로 한없이 뻗어 나갔다. 강렬한 빛의 질주에 검은 바다는 부스러기가 되었다.
빛이 닿는 모든 곳이 그녀의 검극劍極이었다.
* * *
내가 소환된 곳은 어느 성의 최상층이었다. 벽이 없이 기둥으로만 천장을 떠받치는 누각 형태의 층. 바깥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바람이 잘아 마음 편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상석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금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눈에는 붉은 화장을 한 여자였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란 건 머리 위에 달린 두 개의 짐승형 귀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작은 반상에 입구가 넓은 술잔까지.
그것이 나를 보고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한잔하겠느냐?”
내 발치에는 녀석의 것과 같은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술잔과 호리병.
나는 발로 걷어차 상을 치 워버렸다.
“왜 날 여기로 불렀지?”
녀석은 내가 차 버린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풍류를 모르는 녀석 같으니.”
쾅!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잡고 바닥에 꽂아 버렸다. 인간도 아닌 것과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다.
“대답해. 왜 날 여기로 불렀지?”
“…나 참, 성격이 이래 급해서야.”
바닥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을 얼굴로 받아 내고도 그것은 상처 하나 없었다. 육체에 물리적 충격을 주는 걸론 큰 의미가 없었다. 이건 그저 내 태도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녀석도 쓸데없이 분위기 타려고 해 봤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고 본론을 꺼냈다.
“반가워서 불렀지.”
“반가워?”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맹세컨대, 나는 이 요물을 모른다.
그러나 녀석은 바닥에 반쯤 파묻힌 얼굴을 돌려 여유롭게 웃는 얼굴을 내비치고는 물었다.
“정녕 몰라서 묻는 게냐? 너와 나, 우린 같은 종류의 힘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냐.”
“…….”
같은 종류의 힘.
그게 무얼 말하는 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 세상에 넘어간 난 무공을 배우며 내공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내 기술과 지식은 물론, 체질까지 내공에 맞게 변화했다.
그건 내가 각성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쪽 세상에서 모종의 이유로 각성해 각성자가 되면, 모두 기본적으로 마력을 사용한다. 근접 전투를 하는 탱커나 검사, 창잡이를 비롯해서 원거리 전투를 하는 사수나 마법사까지도.
내가 무공을 배우기 전에 각성자였다면 내공과 마력을 모두 다룰 수 있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이 두 가지 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사례들이 있었다. 던전 공략의 전리품 중, 내공이 느껴지는 물건을 다른 이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일. 클레어 씨의 몸을 마사지했을 때, 그녀의 마력이 한 차례 폭주했었던 일.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야.’
내공을 배운 내가 마력까지 감지할 수 있는 것. 그건 내가 이쪽 세상에서 나고 자라며 마력에 노출된 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거다. 실제로 저쪽에선 내공을 잘 느끼지 못해 한동안 고생했었으니까.
게다가 클레어 씨의 몸을 마사지할 때 내공의 양을 조절한 건 딱 좋은 자극이 됐다. 근육의 성장 과정이 파괴와 회복의 반복이듯, 적절한 양을 지키면 그녀를 해하는 일 없이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지만, 정면으로 부딪치면 공멸한다.
이것이 내 추측이었다.
“네가 그 힘을 가지고 인간 무리에 낄 수 있을까? 아마 무리였겠지.”
녀석은 비웃듯이 내 사정을 짐작했다.
“넌 이쪽 인간이다. 자, 나와 함께 가자. 네게 알려 주지. 이 어설픈 세상의 진실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갈래가 다른 이 힘. 남들처럼 평범하게 마력을 갖지 못해서 후회스러운 적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있다. 그건 지금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괴로움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네 말이 맞아.”
내 말에 녀석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손목을 짓밟았다. 녀석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내가 고했다.
“난 인간이다.”
“이… 이……!”
녀석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놈은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 가죽을 마구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멍청한 놈이…! 그깟 동족애 때문에 네가 있을 곳을 걷어차겠다 이거냐!”
우드득, 우드득.
찌이익.
놈의 몸이 커지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감싸던 가죽은 허물이 되어 흘러내린 지 오래였다. 역시 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은 위장에 불과했고, 그 속에 감춰 둔 진짜 모습이 나타났다.
금색 털의 커다란 여우. 동심원을 그리는 노란 동공과 눈가에 자란 붉은 털. 그리고 겹쳐 있던 꼬리가 하나씩 갈라져 나와, 마침내 아홉 개가 되었다.
꼬리가 아홉 개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각 전승에 따라 다른 특징이 있다. 백면금모의 구미호는 조금 멀리서 온 손님이었다.
“어이, 섬 출신.”
구미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네가 날 설득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이유는 두 가지다.”
내가 손가락을 두 개 펴고 설명하자, 녀석은 얌전히 말을 기다렸다.
“첫째,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정해.”
아무리 주변에 마력을 사용하는 각성자들뿐이고, 내가 내공을 사용하는 사실을 숨겨야만 하더라도. 혹은 이게 들통나 귀찮은 일이 생기더라도.
사람은 사람 틈바구니 사이에서 사는 게 제일인 법이다.
“그리고 둘째. 이게 더 중요한데.”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미 이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놈의 검은 요기妖氣가 밀려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련한 내공은 가열한 금속의 색과 같았다. 백색과 붉은색의 사이. 가장자리로 갈수록 붉어지는 색을 띠었다.
“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놈, 구미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웃기지 마라! 인간 주제에 어떻게 이런……!”
구미호가 불꽃을 소환했다. 녀석의 꼬리에서부터 나타난 보라색 불꽃 덩어리. 도합 아홉 개의 불꽃은 하나하나가 내 몸뚱이보다 커다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올라라!”
저주가 담긴 외침은 놈이 만든 주술의 위력을 한층 강화했다.
아홉 개의 불꽃이 내 몸을 향해 격돌했다. 불꽃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일으켜 주변의 바닥과 천장을 모두 날려 버릴 정도였다.
불꽃은 내 몸뚱이를 집어삼키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타올랐다.
“하, 모처럼 제안해 줬건만…….”
구미호가 중얼거렸다.
녀석이 상황이 정리됐다고 믿을 때쯤, 내가 불꽃 속에서 물었다.
“화력전을 하자 이거냐?”
“뭣……!”
내가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내 옷가지엔 그을음 하나 없었다.
“응해 주지.”
커다란 짐승을 태우려면 그만큼 커다란 불꽃이 필요하겠지.
딱.
손가락을 튕겼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상 속의 격철이 뇌관을 때렸다. 내공이라는 이름의 화약을 먹어 치우며 터져 나가는 검은 불꽃.
“삼매진화.”
검은 불기둥이 구미호를 집어삼켰다.
“키아아아아악!”
지축을 울리는 듯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놈은 몸을 구르며 괴로워했지만, 몸에 달라붙은 검은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제집으로 보이는 성을 스스로 모두 부수고 있었다.
“무, 물을……!”
구미호는 여우비를 불러냈다.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
그러나 삼매진화의 불꽃은 물로써 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행의 상생 관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불꽃이 되기 때문이다.
무너져 내린 성의 잔해와 몸에 불이 붙은 채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구미호.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구경꾼들이 있었다. 이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몬스터들이었다. 위로 휘어 있는 붉은 안광을 뿌리며 놈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음산한 울림이 되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킥, 키킥, 킥킥…….
“웃지… 마라!”
구미호는 피가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버… 러지 같은 놈들……. 감히……!”
구미호가 주위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한 번에 수십 마리 되는 몬스터들이 쓸려 나갔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밀물처럼 빈자리를 다시 채웠다.
“감히이……!”
─키긱, 킥……
남은 기력을 그렇게 탕진한 구미호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삼매진화의 불꽃 역시 사그라들었다.
구미호가 목숨을 다하자 몬스터들은 더욱 광분해 달려들었다. 아까보다 더 혐오스러운 웃음소리를 뿌리며 구미호의 시체 위로 올라타거나 주변에서 박수를 치고 춤을 췄다.
거슬리는 광경이었다.
“전부 꺼져.”
몬스터들을 모두 쫓아내고 구미호의 시체를 지키자 오래 지나지 않아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수정구 크기의 결정체 하나였다.
때마침 클레어 씨가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도율 씨!”
오고 있는 줄은 알았다. 저 멀리에 있을 때부터 빛을 뿌리고 있었으니까.
“무사… 한가 보네요.”
“보시다시피.”
클레어 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그녀가 내 손에 들린 물체를 보고 물었다.
“근데 그건 뭔가요?”
“이거요? 이건…….”
잠깐 망설인 후, 나는 클레어 씨의 눈을 맞추고 대답했다.
“내단입니다.”
내단內丹.
구미호의 사체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