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꼬우면 덤벼라
“모임이 있을 거다.”
주대현이 그렇게 말했다.
무엇에 관한 모임인가. 그에 대해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주대현이 바삐 움직이고 있던 건 모두 이것을 위해서였다. 엮어야 할 구슬의 개수가 많아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고 말았지만.
도율은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애초에 주대현 정도 되는 자가 이끄는 게 아니었다면,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니까.
“드디어인가.”
“그래.”
마계 침공.
그 작전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모임은 뭐지? 얘기는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아무리 그래도 실제로 얼굴을 익힐 기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얼굴도 모르는 채로 뭘 할 생각이냐?”
“그렇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얼굴을 익히고 세부 조율을 맞추기 위한 자리였다.
이야기만 오가던 작전이 실체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궤도에 올랐다면 달릴 일만 남았다.
하지만 회의에는 참석할 필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도율에게 주대현이 예상 외의 말을 던졌다.
“너도 오는 거다.”
“나?”
도율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주대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넌 이 작전의 핵심이다. 사람들 앞에 서게 될 생각을 하고 있도록.”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머리를 굴리거나 사람들을 다루는 일에 도움을 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주대현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에는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었다.
“믿음을 주라 이거군.”
도율의 말에 주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간추려진 말이지만, 중요한 요소를 정확하게 파악해 낸 표현이었다.
“인간은 약하다.”
마력을 다루는 법을 깨우친 각성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기르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빌린 힘에 불과했다.
대기에 마력이 짙게 깔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일생을 뺏고 빼앗기는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주대현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러니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믿음 아래에서 하나로 단결되어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위하는 헌신.
그런 것에라도 기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답지 않은 도박이었다. 미신에라도 기대는 듯한 심정에 주대현이 근심 어린 고뇌에 잠겼다.
그러자 도율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주대현이 시선을 건네자 도율이 말했다.
“나는 약하지 않으니까.”
“…….”
대책 없는 듯 보이는 소리였지만.
‘바로 이게 필요한 거겠지.’
왠지 모르게 안심할 수 있었다.
* * *
“넓구만.”
도율이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마계 침공 작전의 첫 대담(對談)이 펼쳐질 장소였다. 장소 섭외는 주대현이 맡은 만큼 대현 그룹의 건물 중 하나로 결정되었다.
‘촌구석에 으리으리한 한옥 짓고 살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돈이 많긴 많군.’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건물의 위엄에 감탄부터 할 정도로 크고 넓은 곳이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전 세계의 각성자 집단 중 가장 힘 있는 곳들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하니, 이 정도 구색은 갖춰줄 필요가 있었다.
주변엔 이미 수많은 호위와 화려한 차량을 대동한 이가 가득했다.
그중 아는 사람을 발견한 도율이 말을 걸었다.
“영감.”
각성자 지원 센터의 센터장 영감, 최강현이었다.
최강현은 가면을 쓴 도율을 알아차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름 자글한 입가를 말아올렸다.
“역시, 자네가 왔군.”
“영감도 오는 건가?”
도율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각성자 지원 센터.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는 헌터 협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위명이 그에 뒤지지 않았다.
그 수장인 데다가 경험 많은 각성자인 최강현도 이 자리에 초대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최강현이 손을 저었다.
“난 안 가.”
“그런가?”
“그래. 이 노인네를 대체 어디까지 부려먹을 생각인 겐가?”
나도 좀 쉬자.
최강현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권유가 온 듯했지만, 아무래도 늙은 몸으로 먼 여정에 참가하는 건 무리여서 거절한 듯했다.
“여기 온 건 인력 지원 때문이지.”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신경 써야 할 게 있어, 센터에서도 지원을 나온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다른 사람들을 관리하느라 바쁜지, 최강현이 먼저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나도 들어가 볼까.’
도율이 회의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누군가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도율이 라이센스 카드를 내밀자 오래 걸리지 않아 확인이 끝났다.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회의장은 건물의 크기와 어울리도록 넓었다.
‘백 명은 너끈히 들어가겠네.’
거대한 강연장과 같은 크기의 공간에, 충분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의자. 그리고 누군가 올라서 발표를 할 수 있는 강단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정해진 자리가 있는 듯, 도율은 앉을 자리까지 안내받았다.
‘아는 얼굴들이…….’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면면들이 즐비해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 떨어지기 전부터 유명했던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온 후 언론을 통해 익히게 된 유명인들 또한 마찬가지.
각성자란 건 사업가가 아니라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이자들을 모두 한곳에 모으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군.’
오래 걸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외국인들도 많은데.’
전 세계 집단의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라 하니, 비율 상으로 당연히 외국인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 모두가 이 한국 땅에 한날한시에 집결했으니, 인력이 필요한 것도 당연한 일.
‘번역 아티팩트랬나…….’
도율이 직원에게 받은 장신구를 살폈다.
귀에 걸면 번역 기능이 동작하는 아티팩트라며 대여받았다. 이를 통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내가 쓰면 고장 나는 거 아냐?’
도율이 가진 내공이 행여 아티팩트를 망가뜨릴까 걱정이 들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 발소리를 내며 강단 위를 가로질렀다. 백발이 성성한, 그러나 굽은 곳이 없는 자세의 노인이었다.
“모두 모였나.”
주대현이었다.
마이크 하나 없이 크지 않은 목소리가 뚜렷하게 넓은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모여 줘서 고맙군.”
가벼운 인사 직후에 주대현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알다시피, 곧 있을 대규모 침공 작전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의견이 있는 자는 자유롭게 얘기하도록.”
주대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 말인데.”
모두가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돌아보았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바로 앞 좌석에 다리를 꼬아 걸쳐 올려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앞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꼭 지금 해야 할 필요 있는 거야? 이쪽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의 수습으로 바빠 죽겠는데 말야.”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의 얼굴은, 도율에게도 익숙했다.
‘러시아의 그…….’
일전, 백우진과 함께 러시아의 수도로 향했을 때. 선대 보스가 죽어 혼란에 빠져 있던 마피아 집단의 딸.
보스의 동생과 보스의 딸로 후계자 세력이 양분되어 있었지만, 도율이 들쑤시고 다니며 한쪽을 사실상 괴멸하고 말았다.
그 이후 조직을 점거한 건 온전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딸, 카르멘의 파벌이었다.
‘저 여자를 불러도 되는 건가?’
각성자를 중심으로 모인 힘 있는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범죄 조직이었다.
주대현은 힘 있는 자들을 긁어모으기 위해서라면 명암을 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한데 러시아라면…….’
망량이 사신수 중 하나인 청룡을 보낸 나라였다.
번개가 되어 이동하는 재빠름과 여의주를 통해 내리치는 뇌격. 하늘 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능력으로 상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테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카르멘이 입가를 비틀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모았다.
“혹시 모르지? 그쪽이 사태 수습에 쬐끔 도움을 주면, 이쪽도 더 빨리 여유가 생길지도.”
돈을 대달라는 뜻이었다.
주대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웃기지 마라, 시궁쥐 여자. 바닥에 떨어진 더러운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구걸까지 하는 거냐?”
“뭐……?”
“눈감아 주는 것도 뒷골목을 전전할 때의 이야기다. 거슬리게 굴면, 쥐약을 먹이는 수밖에 없지.”
그 말에 카르멘이 격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떤 새끼야!”
그러나 기세 좋게 일어난 것과는 다르게,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카르멘이 떨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세케르……!”
그 이름에 장내의 소란이 순식간에 조용한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세케르라 불린 남자는 갈색 피부와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세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눈빛만으로 카르멘을 쏘아봤다.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카르멘을 직시하고 있었다.
“네 더러운 혓바닥 위에 올라도 될 이름이 아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상대에게 폭언을 쏟아붓고는, 이름을 불리우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 대해 감히 토를 달지 않았다. 심지어 그 당사자인 카르멘조차 별다른 대꾸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조용히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세케르가 다시 한번 비웃음을 머금었다.
“쿡. 시궁쥐라 그런지 꽁무니 빼는 것 하나는 재주가 좋구나. 좋아. 내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지.”
분위기를 휘어잡은 세케르가 이 자리를 만든 주대현을 향해 물었다.
“그보다. 이 내가 귀한 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날아온 것은 네놈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뭘 말하는 거지.”
“파사현정(破邪顯正).”
세케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사의 힘을 가진 놈이 있다고 말했겠다. 거짓말이라면 장난으로 끝나진 않을 거다.”
“거짓말이 아니다.”
“내 눈앞에 보여 봐라. 당연히 불러놨겠지?”
세케르의 요구에 주대현이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성급한 놈이라 생각했지만, 오래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와라.”
주대현이 도율에게 눈짓하자, 가면을 쓰고 있던 도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걸어나갔다.
“저 자가…….”
“흐음.”
기감 따윌 펼치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인가?”
“그렇다.”
주대현의 대답에 세케르가 황금빛 눈동자로 도율을 꿰뚫어 봤다. 제법 먼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것인데도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생생했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은 투명한 유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만족할 만큼 쳐다본 건지, 한참을 지켜보고 나서야 세케르가 입을 열었다.
“그놈 하나만 믿고 전 재산을 건 베팅을 하자, 이 말인가?”
“알고 있지 않나?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란 것을.”
“그렇다 쳐도.”
세케르가 손가락으로 도율을 가리켰다.
“그 남자는 왜 한마디도 벙긋 안 하지? 네 꼭두각시냐? 자기 의견은 입에 담을 줄 모르는 머저린가?”
“…….”
주대현이 도율을 곁눈질하니, 그 말대로 도율은 멀뚱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율이 주대현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 보였다.
“그건…….”
“번역기가 작동을 안 해서.”
복잡한 마력식이 담긴 장치인 건지, 도율의 귀에는 그 아티팩트가 노이즈 같은 소리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세케르란 남자가 하는 말은 영어도 아니었고,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근데, 왠지 익숙하네.’
무슨 상황인지는 모두 알 수가 있었다.
저자들은 모두 번역기를 끼고 있었다. 각자 다른 말로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도율이 무슨 말을 하건, 저들에게는 전해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충 이해했다.”
저들이 품고 있는 불만이 무엇인지. 도율이 가지고 있는 힘의 종류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다. 주대현의 보증이 있으니까.
불안한 부분은 다른 점이었다. 그걸 잠재울 방법은 확실했다.
“꼬우면 덤벼라.”
오랜 무림 생활로 다져진 해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