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별로 의미가 없거든
“흐음.”
세케르가 다시 한번 뺨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아까도 닦아 냈지만 다시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부가 베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깟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낫는다.’
마력을 활성화해 신체를 강화시킨 상태에서는, 튼튼해진 덕에 상처를 입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활발한 신진대사로 인해 작은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아물곤 했다.
하지만 뺨에 난 상처는 각성자가 아닌 평범한 인간처럼 쓰라렸다.
각성자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으로 지낸 세월이 거의 없는 세케르에게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탁.
세케르가 날개를 접고 지상 위에 내려왔다. 그 맞은편엔 도율이 서 있었다.
“무승부로 하지.”
고작 생채기 하나 난 게 두려워서 꺼내는 말은 아니었다. 세케르나 도율이나 얼마든지 더 싸울 수는 있었지만.
무전기에서 다급한 한국어가 들렸다. 아래에서 교통 정리를 도맡아 하던 센터장 최강현의 목소리였다.
[댁들 분명히 회의만 한다고 하지 않았나?!]“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긴! 아래는 지금 난리가 나서……! 어, 어! 이보쇼! 거긴 지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니까!]주대현이 펼쳐 놓은 결계가 깨지는 바람에 사방에 충격이 번지고 말았다.
어딘가 부서지거나 누군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폭발과 소음에 시선이 한껏 집중된 상태.
세케르는 이런 상황에서 싸우는 걸 즐기지 않았다.
‘재주 부리는 원숭이도 아닌 노릇이니.’
벌컥!
옥상의 철문이 열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회의에 참가한 이들과 함께 온 동료들이었다.
전 인류의 거대 세력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인 만큼, 갈등이 빚어지면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상황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다.
그곳에 들이닥친 인원들은 각자 자신이 모시던 분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세케르 님!”
그들 중 한 명, 검은 머리를 한 여성이 창백한 안색으로 세케르에게 달려왔다.
“나르디.”
“지금 바로 상처 치료를…!”
나르디라 불린 여자의 손가락 끝에 초록색 빛이 응어리졌다. 그녀가 손끝을 세케르의 뺨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치익!
그러나 불에 그을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력이 흩어질 뿐, 예상했던 치료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나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힐러 중 한 명인 그녀가 치료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 여겨졌다. 심지어 이깟 작은 생채기 따윈 복잡한 술식을 쓸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을 텐데.
‘누가 이런 짓을…….’
나르디의 시선이 세케르가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따라갔다.
세케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도율이었다. 도율은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나르디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당신……!”
“그만. 내 보모 노릇이라도 할 셈이냐?”
“하지만…….”
“네 주인이 뒤치다꺼리가 필요한 철부지 아이라 여기는 셈이군.”
세케르의 말에 나르디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주제넘었습니다.”
“머리 좀 식히고 있도록.”
나르디를 잠깐 내려다본 후 세케르가 다시금 도율을 돌아봤다.
“자.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하는데…….”
세케르가 도율의 자격을 인정해, 다음 단계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 했지만. 도율의 표정은 여전히 뻣뻣했다.
“그 전에 말부터 통하게 하는 게 먼저겠군.”
그게 문제였다.
* * *
“이런 곳까지…….”
도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건물 내에 마련된 의무실이었다.
당장 옮겨서 치료해야 한다는 나르디의 강력한 주장에, 도율과 세케르가 의무실에 격리되었다.
반면 세케르는 뺨의 상처를 치료하는 건 관심이 없었다. 대신 웬 나르디가 구해 온 웬 알약을 하나 집어삼켰다.
“아, 아. 이걸로 됐나?”
세케르의 말에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리는군.”
세케르의 목소리는 이전부터 들리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방금이 처음이었다.
세케르는 지금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원래 할 수 있었다며 진작 했겠지만, 따로 배운 적은 없었다.
분명히 아이템의 효과였다.
“어떻게 한 거지?”
“너 같은 체질은 바벨 피쉬를 사용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약을 먹은 거지.”
“진작 먹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효과는 일시적인 데다가, 값도 비싸다. 특히 한국 같이 작은 나라의 언어는 수요가 많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구만.”
애초에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언어 번역 아티팩트, 바벨 피쉬가 있으니. 효과도 한시적인 알약 따위가 더 개발될 경쟁력은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한 차례 대화를 나눈 후 세케르가 평가했다.
“아무래도 성능엔 문제가 없는 듯하군.”
이야기가 제대로 오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였지만 오해 없이 똑바로 전달되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만약 번역 알약이 말을 잘못 전달해 작전이 틀어지게 된다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테니까.
“작전은 이대로 궤도에 오를 거다.”
“이미 오른 거 아니었나?”
“설마.”
세케르가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그 능구렁이 영감 말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면 왜 온 거지?”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렇게 말한 세케르가 가르킨 건 바로 도율이었다.
“네놈의 존재를.”
주대현도 말했었다. 도율의 존재 자체가 작전의 핵심이라는.
‘내공 때문인가.’
사도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마력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각성자로 거듭나 마력을 다루는 것 외에는 강해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힘을 모은다 하더라도 사도를 쓰러뜨릴 방법은 없었다.
끝이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인 인류에게 도율의 존재는 이레귤러 그 자체였다.
다만 주대현은 도율을 몇 번이나 봐서 알고 있지만, 세케르와 같은 다른 이들은 말만 듣고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직접 확인해 보니.
“내가 두른 코로나를 뚫고 상처를 입힌 데다가, 나르디의 치료도 효과가 없었지. 그거라면 분명히 사도에게도 먹힌다.”
주대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네가 가진 힘은 명백한 조커다.”
세케르가 보증했다.
“이 내가 직접 그 위력을 선보이기까지 했으니, 이제 더는 이견이 없겠지. 모두 그 영감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인류가 이룬 모든 세력이 집결하는 거지.”
“그건 잘됐군.”
“하지만 한 가지 더.”
“뭐지?”
중요한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력을 갖춘 이들을 설득했다고 끝은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쓸 만한 놈들이 있으니까. 가능한 전력을 보강해 두는 편이 좋을 테지.”
길드나 협회에 속하지 않는 개개인 중에서도 쓸 만한 놈이 있다면 합류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대부분 어딘가에 속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네놈도 짚이는 구석이 있겠지?”
세케르의 물음에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도율만 해도 어느 길드에도 속하지 않았고, 센터장 아래에 속해 있다곤 하지만 정식으로 가입 절차를 거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카르멘 휘하의 고르곤 조직과 같은 뒷세계의 단체도 좀 더 있을 거고.
“이 나라에서 회의를 주최한다기에 마침 잘됐다 싶더군.”
“왜지?”
“내가 찾는 사람이 여기 있거든.”
“찾는 사람…….”
도율이 다시 한번 세테르의 외견을 살폈다.
구릿빛 피부와 황금색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은 곱슬기가 있었다. 복장은 현대적이었지만, 커다란 장신구를 자연스럽게 차고 있었다.
나르디라는 이름의 여자도 세케르와 비슷했다. 중동 근처에서 온 것이 드러나는 생김새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세케르가 찾는다는 인물. 도율도 짚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전력 보강에 도움이 될 거다. 나는 그 여자를 찾으러 가 보지.”
세케르가 떠날 채비를 하자 도율 역시 따라붙었다.
“나도 가지.”
세케르는 그런 도율을 의아하게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철컥.
의무실을 나서려는데, 한껏 진이 빠진 얼굴의 주대현과 마주쳤다.
“어디 가나?”
“아는 사람 보러.”
세케르가 간단히 대답하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붙잡는다 해도 멈춰 서지 않으리란 걸 주대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대현은 쫓아갈 수 없었다. 이곳에 남은 다른 귀빈들을 대접해야 하니.
“또 어딜…….”
“내가 따라갈 테니, 걱정 말라고.”
도율이 그렇게 말하며 주대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세케르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기는 도율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주대현이 중얼거렸다.
“걱정이 두 배로 된다만.”
결코 안심이 되는 조합이 아니었다.
* * *
“듣기로는.”
세케르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이 가게에 자주 드나든다더군.”
“…….”
도율이 세케르가 가리킨 가게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외관이 눈에 띄었다.
‘서지유네 가게군.’
저번에 보았을 때와 인테리어가 달라져 있었다.
자금에 여유가 있어서 확 밀어 버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래 보이진 않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백귀야행의 탓으로 보였다.
대로변에 위치한 가게이니 피해가 있었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선글라스는 뭐지?”
“변장.”
도율의 물음대로 세케르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방문한 외국인.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건 묻어 두고. 도율이 물었다.
“샤… 지금 만나러 오는 사람이랑 아는 사이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까 만나러 온 거지.”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아니긴 하군.”
세케르가 인정하고는 덧붙였다.
“내 여동생이다.”
“뭐?”
설마하니 가족 관계였을 줄이야.
“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헤어진 가족을 보자고 시간을 낼 정도로 감상적인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단순히 여동생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력에 보강이 확실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던 세케르가 말을 멈췄다.
세케르가 보고 있는 전면 유리창에 거리의 풍경이 옅게 비치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여자가 닭꼬치를 한 손에 들고 걷고 있었다.
“저건…….”
세케르와 같은 구릿빛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아직 날씨가 덜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는 듯한 얇은 옷차림.
샤디아가 한가하게 거리를 거닐다가 닭꼬치를 한입 왕 하고 베어물었다.
“샤디아.”
세케르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자, 샤디아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외국인. 하지만 정작 본인도 외국인인 만큼 그 점을 신기하게 보는 건 아니었다.
키잉!
샤디아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가 누군지 단숨에 알아봤다.
그리고 곧바로 튀었다.
“…….”
도율에게는 생소한 반응이었다. 샤디아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달아나는 광경이라니.
“뭐…….”
세케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다시피, 변장은 별로 의미가 없거든.”
세케르가 샤디아를 추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