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노상 까 봤냐?
“하린아, 이 언니가 다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줘…….”
밀실. 두 사람만이 있는 공간에서 주예린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슬프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주하린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글자를 들여다보느라 눈이 뻑뻑해서, 눈을 제대로 굴리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시선을 돌리는 것 대신 눈앞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 서류를 손으로 치워 내고, 주하린이 주예린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언니.”
“응……?”
“질질 짜지 말고 일이나 해.”
“…….”
주하린의 단호한 대답에 주예린이 기어코 실성했다.
“끼 아 아 악-!!”
“아, 시끄러!”
“싫어! 더는 싫어! 내가 너 같은 강철 체력인 줄 아니? 이 나이 먹고 이렇게 밤새우면 피부 다 뒤집어진단 말야!”
“이쁘기만 하구만, 뭘.”
“그, 그러니? …아니! 그게 아니라!”
탕!
주예린이 책상을 내리쳤다. 거센 파업 시위였다.
“나 안 해! 아니, 못 해! 배 째!”
그러자 주하린이 서류를 내려다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마력으로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주예린과 같은 일반인이 정신 줄을 놓고 실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로 보였다.
주예린이 소리쳤다.
“이게 다 할아버님 때문이야!”
그래.
이게 다 할아버님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언론 통제라니, 미친 거 아니야? 이거 걸리면 우리 어떡하니?”
“…NDA라고 해.”
표현이 어떠한들,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범람 이후 한창 혼란스러운 지금.
인류가 더 이상 안전한 요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자들은 직접적인 공격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총공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인류의 전력을 죄다 끌어다가 적을 치는 데 쓸 겁니다, 하는 정보를 흘렸다간 어떤 억지와 추측이 난무할지 모르는 상황.
따라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작전을 비밀리에 주고받는 동시에 외부에 정보가 새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
그것이 주하린과 주예린이 맡은 업무였다.
“원래 이런 건 카리스마 있게 딱! 비밀리에 진행해라. 한마디 해 두면 다들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아니었어?”
“드라마 좀 그만 봐.”
주하린이 핀잔을 줬지만,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실제로 할아버님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외부엔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고.
그 일이 실현되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는 아랫것들이 있을 뿐.
“왜 우리가…….”
다른 길드도 아니고 대현에서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이유. 그것은 주대현이 직접 명한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길드와 달리, 복합적인 계열사를 두루 섭렵한 다국적 기업체이기 때문이다.
헌터 업계뿐만 아니라 정계, 재계, 언론 등에도 다양하고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이것도 다 실전 공부라 생각해.”
“딱히. 난 경영엔 관심이 없어서~”
그보다는 큐티클에 관심이 많은지, 주예린이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말대로 주예린은 대현 그룹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욕심이 없어 보인달까.
“애초에 말이야. 내 본업에는 방해만 된단 말이야. 거대 그룹의 따님이라는 배경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돈과 빽을 처발라서 할 수 있었던 거라는 얘기나 듣는다구.”
주예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주하린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 그랬구나…….”
헌터의 세계에서 살아온 주하린은 대현 그룹이라는 배경이 든든한 우군으로만 작용했다.
물론 그 배경을 보고 몰려든 나방들 또한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열기에 불살라지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수와 대중을 상대로 살아가는 주예린에겐 그것이 꼭 유리한 무기로 사용되리란 법은 없었던 것이다.
“얘가. 뭘 진지하게 받고 있어. 그냥 가끔 오는 디엠이야. 깡통 계정으로 보내는 거라 신경도 안 써.”
“…디엠이 뭐야?”
“너 그런 것도 모르니?”
진짜 한참 멀었구나.
주예린이 안쓰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특훈할까? 일단은 인스타 아이디부터…….”
“많이 쉬었지? 다시 일하자.”
“앗, 아아…….”
주하린이 주예린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다시 태도를 다잡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예, 들어오세요.”
이곳은 대현 그룹의 전략 회의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 방문하리라는 연락은 따로 받지 못한 상태. 어쩌면 침입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지만.
‘설마. 그룹 본사 건물에.’
그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낯익지만 의외인 인물이었다.
검은 정장 차림 위로 얼굴을 반만 가린 새하얀 여우 가면. 그 위로 붉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앗! 당신!”
주예린이 먼저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흠? 흐음?”
주예린은 주하린과 도율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아차! 급한 약속이 있단 걸 깜빡했네!”
그리고 뻔한 거짓말을 하며 전략 회의실에서 달아났다.
“자, 잠깐! 언니!”
이미 짐을 챙겨 멀리 달아나 버린 주예린을 향해 황망하게 손을 뻗으며, 주하린이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남은 건 나 혼자 하라고?”
앞날이 막막했다.
* * *
“흠. 으흠.”
주하린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하튼, 오랜만이네.”
“아, 예.”
도율과 주하린이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 말대로 보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 대현 그룹에 관해서 일이 있으면, 주하린이 아니라 주대현을 바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주하린도 주하린 나름대로 길드를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따로 연락을 할 틈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해? 말어? 해? 말어? 해? 말어?’
침대 위 이불 속에 파묻혀 핸드폰을 꽉 쥐고 화면을 노려보다가.
-‘…말어.’
그렇게 접은 게 대부분이었다.
피차 바쁘다는 마음속 핑계.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지만, 사실 없는 시간 쥐어짜 내서라도 만나는 게 연애라던데.
몇 번이나 기회를 만들려 해도 결국 주저하고 말았다. 그러니 이렇게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기회를 걷어차선 안 됐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아, 주대……. 그러니까, 할아버님을 좀 뵈러.”
“흐음. 그렇구만.”
주대현이 대현 그룹의 전략회의실에 이따금 출몰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선 중 하나라는 것만 해도 귀했다.
마침 오늘도 총공세의 일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진작 떠났는데.”
“그 인간…….”
도율이 혀를 찼다.
“하여튼 신출귀몰한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하. 그러게.”
“아, 죄송합니다. 손녀분 앞에서…….”
“아냐, 됐어. 신경 안 써.”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주하린이 도율에게 다가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보다 뭐야, 그 딱딱한 반응은? 나의 존재조차 잊은 거냐고. 우리 친하잖아. 안 그래?”
“그…랬던가요?”
…몰라.
하지만 주하린은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연애 백서를 좀 봤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밀어붙이는 건 역효과. 일단은 친한 친구 사이처럼 친근한 분위기로 다가갔다가, 묘한 기류를 만들어서 한 번에 확 선을 넘는 작전.
“아무렴.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내가 밥도 사기로 했잖아. 응? 언제 먹을까? 오늘 어때? 본 김에.”
“그건 곤란해요.”
“아……. 하긴.”
도율의 거절에 주하린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총공세 때문에 한창 바쁠 테니까. 그것도 작전의 중심인물이니, 여간 난리가 아니겠지.”
“그렇죠…….”
도율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주하린이 남몰래 키득 웃었다. 넋두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남들 앞에선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듯이. 아니, 오히려 날붙이가 피부를 뚫지도 못할 것처럼 구는 남자가 자기 앞에선 풀어진 태도를 보인다는 게.
친한 거 맞네.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졌다.
“그럼 나중에…….”
그렇게 말하던 주하린에게 문득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너, 이거 뭐야……?”
“뭐가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주하린이 떼어 낸 건 분홍색 꽃잎이었다.
“아. 벚꽃잎이네요.”
“벚꽃……?”
“저번에 일을 좀 하다가 그만.”
묻었다가 미처 털어 내지 못한 놈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도율이 멋쩍게 웃었다. 지저분한 인간 취급을 당하진 않을지.
주하린의 표정이 멍하니 풀어져 있었다.
‘올해는 아직 벚꽃이…….’
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다. 피지도 않은 꽃잎이 왜 묻어 있다는 말인가. 작년의 것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얼마 전에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조금, 대범람의 뒷처리를 하다가요.
그 상대도 분명히 시기가 맞지 않는 꽃잎을 옷깃에 달고 있었다.
먼 곳까지 내려가서 수상한 사건을 하나 처리하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같은 일이 두 번이나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의 일부로서.
‘그렇다는 건…….’
주하린이 꽃잎에서 시선을 떼고 여우 가면을 올려다보았다.
‘둘이 같이 있었다고……?’
그 시선에 도율이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 아니.”
“그럼 물어보실 거라도?”
“…….”
주하린을 입을 벌린 채 시간을 보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아니야.”
왠지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클레어가 인사를 나누며 로열 로드 본부를 나섰다.
요 며칠의 일정은 변함이 없었다. 훈련과 교육. 총공세를 대비해 전력을 가다듬고 기밀로 알려져 있던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
꼭두새벽부터 시작한 일과가 해가 완전히 저문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집에 돌아가면 쓰러지듯 잠들고 다시 눈 뜨자마자 이곳에 출근 도장을 찍으러 와야 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휴식은 단지 다음 하루를 멀쩡히 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는 길이 이토록 즐거운 것은.
‘…집에서는 볼 수 있으니까.’
워낙 바빠서 바깥에서 따로 볼 시간을 만들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런 즐거운 귀갓길에, 누군가 클레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욥.”
어두운 밤. 가로등 불빛만으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실루엣만으로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주하린 씨?”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일까.
아카데미 동기. 그렇다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평소에 시간을 내서 찾아올 정도로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걸까.
“이제 끝난 거? 바쁘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요.”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모를 리가 있나요.”
“…그렇네.”
주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린이 곧 대현 길드이자 대현 그룹을 움직이고 있는 만큼, 소식이야 어디서든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걸로 지레짐작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알고서 온 것 아니었다.
부스럭.
주하린은 커다란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고는 있지만 안에 든 게 가볍지는 않은지 비닐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뭔가요, 그건?”
“아, 이거…….”
주하린이 봉투를 조금 들어 올렸다. 안에서는 이상하게 무언가가 청명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주하린이 클레어에게 물었다.
“야, 너 노상 까 봤냐?”
“…네?”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클레어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