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애들 교육
“캬~ 좋다아~!”
주하린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소리치자, 클레어가 낯뜨겁게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클레어와 주하린은 한강변에 강물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범람 때 이후로, 가급적 외출을 삼가며 조심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클레어가 물었다.
“갑자기 이게 다 뭔가요?”
“어때, 있을 건 다 있지? 요즘 편의점에선 별걸 다 팔더라고.”
주하린이 들고 온 비닐 봉투 속에 들어 있던 건 대부분이 술이었지만, 그 외에 필요한 물품도 착실히 들어 있었다.
깔고 앉을 돗자리나, 안주로 먹을 과자. 종이컵과 나무 젓가락.
심지어 웬 작달막한 조명까지 사서 가져왔다. 시야를 밝히는 데에는 퍽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는, 그냥 반짝이는 장난감.
그래도 있으니까 귀엽긴 했다.
“너, 이거 뭔지 알아?”
주하린이 클레어의 눈앞에 대고 과자 봉지를 흔들었다.
“새우깡이잖아요.”
“아네?”
주하린이 봉지를 뜯었다.
“이슬만 먹고 살게 생겼으면서, 이런 쪽으론 발랑 까졌구만.”
“발랑 까졌다뇨……!”
클레어가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제가 이 나라에 몇 년을 살았는데 그 정도도 모르겠어요?”
“그런가?”
“그렇다구요!”
주하린이 종이컵을 입에 물었다. 안에는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기울어진 컵 너머로 맥주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글쎄다, 내가 아는 넌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그런 걸 모를 애였는데 말이지.”
“그건…….”
주하린이 말하는 건 아카데미 ‘극광’을 다니던 시절의 클레어였다.
지금의 클레어를 빚어 낸 건 긴 세월을 함께 지낸 도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을 한 명 더 뽑는다고 한다면…….
“좋아?”
주하린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웃고 있었다. 마치 클레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이.
“뭐, 뭐가요?”
“도도한 척하기는. 너 표정 관리 되게 못하거든?”
주하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한편으론 쓸쓸하기도 했다. 클레어가 옛날 보여 주던 차가운 얼굴들은 일부러 만들어 낸 가면이 아니라, 주위로부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드러나는 속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썰 좀 들어 보자. 부뚜막 위에 올라간 고양이 씨.”
“썰은 무슨 썰이에요.”
“네 남편.”
주하린의 말에 클레어는 딱히 할 말 없다는 듯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가면 쓰고 다니지.”
쿨럭!
클레어가 입에 머금었던 술이 잔디의 비료가 되었다.
“가, 가면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이래도 숨길 셈?”
“…….”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법 수상한 반응이긴 했다.
주하린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왜. 쓰고 다니잖냐. 하얀 여우 모양에, 위에 붉은 무늬가 새겨진 거.”
그건 단연코 도율이 쓰고 다니는 가면이 확실했다.
거기까지 아는 이상 더 이상의 변명은 불필요했다. 애초에 주하린도 그 가면을 쓰고 다니는 각성자가 누군지도 알고 있다.
한 번 들킨 이상 사실을 부인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언제…….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벚꽃. 너랑 똑같은 거 묻어 있더라.”
“아…….”
클레어와 도율은 얼마 전 사건을 해결하며 함께 꽃잎의 바람을 맞은 적이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한아름의 꽃잎을 뒤집어 쓰듯이 맞아 버렸으니, 털어 낸다고 털어 냈어도 남은 게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클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주하린은 그런 클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말야, 역시 매니저 때문이었지.”
“그건…….”
역시나. 주하린은 사정을 모두 눈치채고 있을 줄 알았다.
도은이 병에 걸렸을 때, 시설 좋은 병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써 준 것도 주하린이었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흐음.”
주하린이 턱을 괴고 물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네?”
설마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클레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확 소문내 버린다?”
“노, 농담으로 하는 소리죠?”
“글쎄.”
주하린이 술잔을 홀짝였다.
“요즘 언론 쪽 일을 자주 하다 보니, 머리가 꽉 차 버려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할랑가 안 할랑가 모르겠네.”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투가 진짜인지 허세인지 아리송했다.
안절부절하는 클레어를 돌아보며 주하린이 씩 웃었다.
“잊으려면 술을 좀 더 마셔야겠는데. 술안주로는 이런 얘기가 제격 아니겠어?”
“그런…….”
클레어가 고개를 푹 꺾었다. 패배를 시인하는 행동이었다.
“자, 말해 봐. 돈 많고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이 들이대도 눈길 한 번 안 주던 아가씨. 그 남자는 뭐가 다른 거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옛날에 목숨을 빚진 적이 있어서요.”
“…그래?”
그 말에 주하린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이어지는 클레어의 말은 그녀의 예상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설명하면 설득력은 갖출 수 있겠지만, 사실 조금 다르달까…….”
“…다르다니?”
클레어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애매한 일이었다. 무지개를 잘라서 색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졌다. 크레파스로 칠한 그것과 달리, 정말로 하늘에 걸려 있는 건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어서 딱 잘라 이름표를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 자신만은 분명히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
“받은 만큼 갚겠다. 그런 생각은 갖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붙어 다닌 것도 맞긴 하지만…….”
목숨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평생 갚으며 살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졌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식사를 하고, 자기 전, 일어난 직후 처음 얼굴을 보게 되고. 딱히 연인다운 일에 열중해서 마음이 불타올랐던 것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취미에 몰두했던 것도 아니고.
조용히 각자 할 일을 하며 한 공간 안에 있는 것만을 느끼기만 해도.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나날이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커졌다.
“아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이 모여서……. 지금의 이 마음을 만들어 낸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뜨거웠다. 겨울의 찬바람이 클레어의 달아오른 뺨을 두드렸다.
찬바람으로 잠시 뺨을 식히고 주하린을 바라보니, 주하린의 표정은 속이 메스꺼운 것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우엑.”
“저, 저기…….”
“못 들어 주겠구만, 염장질은.”
주하린이 손바닥을 펼친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고는 빈 맥주 캔을 손아귀로 쥐고 우그러뜨렸다. 못 먹는 부분만 남은 사과 신세가 된 맥주 캔을 들고 주하린이 맨발로 잔디를 밟았다.
휘익-!
몇 번의 도움닫기 이후 주하린이 팔을 크게 휘둘러 찌그러진 맥주캔을 던졌다. 강을 가로지를 것 같은 기세로 날아가던 캔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었다.
맥주캔이 포물선을 그리며 강물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강에 쓰레기를 버리다니.
하지만 주하린이 손짓하자 맥주 캔은 허공에서 불길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 이걸로 완전 연소.”
주하린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클레어가 체념하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 슬슬 파하고 들어가자. 서방님이 걱정하겠다.”
주하린이 그렇게 말하며 짐을 정리했다.
쓰레기는 모두 정리해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다. 친절하게도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까지 함께였다.
클레어를 보내고 난 주하린은, 마력으로 취기를 날려 버릴 수 있음에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
“아가씨.”
주하린에게 붙은 수행 비서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차를 부르겠습니다, 타고 가시죠.”
그러나 주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걸어갈래.”
느릿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거닐었다.
완전히 태워 버린 가슴속에 잿더미가 남았다.
* * *
“여깁니다, 보스.”
카르멘이 안드레이의 안내에 따라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아오, 씨. 뭐 이딴 곳에 사는 새끼가 다 있어? 진짜 또라이 아니야?”
카르멘이 불만을 쏟아 내며 가슴팍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분명히 산속이라 공기도 맑고 시원한데, 고된 등산으로 인해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앞장서 걷던 안드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인원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순서대로 입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중 차원 치환 좌표를 받아 둬야만…….”
“그래, 그래. 한마디로 깔때기가 필요하다, 이거잖아.”
다소 함축적인 비유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드레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카르멘도 이미 들은 터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러시아 건 왜 우리가 담당이냐고. 염병. 짬 낮은 게 죄지? 그리고. 이 새끼는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야? 싸가지 없이.”
“차원 관련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는 특히 귀한 몸이니…….”
“아! 좀 닥쳐 봐. 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냐?”
성질을 부리면 괜히 숨만 더 차오를 뿐이었다. 안드레이는 보스의 명령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이 딸린 별장 같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여깁니다.”
그곳에선 한 남자가 털 달린 짐승을 돌보고 있었다.
“워우. 무슨 개새끼가 집채만…….”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단순한 개가 아니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꼬리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단순히 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그러자 한 남자가 짐승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쓴 남자.
백우진이었다.
“당신들입니까? 러시아 담당은.”
“너어……!”
카르멘이 백우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히 봤던 얼굴이었다. 조금 인상이 달라져 있었지만.
“너… 아니, 당신! 이런 데서 뭐 해!?”
“물건이나 받아 가십시오.”
반가워하는 듯한 카르멘과 달리, 백우진은 무미건조하게 아이템을 내밀 뿐이었다.
푸른 보석. 백우진이 지니고 있는 요력을 새긴 물건이었다.
망량 대신 차지한 왕의 그릇이 지니고 있던 서로 각기 다른 힘을 하나로 묶는 힘을 응용해,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기준점이었다.
“뭐야. 오랜만에 본 건데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그다지 오래 지난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보다, 보기에 안 좋습니다.”
“뭐? 내 어디가?”
카르멘이 팔을 벌리며 물었다. 그러자 백우진이 지적했다.
“우선 옷차림이 너무 얇습니다.”
“…여기 오르는 거 졸라게 힘들었거든?”
불평하면서도 카르멘이 얌전히 옷 단추를 다시 잠갔다.
“이제 됐지?”
“장신구도 너무 화려합니다.”
“이건……. 씨. 안드레이! 와서 이것 좀 받아 봐.”
카르멘이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반지를 모두 풀어 안드레이의 손 위로 떨어뜨렸다.
“이제 됐냐?!”
“문신도…….”
“이건 어떻게 못 해!”
피부를 갈아 버릴 수도 없고.
버럭 소리를 지른 카르멘이 되레 웃으며 백우진에게 다가갔다.
“거, 취향 한번 까탈스럽네. 편식하는 남자는 인기 없어. 내가 입맛 한 번 갈아엎어 줘?”
그러자 백우진이 여전히 침착하게 받아쳤다.
“취향이 아니라, 애들 교육에 안 좋습니다.”
“애들 교육……?”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르멘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커다란 짐승 사이로 한 꼬마 여자애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안녕하세요…….”
초등학생이 되었을까 싶은 작달막한 여자아이였다.
백우진이 백수아의 눈을 가리듯 앞을 막아섰다.
“이제 알겠습니까?”
“…….”
그러나 카르멘의 초점은 다른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너, 유부였냐?!”
그 점이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