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지지 말라고
아이가 있다니.
그것도 벌써 이만한 나이의 아이가.
‘젊을 때 얼마나 놀아 댄 거야, 얌전하게 생겨선……!’
카르멘이 백우진을 노려봤다.
그럭저럭 반반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학창 시절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다 해도 믿을 수 있었지만, 설마 이런 대형 사고를 저지른 놈일 줄이야.
정신머리 하나는 똑바로 박혀 있을 것처럼 생긴 놈이.
“모르는 겁니까? 이 애를.”
“알 리가 있냐!”
카르멘이 버럭 소리쳤다. 남의 나라에 있는 남의 애를 어떻게 아냐고.
“흠…….”
백우진이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구석에서 숨죽이고 딴청을 피우는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는 뻔뻔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검지로 입술을 막고 있었다.
‘보스는 모른다 이건가.’
당시의 카르멘은 진짜 고르곤의 보스도 아니었다.
전대 보스를 잃고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된 조직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것도 약소한 세력의.
그런 그녀를 따르던 안드레이는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협상을 위해 미하일 세력의 뒤치다꺼리를 한 적도 있었다.
백수아를 회수한 건 그런 일 중 하나였다. 세력의 돈줄을 지키기 위한 더러운 심부름 중 하나.
안드레이가 조용히 백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말해라.”
“……?”
무슨 뜻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백우진에게 안드레이가 덧붙였다.
“손가락이든 귀든, 필요한 만큼 잘라 주지.”
“…….”
백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폭력 조직에서 흔히 하는 청산이었다.
백수아가 납치당했던 일이나, 거기서 받던 취급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방식으로 돌려받을 순 없었다.
“필요 없습니다.”
백우진의 대답에 안드레이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다행이구만. 아직은 할 일이 남아서 말이지.”
안드레이의 시선은 카르멘에게 향해 있었다.
조직 내의 최대의 경쟁자가 하루아침 사이에 궤멸당한 덕에 무사히 조직을 꿰차긴 했지만, 카르멘은 아직 애송이였다. 내부에 적이 없다면 외부의 적에 신경을 써야 할 차례.
아직은 조직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사히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것이 돌아가신 선대와의 약속이니까.
“꼬마야, 너 몇 살이니?”
“……?”
카르멘의 질문에 백수아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
뒤늦게 카르멘이 이마를 짚었다.
백우진 저 인간이 워낙 자연스럽게 대답해 줘서 몰랐지만, 여긴 이국의 땅이었다. 아직 어린 꼬맹이가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을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결국은 별다른 성과도 없이 백수아가 백우진의 바지 뒤에 쪼르르 달려가 숨고 말았다.
백수아가 백우진의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왜 그러지?”
백우진이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저 언니, 이름이 뭐에요?”
“카르멘.”
“카르멘 로미노프.”
자기 이름이 불리자 카르멘이 눈치껏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백수아가 흠칫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그 반응에 백우진이 카르멘을 쏘아보았다.
“애가 겁먹었잖습니까.”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카르멘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저 언니, 멋진 것 같아서요…….”
“뭐?”
그 말에 돌아본 백우진에게 눈을 반짝이는 백수아의 모습이 비쳤다.
백수아가 올려다 보는 카르멘은 쿨해 보였다.
데님과 부츠. 어깨로부터 손목까지 타고 내려오는 문신의 형태가 어린 아이의 눈에는 야성적이게만 보였다.
손짓이나 말투, 목소리도.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뭐래?”
카르멘이 그렇게 묻자 백우진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백수아가 카르멘 같이 자라는 건 바라지 않았다.
* * *
“드디어 오늘인가.”
도율이 그렇게 말하자, 눈을 감고 있던 주대현이 정정했다.
“드디어가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래, 알아.”
총공세.
그 작전을 실행할 순간이 다가왔다.
“좌표는?”
주대현이 백우진에게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
전세계 각지에 퍼진 차원석의 통제를 맡는 것이 백우진의 역할이었다.
백우진이 없었다면 그 수많은 인원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을 테니,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인 일로 힘을 빼야 했을 거다.
그런 점에서 백우진은 벌써부터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럼 가겠다.”
주대현이 그리 선언했다.
주대현은 품이 넓은 모시 옷을 입고 있었다. 곰방대까지 물고 있으니 영락 없는 옛날 사람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그런 가벼운 차림을 하는 건 일견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대현에 한해선 그것이 곧 완전 무장이었다.
주대현의 주위로 두꺼운 마력의 진이 떠올랐다.
“흠.”
주대현이 본격적으로 마력을 행사하는 건 도율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지금 이 장소엔 주대현과 백우진, 그리고 도율 세 사람만이 있었다. 다른 이들을 모두 한 장소에 몰아 놓고 그들만 따로 있는 이유가 있었다.
주대현의 경우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었고, 백우진은 그 출입구를 연결해야 했다.
그리고 도율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문이 파괴될 가능성이 있으니 가장 마지막에 지나가야만 했다.
‘지금까진 그런 적 없었지만…….’
이 문은 주대현이 마력을 쏟아부어 인위적으로 만드는 문. 그러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지막으로 지나가기로 했다.
파지직!
허공을 갈라 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대현의 앞에 푸른 빛이 퍼져 나갔다. 빛의 띠가 테두리를 이루고, 그 너머는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공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결해라!”
주대현의 외침과 함께 백우진으로부터 요기가 피어 올랐다.
작전에 참가한 이들이 차례대로 이어진 길을 통해 문의 너머로 넘어갔다. 그 너머에는 마수와 마족의 세상, 마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모든 인원이 마계에 넘어가고, 그다음이 백우진과 주대현의 차례였다.
차원문에 발을 걸친 주대현이 마지막까지 돌아보며 경고했다.
“알겠나? 특히나 주의하도록.”
“알았다고.”
주대현은 여전히 못 미덥다는 듯이 못마땅한 얼굴로 도율을 노려보다가, 결국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하고 도율이 속으로 숫자를 셌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넘어오라 했지.’
혹시나 모를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다른 이들이 아직 문을 지나는 도중이라면 더 큰 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위험한 거면, 나는?
-넌 알아서 해라.
-…….
무책임한 말이 따로 없었다.
‘하여튼, 괴팍한 노인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도율이 몸을 일으켰다. 주대현이 만든 차원문은 아직까지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위험한 거 맞나?’
도율이 차원문 너머로 몸을 실었다.
푸른 빛의 띠를 지나가자 풍경이 급변했다. 새까만 공간이 사방으로 가득해졌다. 뒤쪽으로 나있는 자그마한 구멍으로 방금까지 도율이 있었던 공간의 풍경이 비쳤다.
그것도 잠시였다.
쩌적!
“…아.”
무언가 갈라지는 불길한 소리.
유일하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이 갈라져, 좌우로 조각나 있었다. 깨진 조각 위에 맺힌 상처럼.
“하긴, 그 노인네가 허튼소리 하는 작자는 아니지……!”
느긋하게 걸을 시간은 없었다.
도율이 균열을 피해 앞으로 빠르게 나아갈수록, 어두운 복도 역시 더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긴 길의 끝에 마주한 빛으로 몸을 던지자, 등 뒤로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문에서 빠져나온 도율이 지면에 착지하자 포탄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등장 한번 화려하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좀만 더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어디 덧나나?”
주대현이 고개를 돌리며 얼버무렸다.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계산한 거다.”
“…퍽이나.”
이로써 마지막 인원까지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걸로 모두 도착했군.”
총공세에 참가한 수많은 각성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드넓은 평원.
모두 긁어모았다고는 해도 끝을 모를 정도로 많은 건 아니었다. 이곳에 참가하기 위한 자격을 갖춘 각성자는 그만큼 드물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두가 일당백의 전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암.”
느긋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적지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고,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상태에서. 인간들 중 그 누구도 풀어진 태도는 보이지 않았는데도.
“드디어 다 온 거야?”
소년의 앳된 음성이었다.
수풀 위에서 졸린 눈을 반쯤 뜨고 몸을 일으키는 은발의 소년이 있었다.
백발에 푸른 눈. 파충류의 것과 같이 세로로 길게 가로지른 동공.
그자는 확실히 인간이 아니었다.
“라크자르.”
“기다리다가 깜빡 잠들었지 뭐야.”
라크자르가 뒷머리를 긁으며 하품을 마저 털어 내고는 씨익 웃으며 이들을 반겼다.
“그래, 일단 환영할게. 여기가 우리의 고향, 마계야.”
메마르고 갈라진 땅. 어두운 하늘은 태양이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것처럼 거무죽죽했다. 끈적한 무언가가 흘러내려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했다.
푸르름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삭막한 세상이었다.
“알고 있었나? 우리가 온다는 걸.”
“그야, 그 정도로 요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잖아. 모른 척하는 게 더 큰일이었지.”
나름대로 비밀리에 준비된 일이었지만, 마력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마족에게는 손에 잡힐 듯 뻔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매복하기엔 좋은 지형이 아니지.”
이곳은 탁 트인 장소였다. 숨어서 공격할 만한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그러자 라크자르가 되레 놀라며 물었다.
“매복이라니, 그런 재미없는 짓을 왜 해?”
그런 짓을 했다간 나약한 인간들은 모두 한 순간에 쓸려 나가 버리고 만다.
모처럼 재밌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런 즐거움을 단 한순간에 끝내는 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라크자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곳에 다른 누군가 매복을 노리고 있었다면, 먼저 나서서 치웠을 만큼.
“안 그래?”
라크자르가 손을 휘둘렀다. 느긋하게, 악단을 지휘하는 것처럼.
그러자 드넓은 평원 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던 마수들이 피를 흩뿌리며 찢어졌다.
키에엑-!
라크자르가 그것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룡주?]“뭐가.”
[…하아. 뭐, 좋습니다. 어차피 변변찮은 환영 인사에 불과했으니까.]다행히 잔소리는 길지 않았다.
“역시 게임은 공정해야 재밌지. 안 그래?”
게임.
이들은 지금 전쟁을 하러 온 것이었다. 막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전력을 끌어 온 상태.
그런 전력조차 저들에게는 한낱 게임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주대현이 되뇌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있어도 저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사도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건 이레귤러인 도율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율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을 모두 긁어모아 함께 이곳으로 온 이유. 그건 간단했다.
‘이놈 하나를 위해,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뚫는다.’
사도를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든 마계를 적으로 하는 것과 같았다.
쓰러뜨려야 하는 건 사도 본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루는 마수들 또한 마찬가지. 인간들에겐 몬스터라는 이름으로 익히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방심을 해 준다면, 그조차 이용한다.’
주대현이 생각을 정리할 때쯤, 도율이 한걸음 나서며 물었다.
“그래서. 게임 상대는 너냐?”
라크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았지 뭐야. 내 차례가 오려면 아직 멀었단 말씀.”
라크자르가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오는군.”
첫 상대가 도착하면, 제비뽑기에 꽝을 뽑은 그는 이곳에 개입하지 말아야 했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여기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룰을 어겼다가 벌칙으로 순번이 더 밀리는 건 사양이었다.
떠나기 전, 라크자르가 도율을 향해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지지 말라고.”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