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그립기는 해도
“이쪽으로.”
비서가 그렇게 말한 후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앞서 걸었다.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분홍색 머리에 전신을 감싸는 검은 타이즈. 허리춤엔 작은 박쥐 날개가 돋아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수월주 비서관 소속이라 소개했다.
수월주, 엘리아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 위해 파견된 자였다.
“친절도 하시군.”
무장 세력을 이끌고 침략하러 온 건데 숨거나 입구를 막기는커녕 사람을 보내 초대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것을 전쟁이나 싸움이 아니라 단순한 게임이나 심심풀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
“칫.”
누군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취급이었다.
“얕보고 있구만.”
“애초에 믿을 수나 있는 거야? 함정일 가능성도…….”
주대현 역시 가만히 서서 진위 여부를 가늠하고 있었다.
앞서 보여 주었던 태도가 모두 연기이고 사실은 지금 벌어질 싸움에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아니면 그 은발의 소년과 다른 사도들은 생각이 달라서 각자 준비하고 맞이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면?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도율이었다.
도율은 그다지 불만스러운 기색도 없이 엘리아나의 비서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귀찮은 일이 줄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이……!”
“왜?”
주대현의 부름에 도율이 뒤돌아서 물었다.
“얌전히 따라갈 생각이냐?”
“그래.”
“함정이면?”
“함정이라도 손수 준비하신 분이 근처에 있겠지.”
이런 허허벌판에 있는다고 해서 사도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건 아닐 테다.
애초에 도율은 처음부터 사도들이 있는 곳을 찾아 헤집으러 온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거였다면 마계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 일리가 있네. 그럼 이렇게 할까.”
“뭐?”
“자신 있는 놈만 따라오라고.”
남의 목숨까지 챙겨 줄 여유는 없을지도 몰랐다. 원래 그런 쪽으론 소질이 없는 터라.
그렇게 말을 전한 도율이 가장 먼저 무리를 이탈하자, 그다음으로 움직인 건 백우진이었다.
“넌……!”
백건우의 아들, 백우진.
원래라면 마계같이 마력이 짙은 곳에서 숨조차 쉴 수 없겠지만, 얼마 전 요기를 몸에 담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도율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 백우진을 주대현이 불러 세웠다.
“기다려라.”
백우진이 어린 시절부터 창을 잡아 왔다는 사실은 주대현 역시 알고 있었다.
또한 플레이아데스의 부길드장으로 활동하며 헌터 업계나 몬스터, 마석에 대한 지식도 폭넓게 갖추고 있었다.
“넌 아직 힘을 쓰는 법에도 익숙하지 않잖나.”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기술에 불과했다. 직접적으로 몬스터와 같은 존재를 대면해 본 경험은 없었을 게 뻔했다.
하물며 상대는 그보다 상위의 존재, 사도였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다.
주대현의 부름에 백우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물론 전 싸우는 법 따윈 잘 모릅니다만…….”
안전한 곳에 숨어서 지켜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곳까지 따라와서 그런 걸 바랄 순 없었다.
백우진이 도율을 가리켰다.
“어쨌거나,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대답한 백우진이 다시 도율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는 무리들 중 누군가 말했다.
“나 참.”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고 있는 청진명이었다.
“잘난 척하고 있네. 자신 있는 놈만 따라오라고?”
청진명이 발을 굴렀다. 물가를 거니는 것처럼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한번 볼까?”
청진명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파도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누군가 그런 청진명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워낙 억센 손가락이라 쉽사리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컥!”
“부탁이니까 정속으로 가자. 응?”
송민아였다.
“아, 알았다고.”
청진명이 목을 주무르고는 말했다.
“가자.”
그러자 청진명의 팀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뭐 하나?”
우두커니 서 있는 주대현에게 물은 건 태양의 아들 세케르였다.
세케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핀잔을 줬다.
“보여 주러 온 것 아니었나? 인간의 힘을.”
“…그렇군.”
세케르가 턱짓했다.
“가자고.”
적진에는 이미 발을 들인 참이었다.
* * *
비서가 안내한 곳은 거대한 고성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별무리처럼 모여 있는 장소.
크고 널찍한 공간과 달리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아 더욱 황량해 보이는 분위기를 자랑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정원을 지나 육중한 문을 앞에 두고 비서가 말했다.
“여깁니다.”
비서가 문을 열었다.
경첩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의 너머로 어두운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도, 조명도 없는 곳에서 은은한 윤곽만이 흐릿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듯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얼굴을 비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율에게는 구면이었다.
“엘리아나.”
수월주(水月主) 엘리아나.
일전, 도율과 청진명의 팀을 상대했던 사도의 이름이었다.
“오랜만이로군요.”
“네가 첫 상대인가?”
“공교롭게도.”
엘리아나가 팔을 뻗었다.
“우리 사이엔 빚이 있지 않습니까.”
엘리아나의 한쪽 팔이 검고 매끈하게 변해 있었다.
일전, 도망치던 엘리아나를 도율이 붙잡으려던 흔적이었다.
‘의수…인가?’
단순히 겉을 둘러싼 것 같진 않았고. 팔 부분이 완전히 다른 생명체인 것처럼 이질적인 기운을 풍겼다.
“그날부터 손꼽아 기다려 왔지요.”
엘리아나가 드레스의 자락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당신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날을.”
“…….”
증오를 담아 도율을 내려다보던 엘리아나가 시선을 넓게 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함께 찾아온 손님분들 또한 대접하는 게 예의겠지요.”
“필요 없다.”
대답한 건 세케르였다.
번쩍하고 세케르의 등 뒤로 빛을 내뿜는 날개가 솟아났다. 공중으로 떠오른 그가 어두운 홀을 비췄다.
고풍스러운 장식을 한 타일과 곡선 계단이 보였다.
“파티하러 온 건 아니니까 말이야!”
세케르가 손을 뻗었다.
그 방향을 따라 빛이 응축되었다. 주변을 가득 채우던 태양 같던 빛이 한순간에 사라져 하나의 점으로 모였다.
직후 엘리아나를 향해 빛이 쇄도했다.
공기를 태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발사된 광선은 엘리아나에게 닿기 직전, 돌을 던진 수면과 같은 일그러짐과 함께 사라졌다.
“저런. 성급한 손님이로군요.”
그리고 엘리아나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세케르가 쏘아 낸 빛이 그를 향해 되돌아왔다.
“쯧.”
세케르가 손등으로 쳐 내자 빛이 다른 방향으로 꺾이며 저택의 벽을 때렸다.
콰앙!
빛이 충격과 열기를 내뿜으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괜찮나?”
“문제없어.”
세케르가 손등을 털었다. 손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모처럼 준비했으니, 모쪼록 즐겨 주시길.”
그렇게 말하는 엘리아나의 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엘리아나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녀와 다른 이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늘어진 거울 같은 풍경이었다.
똑같은 풍경이 빈자리를 채우며 복제되고 있었다.
“이건……!”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었다. 나란히 놓인 거울 속 세계처럼.
반복되는 풍경 사이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협적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각성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커다란 난관이라고 할 순 없었다.
문제는…….
“저것들, 설마 계속 튀어나오는겨…?!”
누군가의 외침대로, 천천히 벌어지는 틈 사이에서 같은 모습을 한 마수 무리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끝을 모르고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마수를 정리해 두지 않으면 새로운 마수가 충당된다. 아니, 제때 사냥하지 않으면 그 수가 계속해서 누적된다.
끝없이 길어지는 홀.
엘리아나가 계단의 위에서 그 풍경을 내려다보며 멀어지고 있었다.
“…가라!”
“뭐?”
하늘 위에서 세케르가 손짓했다.
“여긴 우리에게 맡겨 두고, 넌 저 여자를 맡아라!”
여기서 오래 시간을 끌었다간 저 여자가 어디까지 멀어질지 알 수 없었다. 아직 거리가 크게 벌어지지 않은 지금 쫓아가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쫓아갔다간 끊임없이 늘어나는 마수로 인해 사방을 포위당하게 된다.
최상의 수는, 저 여자를 맡을 소수의 인원만 보내는 것.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인원을 차출하면 마수를 상대할 인원이 비게 된다. 각성자라 해도 체력과 마력은 한정되어 있다. 무한히 공급되는 마수를 상대로 어디까지 버틸지는 미지수였다.
아직은 전력을 잃을 때가 아니었다.
“할 수 있겠지?”
세케르가 물었다. 도율에게는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율로서는 애초에 사도와의 일대일 대결을 상정했었기 때문에,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도율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질리기 전에 돌아오지.”
“…그래.”
그 말과 함께 도율이 재빠르게 튀어 나갔다. 엘리아나 역시 그 모습을 확인하고 유인하듯 뒷걸음질쳤다.
그 광경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도율이 싸울 시간을 최대한 오래 벌기 위해서,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자, 그럼 우리도.”
세케르의 날개로부터 다시금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싸움을 시작해 볼까.”
무한히 넓은 공간, 저 끝까지 닿을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온 건 당신 하나인가요.”
엘리아나는 절벽 끝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을 빠져나와 도착한 도율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도율의 주위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도율의 대답에 엘리아나가 가느다란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렇단 말이죠…….”
불길한 미소였다.
“왜 웃지?”
엘리아나는 정면에서 싸웠을 때 도율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곳 또한 도망칠 곳 없는 절벽. 여차하면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만.
‘도망치진 않겠지.’
사도란 놈들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도율도 눈치채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마당에 적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승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도망쳤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고…….”
엘리아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번에 도율을 맞닥뜨렸을 때, 엘리아나의 환영은 먹히지 않았다.
덕분에 임무도 완수하지 못하고 인간들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꿈에 그리던 사도가 되었는데, 역시 자격 미달이라는 소리나 들어야 했다.
그날 이후, 엘리아나는 이 남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방법만을 떠올리며 지내왔다.
“자, 그럼.”
방해하는 자가 없는 건 희소식이었다.
“지옥을 보여 드리도록 하죠.”
도율의 시야가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었다.
‘이건…….’
미처 대처할 틈이 없는 완연한 어둠.
다른 이들에게 환각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을 때, 한 사람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필중의 주술이었다.
‘귀찮은 짓을.’
하지만 도율은 엘리아나의 환각에 대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무려 다섯 명이나 같은 환각을 겪고 빠져나왔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를 미리 얻을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환각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긴…….”
일전에 들었던 얘기와 달리, 엘리아나의 환각 속 공간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보다 다양한 색채로 어우러져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라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담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풍경이었지만, 이곳은 도율의 기억 한편을 자극했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립기는 해도…….”
도율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무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