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내가 왜?
“역시.”
도율이 불이 붙은 지붕 아래에서 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피범벅이 된 바닥을 피해 계단처럼 올라가 있는 단상에 널브러지듯 걸터앉아 있었다.
흩날리는 불티와 잘박거리는 피 웅덩이. 온통 붉은 세상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유일하게 죽지 않은 남자였다.
“당신이었군, 첨성각주.”
늙수그레해졌지만 이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첨성각주가 도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하.”
그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젠 말도 높이지 않는군. 처음 봤을 땐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으면서.”
도율이 노비이던 시절, 총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간단한 문답을 주고받았을 때만 해도.
첨성각주는 도율을 가신으로 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율이 특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 그 생각은 단숨에 버려졌다. 일개 가신 하나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말 하긴가? 수십 년이나 봐 온 사인데.”
그는 도율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서류상으론 몇십 년도 더 전에 노비 생활을 못 견뎌 탈출한 놈이었으니, 오랜만에 나타나 예전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놀라야 했지만.
실제론 지하 감옥에서 매일같이 봐 오던 사이였으니까,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었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드넓은 세가의 고루거각은 장원을 포함해 어마어마하도록 넓었다.
노비나 경비들이 머무는 곳은 물론, 장원이나 각 전각들의 크기 역시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도율이 노비로 일하던 시절보다 더 넓어지기까지 했으니.
그중에서도 본가의 장로들이 머무는 거처는 주요 인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숨겨진 장소였다.
도율이라면 알 리가 없을 텐데.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여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감(氣疳)이로군.”
첨성각주는 한눈에 도율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도율의 몸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내공. 재능 있는 자들이 수십 년을 고스란히 바쳐야 얻을 수 있는 양질의 기가, 마치 수십 개라도 되는 것처럼 뒤섞여 있었다.
반경 수 킬로미터를 마치 손에 쥔 것처럼 샅샅이 파악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로 멀리 기를 뻗을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도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자들은…….”
첨성각주의 주위로 많은 이들이 피를 뿜으며 죽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자들도 간혹 보였지만, 대부분 늙은이들이었다.
“네 피를 마신 작자들이지.”
젊어지고 싶다는 욕심에 모인 가문의 장로들. 문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모두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피를 마시지 않은 첨성각주를 제외하고.
“그래도 운이 좋군.”
“무슨 말이지?”
“마지막 복수는 제 손으로 할 수 있을 테니까.”
“…….”
첨성각주가 몸을 일으켰다. 열기가 짙어 몸이 무거웠다.
“자. 좋을 대로 해라.”
그러나 도율은 손을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왜 내가 당신을 죽일 거라 생각하지?”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고 나서,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평범한… 아니, 대부분의 인간은 종잇장처럼 간단히 짓이길 수 있었다.
인간이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에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듯이, 도율 역시 그러한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저항감도… 없다.’
이 사람들이 모두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도. 앞으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건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죽고 살아나길 반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 따윈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일로만 여겨졌다.
“하. 군자인 척은 관둬라.”
첨성각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불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봤다. 드높은 위용을 자랑하던 가문의 본가였다.
주위에 널브러져 죽어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한때 모두 그와 함께 찬란하던 시절을 구가하던 동료이자 부하, 그리고 섬기던 주인이었다.
그런데 하찮은 집착으로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것에 입을 대고,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죽었다.
지금까지 가문의 번영에 기여한 것 역시 도율의 몸을 통한 실험이었지만, 결국 끝맺음을 하는 것도 그로 인한 사고였다.
‘독인지 약인지는 한끝 차이란 건가.’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더는 살아 있을 이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버려 둔다 해도 길게 갈 순 없었다. 다 늙은 몸뚱이로 열기 섞인 공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셨다. 폐가 익어 가고 있었다.
“미련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젊은 복수귀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것이 도리에 맞았다.
그러나 도율에겐 아직 물어봐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당신을 죽일지 말지는, 지금부터 하는 대답에 달렸다.”
“뭐지? 곧 죽을 마당에 대답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때, 나와 함께 도망친 노비는.”
장양에 대해 물었다.
“죽였나? 살렸나?”
첨성각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그게 궁금했나?”
“대답이나 해.”
“당연히 살려 줬지.”
“…그런가.”
첨성각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게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뭐라고?”
도율의 반응에 첨성각주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몰랐나? 너와 함께 도망쳤던 그 남자는 그대로 놓아줬다. 그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언제든지 찾아서 벌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우리가 널 우연히 잡아들인 거라고 생각했나?”
첨성각주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 속, 공기의 일렁임과 어우러져 더욱 일그러져 보였다.
“다 그 녀석에게 들은 덕분이지.”
첨성각주는 말하고 있었다. 도율이 가진 불사의 몸에 대한 정보는, 장양에게 들은 것이라고.
“헛소리.”
도율이 그렇게 일축했지만, 첨성각주는 생명을 태우듯 웃었다.
“큭큭. 그렇게 궁금하면… 그 남자를 한 번 찾아가 봐라. 정보값으로 두둑하게 챙겨 줬으니.”
* * *
“여긴…….”
도율이 고개를 들어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릴 듯이 드넓게 펼쳐진 처마에 사람보다 커다란 듯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각 방위를 지키고 있는 금색 용 조각들은 평범한 식당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이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대형 객잔이었다.
“손님? 예약하셨나요?”
문앞에서 안내를 하는 종업원도 있을 정도였다.
“아닙니다.”
“아하, 그러시다면 1층 중앙 좌석으로 안내를…….”
“괜찮습니다.”
도율이 사양하자 미소를 짓고 있던 종업원의 표정이 급속도로 구겨졌다.
“쳇. 뭐야, 흔히 있는 거지 놈이었나.”
다짜고짜 그런 말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도율은 지금 옷가지라 부를 수도 없는 천조각을 주워 입고 있는 상태였다.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알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닐 순 없었다.
저택을 빠져나오며 급하게 옷가지를 챙겼지만, 불타는 와중에 제대로 된 복식을 챙길 순 없었다. 결국 찢어지거나 불이 붙어 반쯤 태워 먹은 옷들로 급하게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도 꾀죄죄한 몰골의 사내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워낙 대형 객잔인 만큼 그냥 버려지는 음식들도 많다 보니, 쓰레기통을 노리러 온 자들이었다. 비가 올 때는 널찍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좋았고.
“꺼져! 이 거렁뱅이 새끼들아!”
종업원이 험악하게 발길질을 해도 그때뿐. 그가 씩씩거리며 등을 돌리자 다시 눈치껏 모여들었다.
도율이 향한 곳은 그 거지들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개중에 밀짚 같은 걸로 얼굴을 가리고 대낮부터 낮잠을 자는 남자가 있었다. 그 앞에 선 도율이 불렀다.
“장양.”
“뭐……?”
남자가 밀짚을 슬쩍 내려 눈을 부라렸다. 거무튀튀한 눈매였다.
“날 아는 놈인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뭐어?”
그 말에 장양은 잠이 깼다는 듯 윗몸을 일으켰다.
“너 이 자식,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장사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만두랬나, 국수랬나…….”
그러자 장양은 다시 몸에 힘을 풀었다.
“뭐야. 술 처먹을 때 같이 있던 놈인가.”
그는 파리를 쫓아내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거야 다 옛날얘기지, 옛날얘기. 술 처먹고 왕년에 잘나가던 시절이나 주절거리는 거. 그걸 진지하게 믿는 놈도 있나?”
“난 믿었다.”
“아, 그러셔. 속아서 참 안됐구만.”
“…….”
장양에겐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도율이 기억하고 있던 젊었던 시절의 장양은 온데간데없었다. 큰돈을 모으면 작은 가게를 차려 밑천을 불리고, 더 큰 가게를 가지겠다는 야욕을 가졌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있는 건 늙은 몸을 가게 벽에 누이고 숨어 음식물 쓰레기를 받아먹을 생각뿐인 거지 한 명에 불과했다.
‘…이러려고.’
장양을 탓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러려고 나를 배신했나?’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기루와 객잔에서 술과 여자에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이윽고 노름에까지 손을 대서 돈을 모두 날린 후에는 빚까지 져서 여기까지 굴러떨어졌다.
본인이 술을 먹고 지껄인 소리였으니, 사실이겠지.
차라리 그 더러운 돈을 들고 저 휘황찬란한 객잔의 주인이라도 되어 있었더라면.
복수고 뭐고,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주목해라!”
누군가 커다란 목청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은 번화한 거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커다란 가게가 있는 곳이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니, 무언가를 알리기에 좋은 장소.
“며칠 전, 이 근방에 있던 세가 하나가 멸문을 당했다! 누구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거나 본 게 있다면, 맹에서 크게 치하하겠노라!”
그 말에 도율이 앞으로 나섰다.
“뭐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나다.”
“뭐라?”
숨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그랬다고.”
* * *
“어떻습니까?”
엘리아나가 검은 팔을 뻗었다.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떠올렸습니까? 인간을 증오하던 시절의 기억.”
그 시절의 도율은 지금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평화 따윌 위해서 인간들의 대표로 앞장서서 싸운다는 것 따윈, 그 시절의 도율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인간들이 얼마나 덤비든 간에, 중요한 건 도율이었다.
‘이자만 없으면.’
결국 그가 가진 내공만이 사도들이 가진 마나 코어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도율이 없으면 인간들은 아무리 승리를 거듭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자를 무력화시킨다면, 사실상의 일등공신. 다른 사도들… 특히 장서주 역시 다시 볼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날 무시했던 이들도 모두…….’
엘리아나가 인간 무리를 처음 상대할 사도로 결정되었을 때, 그녀에게 기대를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뭐, 몸풀기로는 딱 적당하지 않겠어?
그녀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
그렇게 자신을 무시했던 다른 이들의 콧대를 모두 짓눌러 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이기기 위해 그 핵심인 도율에 대해서 알아보니, 그의 심리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저번에 만났을 땐 미처 환각을 걸 수 없었지만, 한 번 건드리기만 한다면 그 다음부턴 그녀의 마음대로였다. 특히나 이런 인간은 더더욱 빠져나올 수 없다.
엘리아나가 도율에게 속삭였다.
“자. 복수하도록 하죠. 당신을 이렇게 만든… 진짜 적들에게.”
그러자 도율의 눈동자가 엘리아나를 향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증거였다.
‘걸려들었다……!’
엘리아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도율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가 왜?”
도율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