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아주 열받아
“안심해도 좋아. 난 다른 녀석들처럼 수작 부리는 방법 따윈 모르거든.”
조룡주 라크자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도가 그렇게 말했다.
그랜드 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도들과 달리 수작을 부릴 줄 모른다는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거 참 고맙구만.”
어둠 속에서도 라크자르의 존재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도율의 기감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대로 라크자르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이었다.
라크자르의 동공이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롭게 좁혀졌다.
“그럼 즐겨 보자고.”
탓!
라크자르가 발을 떼자 순식간의 도율의 앞에 도달했다.
부웅!
라크자르가 주먹을 휘두르자, 무거운 마계의 대기가 짓눌렸다. 마력으로 가득차서 그런지 한층 밀도가 있는 바람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도율이 주먹을 받아 냈다. 주먹의 크기 자체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으면서,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곧바로 하단을 공격하자 라크자르가 뛰어올라 피했다. 동시에 몸을 뒤틀어 다리를 뻗었다.
도율이 어깨를 틀어 피하며 손아귀를 뻗어 라크자르의 몸통을 향해 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라크자르의 팔뚝이 가로막고 있었다.
퉁!
보통이라면 팔을 박살 내고 내장까지 진탕을 낼 만한 위력이었지만, 라크자르의 팔뚝은 단단해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어쩌면 막지 않았더라도 멀쩡했을지도 모르고.’
그 정도로 단단한 놈이었다.
그렇다면 더 높은 위력을 가진 공격을 퍼부을 필요가 있었다.
라크자르는 아직 공중에 있었다.
“여뢰.”
번개와 같은 속도로 무형의 검격들이 라크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공중에 뜬 라크자르도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예의 때와 같은 붉은 힘의 파동이 몰아치며 검격을 상쇄했다.
탁.
무사히 땅 위에 착지한 라크자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루하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도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저번에 싸웠던 거랑 크게 다를 것도 없잖아.”
라크자르가 목을 좌우로 뚜둑거렸다.
“사정은 모두 맞춰 줬잖아? 여기엔 휘말려들 다른 인간도 없고, 부숴져도 문제없는 곳이라고.”
라크자르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좀 더 찐하게 놀아 보자고.”
라크자르는 알고 있었다. 도율이 가진 힘은 이 정도 위력이 한계가 아니라는 것을.
도율이 내력을 가늠했다.
‘사도는 모두 다섯이라 했나.’
엘리아나를 쓰러뜨리고, 남은 사도는 넷. 누가 어느 정도로 강할지 모른다 치면, 당장 눈앞에 있는 라크자르를 포함해 나머지 모두를 상대할 힘을 남겨 둬야 했지만.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단 말이지.’
단순 계산으로 힘의 사 분의 일만 사용해서 쓰러뜨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별수 없나.’
그렇게 쉽게 풀릴 싸움이 아니란 건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소모전 없이 곧바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게 싸게 먹히는 방법일 테니까.
“너야말로.”
“응?”
도율은 되려 라크자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라크자르의 말대로 도율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건 라크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의 싸움은 지루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크자르는 아직도 소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너야말로 전력이 아니잖아.”
그러자 라크자르가 뒤통수에 손을 올렸다.
“이런, 들켰나?”
“모를 리가 있나.”
“하긴. 그것도 그래.”
라크자르가 눈을 치켜뜨며 웃었다.
“하지만 보통은 눈치챈다 하더라도 믿고 싶진 않을 거야. 지금보다 강해진다니 말도 안 돼. 다들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러나 도율은 예외였다.
“뜸 들이지 말고 전력으로 와라. 찐하게 놀아 보자고 한 건 너잖아.”
“아아. 어쩔 수 없네.”
라크자르가 눈을 감았다.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 말과 함께 라크자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습을 감춘 건 아니었다. 라크자르는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게 되었다.
단순한 힘의 덩어리. 마력으로 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라크자르는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쿵!
그의 한쪽 발이 지상 위에 내려앉자 대지가 두려움에 떨었다.
크고 굽이진 몸체에 달린 네 개의 다리. 날카로운 발톱과 매끄러운 비늘. 하늘을 가릴 듯한 커다란 날개와 혁혁하게 빛나는 눈동자.
“…용인가.”
신화 속의 존재.
백룡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오오오-!
백룡이 울부짖었다.
* * *
“엘리아나가 당했다고?”
성각주(星角主) 아스텔라는 보고를 전해 듣고도 태연했다.
슬프거나 안타까운 건 아니었다. 달리 친한 사이이거나 추억이 많지도 않았다. 사도들끼리 사이가 안 좋은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특히나 걔는 말이지.’
에스텔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와인잔을 기울였다.
다섯 번째 사도, 엘리아나.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사도의 자리에 오른 것도 고작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저, 새롭게 사도가 된 엘리아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나머지 네 명의 사도를 긴장한 태도로 우물쭈물하며 쳐다보는 모습이 영 못 미더웠다.
그날 아스텔라는 장서주를 찾아 물었다.
-괜찮은 거야?
-뭐가 말이지?
-저런 게 새로운 사도라니…….
딱히 소속감은 갖고 있지 않지만. 저런 덜 떨어진 여자가 같은 사도가 되는 건 아니꼬왔다.
그러나 장서주는 책을 덮으며 슬며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빈자리는 채워야 하지 않겠나.
-…….
그 빈자리는 요정주 셀레나의 자리였다.
사도들 중에서도 장서주와 비슷하게 오래 자리를 지켰던 존재였다. 속은 잘 알 수가 없지만, 신비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지금, 장서주는 적당한 인물을 데려와 빈자리를 채워 넣은 것이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공석으로 놔둘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돌아올 자리를 없애두고 싶은 건 아니고?’
에스텔라는 그 물음을 목울대에서 삼켜 냈다.
장서주와 요정주. 두 사람 사이의 알력 싸움은 사도라면 누구나 눈치채고 있었다.
요정주가 자취를 감춘 틈을 타 그녀가 돌아올 사도의 자리를 채워 버리기 위해 아무나 꽂아 놓은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같은 사도라 해도 엘리아나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사도끼리 서로 앙숙인 것과는 별개로, 객관적으로 봐도 한 단계 격이 낮은 자였다.
결과적으로 당했다 해도 위기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놀랍긴 하네.’
아무리 격이 낮다 해도 인간들이 좀 몰려왔다고 냉큼 당해 버릴 정도는 아닐 텐데.
에스텔라가 잔을 흔들었다.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추첨 때를 떠올렸다.
엘리아나는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듯했고, 라크자르는 워낙 천방지축이라 놀 거리가 생겨 즐거운 듯했다. 그런 두 사람이 앞 번호를 뽑은 건 모두에게 고루 이로운 일이었다.
‘내 차례까지 올 리가 없으니.’
엘리아나의 다음은 라크자르였다.
엘리아나 같은 반푼이라면 몰라도, 라크자르는 무식하기로는 알아주는 놈이었다.
그 흔한 세력 하나 없이 사도의 자리까지 단신으로 오른 놈이었다. 그런 자가 인간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서 당할 거라는 상상은 되지 않았다.
‘장서주나 누란주도…….’
그 두 사람은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성격 자체가 배배 꼬였다. 별로 상대하고 싶은 자들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서인 자신이 뭔가를 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히 흥미도 없었고.
그때 누군가 보고를 올렸다.
“성각주님. 새로운 소식입니다.”
“무슨 일?”
보나마나 라크자르 그 무식이가 인간들을 죄다 피떡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인간들이 쳐들어왔습니다.”
“…하?”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에스텔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 * *
“선수를 친다.”
그것이 주대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대로 어울려 주는 것보다, 차라리 주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
“전력이 회복되는 대로 성각주의 영지를 치러 간다.”
백우진이 발견한 건 성각주, 아스텔라가 있는 땅이었다.
“성각주라…….”
세케르가 되뇌고는 물었다.
“어떤 자인지 아나?”
세케르의 물음에 주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대현이라고 해서 모든 사도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성각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너와 비슷하다.”
“나와?”
“그래.”
세케르는 태양의 힘 사용하는 각성자였다.
“아스텔라는 별의 힘을 사용한다.”
“그런가.”
마계의 하늘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저 짙은 안개 너머에 별이 숨어 있다는 뜻일까.
마계에는 태양의 힘이 닿지 않았다. 덕분에 푸른 초목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스레 세케르 역시 인간계에서와 같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졌다. 고작해야 잔챙이들을 몇 시간 상대했다고 힘이 다할 뻔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런 세케르를 향해 주대현이 물었다.
“자신 없나?”
“설마.”
세케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별빛 따위, 태양의 앞에선 등불에 불과하단 걸 모르나?”
자신에 찬 대답이었다.
“그럼 믿겠다.”
그리고 잠시 후.
체력을 회복한 각성자들이 지시에 따라 아스텔라의 영지를 침입했다.
도율이 없으면 사도는 쓰러뜨릴 수 없다. 도율이 가진 내공의 힘이 아니면, 사도의 코어를 완전히 파괴할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해서 도율이 없다고 손을 놓고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능한 세력을 깎아 둔다.’
아스텔라가 세케르와 비슷한 건, 다수의 마족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대 길드 헬리오폴리스를 이끄는 세케르와 같이, 아스텔라 역시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휘하 마족들이 있었다.
그 세력을 상대하는 건 가능했다. 설령 아스텔라가 직접 나선다 해도 어느 정도 체력을 소모시킬 순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남은 사도는 넷이고, 도율은 하나였다.
‘혼자서 모든 사도를 상대할 순 없다.’
가능한 모두가 힘을 합쳐 사도를 상대하고, 도율에게는 마무리만 맞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라크자르 같은 경우엔……. 다른 이들이 아무리 도우려 해도 방해만 되겠지.’
도움이 될 상황이 있다면 최대한 써먹는 게 효율적이었다.
“섬멸해라!”
주대현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진격했다.
그렇게 영토를 지키던 경비 마족을 베어 내고, 소식을 듣고 지원을 온 부대를 상대하던 도중이었다.
전황은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사도 휘하의 마족이라 해도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 역시 추리고 추린 일류 헌터들이었기에.
그 중심엔 열기와 광채를 흩뿌리는 세케르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렇게 모든 것이 작전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여겨지던 순간.
세케르가 밝게 비춰 놓은 하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빛을 밀어내는 것처럼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아, 정말.”
짙푸른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하늘을 걸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얕보인 모양이네, 나도 참.”
기다란 지팡이와 함께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가온 여자.
성각주 에스텔라.
“아주 열받아.”
그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