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빨리도 오는군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을음 하나 없을 줄이야.’
세케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법 큰 마력을 쏟아부은 공격이었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공기조차 타오르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아스텔라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치맛자락을 털고 있었다.
“그래, 알겠어. 너 좀 재밌는 애다, 이거구나.”
가소로운 미소를 띤 채 손을 뻗었다.
“놀아 줄게.”
세케르가 뿌리는 빛으로 가득한 전장에, 아스텔라의 손끝을 따라 칼로 그은 것처럼 검은 틈이 벌어졌다.
그 검은 틈은 아스텔라의 손끝뿐만 아니라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처럼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크 매터.”
그 사이로 힘과 질량을 가진 무언가가 쏟아졌다.
“칫……!”
맞으면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파악한 세케르가 날개를 날카롭게 세우고 비행했다. 상하 좌우를 막론하고 쏟아지는 검은 덩어리들을 피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빗방울이 쏟아지는 것처럼 수많은 공격들을, 세케르의 곡예 같은 비행으로도 모두 피할 순 없었다.
퍼억!
어깨에 얻어맞자 그 부위가 검게 물들었다.
“……!”
그 검은 얼룩은 조금씩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목과 팔꿈치를 계속해서 좀먹을 것으로 보였다.
세케르가 결단을 내리고 상처 위로 불꽃을 지졌다.
치이익!
신성한 불꽃이 살을 태우며 검은 얼룩을 지워 냈다. 그러나 어깨에 남은 화상은 지울 수 없었다.
원래라면 웬만해서는 불꽃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 세케르였지만, 이번엔 제 몸에 상처를 내기 위해 한 일이었으니까.
“우와. 터프한걸.”
아스텔라가 감탄하며 박수 쳤다.
“왜 그렇게 노려봐? 왜? 또 그 지팡이로 성냥이라도 켜려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세케르를 향해 아스텔라가 키득거렸다.
“소용없었잖아. 인간도 그 정도 학습 능력은 있지 않았던가?”
아스텔라의 조롱에 세케르가 조용히 답했다.
“이건 지팡이가 아니다.”
“응?”
아까 그 지팡이에서 불꽃을 쏘아 내지 않았나.
날개를 펴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팡이로 불꽃을 쏘아 내는 것. 그것이 세케르가 보여 주는 전투 방식이었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손잡이.”
세케르가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검 손잡이다.”
그것을 가슴 앞으로 끌어모으며 세케르가 말했다.
그 정도 크기의 막대가 검의 손잡이라면, 검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란 걸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터널 플레임.”
세케르가 양손으로 쥔 손잡이 위로 불꽃이 솟구쳤다. 막대한 불꽃의 열기에 세케르의 머리가 휘날렸다.
그 크기는 가히 하늘을 베어 낼 정도였다.
후웅-!
세케르가 검을 비스듬히 휘두르자 대지의 끝이 잘려 나가듯 움푹 파였다. 불꽃의 검에 닿은 땅은 베여 나가는 것과 동시에 녹아내려 용암이 되어 솟아올랐다.
“보다시피 조절이 안 돼서, 평소엔 쓸 일이 없지만.”
인간계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간 지도가 바뀌고 말 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마계. 마족과 마수가 득시글거리는 이종족의 땅. 눈치를 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서라면 마음껏 쓸 수 있지.”
그 기행엔 아스텔라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뭐 이런 무식한……!”
“간다.”
세케르가 검을 쥐고 날아들었다. 그 날개는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최단 거리로 적에게 돌진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검을 쥐고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열기의 파도가 일었다. 그 검으로 베어 내는 경로상의 모든 건 지워지듯 녹아내렸다.
그건 아스텔라가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수놓은 검은 영역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아스텔라가 몸을 내뺐다. 이 전투에 있어 처음으로 꽁무니를 뺀 것이었다.
세케르의 칼끝이 아스텔라를 쫓았다. 거대한 검은 상대가 얼마나 도망쳐도 끝을 모르고 달려들었다.
‘저만큼 크니까, 살짝만 휘둘러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세케르는 그런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것에 어떠한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사위를 베어 냈다.
“치잇……!”
아스텔라가 표정을 구겼다.
고작 인간을 상대로 이 정도로 진심이 되어야 한다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밤의 장막.”
아스텔라가 장막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러자 아스텔라가 이곳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모습을 숨기는 것 이상으로, 신체 그 자체를 밤과 동화시켜 그 속을 흐르는 유체 상태로 만들었다.
이 상태의 아스텔라는 어떠한 공격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 하는 것과 같지.’
마찬가지로 그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세케르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 황금안. 세케르의 눈은 아스텔라가 몸을 숨긴 밤의 장막의 구조와 비밀을 모두 파헤치고 그녀의 위치를 포착했다.
“거기냐!”
세케르가 검을 쥐고 아스텔라의 코어가 숨겨진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이도율 씨!”
누군가 도율의 이름을 불렀다. 도율이 돌아보니 백우진이 흰돌이의 등에서 내리고 있었다.
“백우진 씨?”
“이런 곳에 있었던 겁니까.”
백우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육안으로는 아무리 봐도 어둠뿐인 곳이었다.
깊고 깊은 계곡.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 보였다.
요력을 깨우친 백우진도 어떻게 주위를 간신히 분간할 수는 있었다. 덕분에 도율의 상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당신이 상처를 입은 겁니까?”
“나도 다치긴 합니다.”
백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도율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대협. 저도 있습니다만.」
“넌 언제 따라왔냐?”
「따라오긴 개뿔이! 집에서 배 긁으면서 드러누워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인간이 소환했단 말입니다!」
확실히, 흰돌이는 그냥 집에 두고 출발했는데, 자처해서 따라올 놈은 아니었다.
“탈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더니, 선배님이 와 주셨습니다.”
“선배님?”
「크흠, 흠.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 거?”
도율이 집요하게 캐묻자 흰돌이가 말문을 돌렸다.
「아 맞다, 대협! 지금 다친 거 아닙니까?!」
“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무슨! 섭한 소릴! 전 당연히 언제나 낮이나 밤이나 자나 깨나 대협 걱정뿐입니다!」
도율은 흰돌이의 말을 개소리로 치부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닷!」
그 말은 흘릴 수 없었다.
“네가 이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예? 저 원래 치료도 하잖습니까.」
“그게 치료……?”
도율이 미심쩍은 눈길로 흰돌이를 바라봤다.
그야 애초에 이 녀석을 데려온 이유도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에 혹해서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비했다. 일반인인 동생에겐 그나마 듣는 편이었지만, 사도와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은 도율의 몸을 치료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한번 보십쇼!」
그러나 놀랍게도 흰돌이가 눈을 감고 집중하자, 도율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고 있었다.
“이건…….”
언제 이렇게 효과가 좋아졌지?
「이 안경한테 요력을 받은 후로 발도 번개처럼 빨라지고, 치유도 더 잘 듣게 됐다 이겁니다!」
간만에 밥값을 하는 느낌에 흰돌이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의외였지만 정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래.”
도율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남은 싸움을 생각하면 이런 도움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특히 다른 치료 효과를 가진 스킬이나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도율에게는 더더욱.
흰돌이의 치료를 받는 동안 백우진이 도율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백우진이 요력을 통해 주위를 살폈지만, 이곳에 있는 건 도율뿐이었다.
백우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크자르의 유언대로, 도율은 그의 시신을 흔적도 없이 파괴했으니까.
적당히 남겨 뒀다간 누란주라는 사도가 써먹을 가능성이 있으니, 가능한 철저하게 가루를 내 버렸다.
“사도를 쓰러뜨렸습니다.”
“사도를…….”
“조룡주 라크자르. 놈은 이제 없습니다.”
수월주와 조룡주를 쓰러뜨렸으니, 이제 남은 건 총 셋이었다.
“그나저나 그쪽 상황은요? 절 찾고 있는 겁니까?”
도율의 질문에 백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아닙니다. 이도율 씨를 찾으러 온 건 저 한 사람이 전부고, 나머지는 다른 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른 작전…이라면?”
백우진이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성각주를 치러 갔습니다.”
“예?”
도율이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사도와의 전투를 펼친다는 뜻이었다.
조룡주를 상대해 본 입장에선 권하고 싶지 않은 작전이었다. 사도에 대해 잘 아는 주대현이 허락했으니 수행한 거겠지만.
‘아무래도 위험하다.’
백우진이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성각주는 세케르라는 자가 직접 상대한다 하더군요. 두 사람은 가진 힘의 결이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비슷하다…라.”
“이도율 씨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생각인 건 아닐까요?”
설령 그렇다 해도.
가진 힘이 비슷하다는 말이 걸렸다. 도율이 경험하기로, 사도의 힘은 상대를 먹어 치우는 경향이 있었다.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좋은 먹잇감이 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서두릅시다.”
도율이 흰돌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 * *
“금방.”
아스텔라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처럼 여러 겹으로 울려 퍼졌다.
“달려들고 마는구나.”
그 말과 함께, 세케르가 비명을 터뜨렸다.
“크윽……!”
치이익, 하고 무언가 공격을 당했다. 그게 무엇인지 당장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건방지긴. 태양의 아들이라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스텔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작해야 별 하나의 힘을 쓰는 주제에… 성각주인 내게 발끝이라도 미칠 수 있을 줄 알았니?”
통증은 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별빛…이었나!’
세케르의 눈이 새하얗게 타들었다.
황금안은 진실을 꿰뚫어 보고, 밤의 장막의 어둠을 낱낱이 파악했지만. 짙은 어둠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눈이, 갑작스러운 별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타들어 간 것이었다.
“고작해야 내가 진심을 낼 때까지가 수명이었던 거지.”
아스텔라가 손을 뻗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고독 속에서… 죽어라.”
세케르의 주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들은 모두 끝없이 차갑고, 텅 비어 있었다. 공기조차 없는 진공. 그곳에서 세케르가 내뱉는 숨은 모두 얼음이 되었다.
세케르는 그곳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불꽃 역시 타오르지 않았다.
‘제길…….’
눈이 감겼다. 뜬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콰직!
무언가가 세케르가 갇혀 있는 검은 그림자를 부쉈다. 덕분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순 있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땅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크윽…….”
거친 손속. 누가 돌아온 건지 눈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빨리도 오는군.”
세케르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불만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