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용의 둥지
“지금!”
클레어의 신호에 도율이 날카롭게 벼려진 내공을 쏟아부었다.
‘…됐다.’
도율조차도 반신반의했던 일이지만, 클레어의 말대로 지금은 청진명과 블라드의 마력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도율의 내공이 다가오며 느껴지는 압도적인 파괴력. 덕분에 도율은 마력으로 구성된 마족들을 근본부터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반쯤 도박이다만…….’
누군가 다치지 않도록 내공을 세밀하게 제어하는 것은, 도율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피부 위로 마사지를 할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각성자인 청진명의 몸속에 손을 대는 일이라면 더더욱 위험했다. 자칫하면 폐인이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포기보다는, 낮은 가능성에 걸었다.
‘인간 놈들이……!’
블라드가 치욕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정말 오래간만에 발견한 상성이 잘 맞는 숙주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버리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인간들은 블라드가 가진 마력에만 한눈이 팔려 있었다. 마력을 버리고 도망치면, 대부분의 힘을 잃긴 하겠지만 일단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힘을 되찾아, 이 치욕을 선사한 인간들에게 배 이상의 고통을…….
“어딜.”
그렇게 청진명의 몸을 버리고 떠나려던 블라드는, 무언가 덜컹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금발의 여자가 싸늘하게 청진명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들의 눈으론 블라드의 코어가 빠져나가는 걸 볼 수 없을 텐데, 마치 직시하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도망치려고.”
그 오른쪽 눈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블라드의 코어가 있는 곳은 청진명의 심장 속이었다. 그곳이 가장 효율적으로 혈액과 마력을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도망치기 위해 혈관을 통해 상처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심장을 막았다고……!?’
클레어의 마력이 청진명의 심장을 틀어막고 있었다. 인간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몸인데도.
이대로 시간이 오래 흐르면 몸의 주인 역시 무사할 수 없을 텐데.
‘미친 건가……!’
그렇게 클레어가 블라드를 가둬 놓는 사이, 도율의 내공이 청진명의 기맥을 따라 흘러 들어왔다.
‘크아아악! 이, 이놈들…!’
도율의 내공이 블라드의 마력을 파괴했다. 청진명의 혈액 속에 녹아든 마력이 사라지며 몸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도율의 내공이 청진명의 심장에 도착했다. 클레어의 마력이 흩어졌지만 이미 빠져나갈 길은 모두 막혀 있었다.
콰득!
도율의 내공이 블라드의 코어를 꿰뚫었다.
“후우…….”
도율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아 냈다.
“고생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클레어 역시 땀에 젖어 있었다.
“이대로 전 민아 언니랑 같이 팀장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데…….”
청진명을 내려다보던 클레어가 도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율 씨는 갈 데가 있죠?”
클레어의 물음에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요.”
혈귀공 블라드.
인간들을 감염시켜 동료를 늘리고 그중 하나를 숙주로 삼아 현신하는 귀찮은 능력을 가진 마족이었지만, 그조차도 사도는 아니었다.
그를 제압하고 인간 무리에 풀어놓은 진짜 원흉은 따로 있었다.
누란주(累卵主) 그레고르.
놈은 어디선가 숨어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을 따라, 녀석을 쓰러뜨리러 갈 생각이었다.
“그럼 다녀와요.”
선뜻 보내 주는 클레어의 모습에 도율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제가 당신이랑 하루 이틀 지내 보나요?”
가능하면 함께 가서 힘을 보태고 싶었지만, 이곳엔 무방비한 청진명이 쓰러져 있었다. 클레어는 송민아와 함께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도율이라면 혼자 가도 이기고 돌아오리라는 믿음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팀장님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놈은, 혼 좀 났으면 좋겠으니까요.”
그 부분은 도율도 동감이었다.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도율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 * *
“여긴…….”
시간이 지나, 청진명이 눈을 떴다.
딱딱한 돌바닥에 배긴 등. 온몸의 근육이 호소하는 통증. 모처럼 눈을 떴는데도 반기는 건 칙칙한 하늘이었다.
한 차례 늦게 이곳이 마계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청진명이 몸을 급히 일으키려 했지만, 격통에 움츠러들었다.
“큭……!”
“좀 더 누워 있으세요.”
안정을 취하라 말하는 건 클레어였다.
“막내? 너 언제…….”
청진명이 질문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오래 의식이 없었는지 몰랐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여겼다.
무엇보다도 청진명이 마지막으로 싸운 상대가 도율이었다. 그러니 막내가 이곳에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도율은?”
“잠깐 다른 볼일이 있대서요.”
의아한 건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누워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몸 상태는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목숨과 의식이 남아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어떻게 된 거지?”
“고생 좀 했죠.”
클레어가 팔짱을 끼고 가볍게 콧숨을 내쉬었다.
청진명이 기억을 더듬었다. 각성자 집단에서 갑자기 무언가에 감염당한 듯한 인간들이 나타났고, 그걸 무찌른 자들까지 역으로 감염되었다.
자신은 다른 이들이 도망치게 하기 위해 혼자 남아 모든 감염자들을 무찔렀지만, 결국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본 게 도율이었으니, 분명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결정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흔적인지 붉은 자국 같은 건 남아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의식을 좀먹는 듯한 느낌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어디 가둬 두거나 끝장을 내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텐데. 기어코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은 걸 보면, 의식은 없었어도 상당히 고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청진명이 가볍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그 말에 클레어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감사 인사는 저쪽에 하시죠.”
“응?”
클레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살짝 솟아오른 바위가 있었다. 누군가 그 뒤에 모습을 숨기고 청진명을 훔쳐보고 있었다.
송민아였다.
청진명과 눈이 마주친 송민아는 화들짝 놀라 바위 뒤로 사라졌다.
“…쟤 왜 저러냐?”
“으음…….”
클레어는 청진명이 눈을 꿈뻑거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야, 청진명도 그땐 의식이 없었을 테니,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여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클레어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전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 두 분이서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뭐어? 야, 여기 화장실이 어딨냐? 너 그거 노상방뇨…….”
“다무세요, 좀!”
클레어가 왈칵 성을 내고 자리를 비웠다.
“…쟤는 팀장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청진명이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청진명도 클레어가 신경 써서 자리를 비워 줬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그 이유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지.’
뭐가 됐든 일단 대화를 해 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진명이 송민아에게 다가갔다.
“너,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
송민아가 청진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선을 피하려다가 다시 째려보고,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이 굴러가곤 했다.
청진명은 송민아가 입을 열 때까지 태연한 얼굴로 기다렸다.
“너… 진짜 기억 못 하는 거 맞지?”
“뭘?”
뻔뻔한 청진명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송민아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됐다.”
그런 송민아의 반응에 청진명이 물었다.
“혹시 너, 나한테 키스라도 했냐?”
“뭐?!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 신데렐라에서 나오잖아.”
“백설공주야, 등신아!”
“그런가?”
저주에 걸린 공주의 잠을 깨우기 위해 왕자님의 키스가 필요하다는 전설. 이 경우엔 아니었다.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청진명이 그렇게 불만을 투덜거렸지만, 송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딱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기억이 남아 있다면 되려 곤란할 뻔했다. 잊었다면 이대로 흘려 넘기는 게 나았다.
그때 청진명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너 나한테 뭐라고 했냐?”
“뭐?”
송민아가 이를 갈았다.
“너 이 자식, 기억 안 난다고…….”
“아니, 기억 안 나. 근데 마지막에… 너한테 무슨 말을 들어서 깨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어.”
어렴풋한 기억에 꿈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점 선명해졌다. 청진명이 의식을 잃었을 때 무언가 이야기를 듣고 깨어났다는 사실을.
그 목소리는 분명히 송민아의 것이었다.
“분명 너한테 무슨 말을 듣고……. ‘절대 안 돼!’라는 생각에 정신이 확 들었는데.”
청진명이 막 나갈 때마다 관절기를 걸던 송민아답게, 정신 차리게 하는 것만은 일품이었다.
그런 청진명의 말에 송민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 정신이 확 들든?”
“어. 대체 뭐였냐? 불안해 죽겠네. 너 혹시 내 컴퓨터 비밀번호라도 알고 있는 건…….”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청진명에게, 송민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혼하자고 했는데.”
그러자 청진명이 동작을 일시 정지하고 송민아를 쳐다봤다.
“진짜로?”
“어.”
딱히. 큰 의미를 담아 한 말은 아니었다.
청진명이 어디 데려갈 여자가 없는 모지리인 것도 아니었다. 본인이 바빠서 그렇지,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칠 터였다.
어른이 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여자가 갑자기 고백하면 놀라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참이었지만.
“하아아아…….”
청진명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아주 불만 많나 보다?”
“당연하지.”
그 꼬라지를 보니 없던 분노도 생길 지경이었다. 송민아가 손가락을 뚜둑거리며 풀었다.
청진명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왜 네가 먼저 말하냐. 사나이 체면 안 살게…….”
“…뭐?”
청진명의 말에 송민아가 그대로 굳었다.
“못 들은 걸로 하자.”
“어……. 어?”
청진명이 몸을 훌쩍 일으키고 송민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할 거니까, 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어안이 벙벙했다. 이 인간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청진명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그래.”
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녀석은 아마 둥지에 있을 거다.’
‘둥지?’
라크자르를 끝장내기 직전, 도율은 라크자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평소 누란주와 앙금이 쌓여 있었던 건지, 라크자르는 걸작이라 부르던 자기 몸을 부숴 달라는 것도 모자라 누란주가 있을 위치까지 알려 줬다.
물론 그곳에 없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적어도 단서 없이 뒤지는 것보단 나았다.
‘여긴가.’
도율이 둥지에 도착했다.
둥지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란주의 성격상, 수하로 부리는 마수나 마족을 상당히 풀어놓았을 줄 알았는데.
‘이곳엔 없는 건가……?’
도율이 의아해하며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둥지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엔 수월주나 성각주의 성이나 영지처럼 문명적인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동굴을, 누군가 거점으로 삼은 듯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자, 누군가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손을 썼는데, 이것밖에 시간을 벌지 못했군요.”
쓸모없는 것들.
목소리의 주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누란주냐?”
도율의 물음에 누군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예, 그렇습니다.”
백의를 입는 것이 어울릴 듯한, 피곤하고 깡마른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저자가…….’
겉으로 보기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듯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라크자르가 그토록 성가셔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쉬운 상대는 아니리라.
“일단은 환영하도록 하지요.”
누란주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용의 둥지에.”
동굴 속에 화려한 조명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