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우리 구면이죠?
헌터 장비 제조 공방 업체 불카누스.
그곳의 사장실에는 지금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불카누스의 사장 임수길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치뜬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차콜그레이 정장을 걸치고 애쉬 색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다리를 꼬고 비서가 준비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마른 데다가 금테 안경을 쓰고 있어 차가운 인상이 돋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백우진.
대한민국의 4대 길드 ‘플레이아데스’의 부길드장이었다.
직책 자체는 부길드장이었으나, 길드를 세운 초대 길드장이었던 백건우의 아들. 백건우의 갑작스러운 타계 이후 동생인 백건영이 길드장 직책을 이어받았지만, 많은 이들이 차기 길드장의 자리는 우진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덕에 백우진은 부길드장이면서도 길드장과 가까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저희 신제품을 계약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임수길이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하지만 헌터도 아닌 우진 씨가 왜 이 제품을 눈독 들이시는지……?”
“헌터여야만 가능한 겁니까?”
“아,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백우진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 개인의 뜻은 아닙니다. 길드장… 그러니까 길드의 뜻인 거죠. 저희 길드에도 소속된 헌터들이 있습니다. 길드 차원에서 소속 헌터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수길의 형식적인 아부에 백우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먼저 관심을 표한 헌터님이 계셔서, 아무래도 그쪽과 먼저 얘기를 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긴 한데…….”
임수길이 운을 띄우며 눈치를 봤다.
웃기는 소리였다. 사업 거래는 선착순 달리기가 아니었다. 먼저 와서 앉았다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더 나은 계약 조건을 제시하는 쪽의 손을 들어 주는 이치의 세계.
즉, 같은 조건을 내밀지 말고, 보다 구미가 당기는 소리를 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번 계약을 계기로 신뢰를 쌓아 가다 보면, 보다 많은 거래를 성사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이번 계약을 초석으로 삼아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하자는 의미였다. 플레이아데스는 거대 길드인 만큼 물자의 소비와 회전이 빠르다. 그 격랑에 터빈을 댈 수 있으면 상당한 이득이 될 터.
그에 반해 클레어 컴벨은 소속 없는 단신 헌터. 이번 한 번의 거래로 아이템값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었다. 그녀 개인이 S급 헌터라고 해도, 거대 길드 같은 안정적인 대규모 거래처와는 비교 선상에 두기 어려웠다.
특히 플레이아데스는 최근 상당히 공격적으로 자재와 기술을 매입하고 있었다. 세간에선 경영 안정성을 두고 논란이 많지만, 장사꾼 입장에선 그저 돈 많은 봉으로 취급하면 그만이었다.
“좋습니다! 좋은 관계의 시작. 저희가 귀하의 길드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면야.”
임수길이 껄껄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거래가 성사되었다.
“어떻게,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이 근처에 잘 아는 일식집이…….”
“실례지만 다음 스케줄이 있습니다.”
“아유, 그러시군요.”
다소 찬바람 부는 백우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임수길은 웃는 낯으로 그를 1층 로비까지 배웅했다.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거래 상대인데 침을 뱉어도 미소를 띨 자신이 있었다.
그때.
로비에 도착한 순간, 백우진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성자가 아닌 자신조차 느낄 수 있는 엄청난 위압감. 마치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마… 력인가?’
백우진이 숨을 몰아쉬며 예상했다. 몇몇 헌터는 마력을 투사해 목을 옥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 되는 건물에 마력 감지 장치 하나 없을 리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진작에 경보가 울리며 보안 업체 직원들이 뛰쳐나왔을 거다. 게다가 옆에 있는 임수길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백우진이 어렵게 고개를 돌려 그 위압감의 정체를 확인하니, 그곳엔 어떤 남자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남자는 백우진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압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우리 구면이죠?”
무슨 개소리야.
백우진은 간신히 내뱉었다.
“…초면입니다만.”
남자가 백우진의 얼굴을 살피더니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진짠가 보네.”
그러자 탁 하고 백우진을 압박하던 압력이 맥없이 사라졌다. 백우진은 주저앉을 뻔했지만, 시선을 의식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백우진이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 남자가 태평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이도율이라고 해요. 그쪽은?”
“…백우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온갖 보안 장치를 뚫고 이토록 정교하게 자신만을 노릴 수 있는 남자. 당장은 자극하지 않고 얌전히 구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여러모로.”
남자는 힘이 빠진 백우진의 손을 잡고 대신 흔들어 악수를 끝마쳤다.
백우진의 옆에 있는 임수길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임수길의 눈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백우진의 분위기가 변했다.
무언가 이상한 짓을 당했다기엔 군수 업체 사옥에 설치한 온갖 보안 장치가 단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명백히 이상했다.
시판 중인 장비들과 시험 삼아 설치한 시제품들의 성능과 장사꾼으로서 길러 온 안목과 감. 그 두 개 중에서, 임수길은 후자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백우진은 이곳에 방문했다가 영문 모를 남자에게 모종의 폭력을 당한 셈이었다. 거래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에 바쁜 와중에 떨어진 날벼락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남자는 태연히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사장님도 오랜만입니다.”
“뭔데! 너, 나 알아?! 난 너 같은 놈 몰라!”
“이러시기입니까? 아니면… 이렇게 불러 드려야 기억하겠습니까? 선배님.”
“선배… 뭐? 아니, 설마…….”
임수길은 그 호칭을 듣자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싶은 과거는 아니었지만, 그리 오래된 과거도 아니었다. 싫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악몽.
거기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 그에게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변을 수색하던 각성자 지원 센터의 직원들에게 발견되어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남자가 임수길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남들에게 보여 주지 않고 몰래 무언가를 자랑하듯이. 그는 재킷을 열고 품에 넣어 둔 가면을 보여 줬다.
여우 모양의 가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빛 아래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남자가 그 가면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 * *
임수길 사장과 함께 방문한 근처 일식집.
그곳에서 나는 그와 독대하는 중이었다.
클레어 씨는 택시를 타고 먼저 돌아갔다. 어차피 영업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게다가…….
“…날생선을 먹을 거라고요?”
“날생선이 아니라 회요.”
“그게 날생선이잖아요.”
일식은 싫어하는 모양이다.
김치도 잘 못 먹지만.
임수길 사장과 같이 있던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 백우진은 몸 상태가 안 좋다며 먼저 돌아갔다. 꾀병이 아니란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
내 납치를 사주한 집단.
하지만 한국의 4대 길드라고 불릴 정도라면 규모가 엄청날 테니 내부에서도 파벌이 여러 갈래로 나뉠 터였다. 그곳의 모든 인간이 합심하고 나를 납치하자는 의견에 찬성했을 리는 없었다.
부길드장 정도 되면 나를 알고 있을까. 혹시나 하고 찔러 보니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면…….
‘부길드장보다 윗선이라면 길드장밖에 없겠군.’
슬슬 입질이 오려 하고 있었다.
“으하하! 왜 이렇게 늦게 찾아온 거야, 이 사람아!”
임수길 사장이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길드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미소를 띠웠다.
“바빴습니다.”
“조금만 더 바빴으면 내가 자네 찾으러 갈 뻔했어. 이 임수길이, 은혜는 안 잊는 남자잖나!”
피식 웃음이 샜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았다. 전형적인 술 들어간 입에서 나오는 허풍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자네가 매니저 일을 한다니. 나는 당연히 헌터일 줄 알았지.”
“그땐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동굴 밖에 나가보니 센터 직원들이 와 있더군요.”
“그런가……?”
본래 거짓말엔 진실을 섞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 센터 직원들을 대동하고 온 클레어 씨와 맞닥뜨리기 전에 있었던 일은 쏙 빼놓고 얘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도 궁금할 테지? 내가 그 두 연놈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다시 내 회사를 되찾았는지?”
“아뇨, 별로 궁금하진…….”
“비결은 바로 사람이었네. 비록 명의를 빼앗겼다고 해도 내가 바닥부터 발품 팔고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냈던 이사진들이 내 복귀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술 들어간 아저씨의 무용담이 시작되었다.
증거 자료와 증언을 모아서 두 사람을 고소한 일, 금고에 숨겨 둔 비자료와 출자 구조를 이용해 지분을 되찾은 일, 이 기회에 주인을 갈아탄 간신배들을 싸그리 숙청한 일.
듣다 보니 재미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더 좋은 일이었네. 회사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수 있었으니. 아픔은 있었지만…….”
임수길 사장이 한숨을 내뱉었다.
“반쪽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사내라는 게 참 멍청해서 벌써 옆구리가 시리더군. 그렇게 당해 놓고 말이야. 쯧쯧.”
“하하…….”
“자네는 결혼했나?”
나는 반지를 보여 줬다.
상대가 누군지 밝힐 생각은 없지만.
“부럽구만. 자네는 아내한테 잘해, 나처럼 되지 말고.”
이 아저씨, 저번에 봤을 땐 사흘에 한 번 어쩌고 하지 않았나? 그새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워낙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클레어 씨에게 잘하란 건 공허한 조언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인 부부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묶인 관계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클레어 씨에게 잘해야 하는 게 있다면 매니저로서 서포트하는 것뿐이겠지.
일하자, 일.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 말만 해! 아니, 대답 기다리지도 마. 무조건 들어줄 테니까!”
술 들어간 아저씨의 호언장담은 무섭구만.
나는 웃으며 물었다.
“불카누스 신제품 계약 우리 줘요.”
“어……?”
임수길 사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술이 다 깰 정도의 안건인가.
“자, 잠시만.”
그는 목이 타는지 술잔을 들이켜고 입을 축였다. 입술을 핥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마구 두드리는 게 다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해도 저울이 기울 일은 없겠지. 대형 길드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는 거니까.
고개를 숙이고 한참 고민하던 임수길 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네.”
대답은 놀랍게도 긍정이었다.
“정말요?”
내가 되묻자 임수길 사장이 자작을 했다.
“물론이지.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사람 보는 눈 하나로 먹고살았는데. 내가 보니 자네는 크게 될 상이야. 음, 그렇고말고.”
“확실해요?”
나 출세 욕심 없는데.
잔을 든 임수길 사장의 손이 떨렸다.
* * *
백우진은 늦은 밤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불카누스로부터 온 계약 메일. 그러나 그 내용은 거절의 뜻을 담고 있었다. 무척 송구스럽지만 다음에 더 좋은 만남을 갖자는 내용. 회사에 직접 방문해 사장과 대담까지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불발되었다.
하지만 백우진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담담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애초에 무리하게 진행한 계약이었다. 클레어 컴벨이 관심을 표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끼어든 것은 이쪽이었다. 그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을 진행하는 건 백우진의 몫이었다.
‘그 이도율이라는 남자, 클레어 컴벨의 매니저라고 했던가.’
무언가 있는 놈이었다.
갈무리하기 전의 위압과 기세가 엄청났다. 초면에 그런 짓을 당했으니 인상이 좋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평가는 냉정했다.
게다가 그건 단순히 힘자랑이 하고 싶어서 하는 짓거리가 아니었다. 분명한 대상을 갖춘 분노의 발현이었다. 그게 왜 자신을 향한 것인지가 의문일 뿐이다. 혹은 자신이 아니라면…….
‘길드에 원한이 있나.’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백우진은 잡념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결과가 나왔으니 보고를 하러 갈 차례였다. 이 일을 지시한 사람에게.
부길드장인 그에게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그의 백부인 백건영뿐이다.
백우진이 부길드장 집무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자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