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그걸 왜 이제 말하냐
‘큭큭…….’
도율의 몸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레고르는 실의에 빠져 절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더 큰 마력을 지닌 존재들을 먹어 치우며 성장해 온 그레고르에게, 사도의 자격은 영광스러운 광채가 아니라 빛바랜 퇴색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런 그레고르가 도율의 힘을 가까이 마주하고 느낀 건 흥분이었다.
‘새로운 힘……!’
미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구는 그레고르를 보다 높은 지경까지 끌어올려 주는 계단이었다.
지금 당장은 이길 수 없지만, 본거지로 돌아가 분석과 개발을 반복하고 나면 쓰러뜨릴 수 있다. 그 새로운 힘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도율에게 가까이 간 개체는 짓눌리듯 불살라지고 말았지만.
‘혈액 샘플은 채취 완료했군요.’
간신히 담아 낸 한 방울의 피와 함께, 그레고르는 도율 몰래 탈출을 감행했다.
사방으로 퍼진 수많은 벌레들은 결국 모두 눈속임이었다. 그레고르가 마지막으로 숨겨 놓은 건 가장 믿음직한 그릇이었다.
조룡주 라크자르가 만들어 놓은 조각 중 하나를 몰래 빼돌리고. 그 안에 의식을 심어 두었다.
“이런 난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쿠구구궁!
조각 속에 숨어든 그레고르의 등 뒤로 용의 둥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출입구를 완전히 봉한 채 그 안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며 지반을 무너뜨렸다.
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십 만 개의 개체로 갈라진 그레고르의 분신도, 조룡주가 남긴 조각들도.
그레고르를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자폭일 리는 없겠죠.’
하지만 그 남자는 살아남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럼, 눈치채고 쫓아오기 전에…….’
그레고르가 은신처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뚝.
그런 그레고르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죠……?’
그레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몸은 조룡주가 만들어 놓은 조각 중 하나였다. 걸작이라 부를 정도의 작품은 아니었어도, 조룡주는 작품 하나하나를 만들 때 타협하지 않는 장인이었다.
망가진 결함품을 만들어 낼 자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믿을 만했다.
그러나 그레고르의 다리는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쿵!
오른쪽 발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그레고르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왜 이런……!?’
움직이지 않는 몸이라고 해서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작은 벌레의 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런 몸으론 가혹한 마계의 환경을 오래 버텨 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도율의 혈액 샘플에서 뿜어내는 강대한 기운을 감당하려면, 조룡주의 조각 정도는 되는 그릇이 필요했다.
‘어서 자리를 피해야만 하는데……!’
그레고르가 초조하게 이를 깨물었다.
그렇게 꽉 깨문 잇새로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소리는?’
그레고르가 내는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해 버린 듯한 감각이었다. 몸을 의도대로 제어한 게 아니었다.
빼앗은 몸,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 그레고르에게 있어선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설마……!’
그레고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런 두 눈의 오른쪽 동공이 맹금류의 것처럼 길게 찢어졌다.
“내가… 말했지.”
그레고르의 오른팔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 몸에…….”
“그…, 그만두십시오!”
그레고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직 의식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강한 생명력에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이대로라면 우리 둘 모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본거지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 둘 다……!”
그러나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 라크자르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작은 사념에 불과했다.
“손대지 말라고!”
콰직!
라크자르의 오른손이 왼편 가슴을 꿰뚫었다. 심장을 파괴하자 마나 코어가 안정성을 잃고 흩어졌다.
“커억……!”
그 몸을 공유하고 있는 그레고르 역시 무사할 순 없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쓰러진 라크자르의 몸과 함께, 그레고르의 의식 역시 소멸했다.
* * *
“끝났군.”
도율이 거대한 잿더미를 올려다봤다.
그곳엔 본래 용의 둥지라 불리던 장소가 있었다. 그 안에는 조룡주 라크자르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들이 남아 있었고, 그레고르 역시 침입했었다.
그러나 도율이 완전히 태워 버리고 난 후엔, 검게 그을린 봉우리만이 남아 있었다.
‘용의 무덤이군.’
라크자르가 남긴 유산들까지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장례라고 생각하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자신의 작품을 누란주가 훔쳐 쓰지 못하도록 부숴 달라는 것이 라크자르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으니.
마지막으로 도율이 무덤에서 떨어진 장소에 쓰러져 있는 조각까지 발견했다.
“자멸했나.”
도율의 기감은 그 존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조각은 스스로의 핵심을 파괴하고 기능을 정지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라크자르의 의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레고르의 존재는 이로써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주대현이 말한 사도의 수는 다섯. 그리고 지금까지 쓰러뜨린 수가 총 넷이었다.
‘남은 건 하나.’
최종전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쪽 전력은…….’
누란주 그레고르가 풀어놓은 혈귀공 때문에 상당히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듣긴 했으니. 어쩌면 그들이 큰 전력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세케르도…….’
세케르 역시 성각주 아스텔라와의 전투에서 마력을 크게 소모했다.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그 외에 청진명을 비롯한 다른 헌터들 역시 만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자가 있었다.
이 마계 원정을 처음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던 남자. 주대현이었다.
처음 맞닥뜨린 수월주와의 전투에서도, 그 이후 이어진 성각주와의 전투에서도. 주대현은 힘을 크게 소모하는 일 없이 적당한 대응만을 선택해 왔다.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도율 역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상대, 장서주를 대비해 남겨 놓은 것이리라.
“일단 합류할까.”
장서주와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주대현과 만날 필요가 있었다.
당장 전력이 될 만한 사람도 떠올랐다. 전투엔 익숙하지 않지만, 요기를 터득한 백우진 역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 도율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다.”
익숙하게 들어온 목소리. 도율은 곧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주대현이었다.
주대현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모시옷 같은 얇은 생활 한복 한 벌 차림으로 나타났다. 온갖 위협이 도사리는 마계에 어울리는 차림이라 보긴 어려웠다.
도율 역시 번쩍이는 갑옷으로 몸과 머리를 보호하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정장 한 벌에 맨손으로 왔으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혼자 왔나?”
혈귀공의 습격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아직 남은 일행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엔 도율과 주대현, 두 사람만이 있었다.
“그래.”
“다른 이들은?”
“마지막은 너와 나만 간다.”
주대현의 말에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놀라지는 않았다.
마지막 사도, 장서주.
그를 상대로 다른 이들을 모두 이끌고 가는 게 유의미한 행동이 아니란 것은 지금까지의 전투를 통해 충분히 배웠다.
‘역시 그래서 지금까지 뺀질이처럼 힘을 아꼈군.’
다른 사도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도율은 피치 못하게 전투에 임했지만, 주대현은 장서주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괜찮나?”
도율의 물음은 자신과 주대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도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들, 습격을 당해 약해진 일행들을 마계 한복판에 내버려 둬도 괜찮냐는 의미였다.
주대현이 대답했다.
“염려 마라. 세케르도 있고, 다른 녀석들도 손가락 빨고만 있진 않을 테니.”
몬스터 무리의 습격이 있다고 한들 쉽게 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렇군.”
“게다가 각자 싸우고 있을 생각도 품지 못할 거다. 이번 전투에 두 세계의 명운이 걸려 있으니, 모두 숨을 죽이고 결과를 지켜보겠지.”
“그건 부담스러운데.”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건 도율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힘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귀찮은 일을 겪은 건 무림 세상에서의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족이 있는 현대에서도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주대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그렇단 거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힘의 흐름을 쫓는 것일 테니 신경 쓰진 마라.”
“그래, 좋아.”
그러자 주대현이 다시금 대화를 주도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뭐지?”
도율이 주의를 기울이자 주대현이 설명했다.
“우리가 지금부터 싸울 자, 장서주 아즈모디아의 강함에 대해서다.”
“…….”
“지금까지 사도와 싸우며 어땠지?”
뒤늦은 보고 시간이었다.
도율 혼자 싸우게 두고 뒤에서 손가락만 빨던 주대현이었지만, 거기에 대고 섭섭하다고 아쉬운 소리나 할 때가 아니었다.
“수월주는 환각이 까다롭긴 했지만 본체는 별거 아니었지.”
오히려 파괴력만 놓고 본다면 그녀의 오른팔에 달려 있던 폭탄이 더욱 위협적이었다.
나중에 라크자르에게 들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 오른팔은 도율에게 상처를 입고 라크자르에게 잃은 후 누란주가 만들어 준 의수였다.
처음부터 수월주를 폭탄을 터뜨릴 미끼로 삼은 것이었다.
‘사도란 것들도 참 콩가루 집단이군.’
도율이 이어서 대답했다.
“조룡주는 내 힘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조각을 빚는 능력을 갖고 있었지. 덕분에 제법 애를 먹었다. 누란주는 다른 존재들을 조종하는 힘을 갖고 있어서, 둘이 협력했다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도 조룡주와 누란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룡주는 누란주와 협력하는 대신 혼자 힘으로 맞서 싸우는 걸 선택했고, 누란주는 그런 조룡주가 죽는 순간을 기다려 그의 유산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조룡주의 유산은 단순한 물건이 아닌 그의 육신 그 자체. 거기에 남은 사념으로 인해 두 사도가 공멸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몰래 분열하고 온갖 신체에 기생하는 누란주를 일일이 찾아 없애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성각주는… 내가 직접 쓰러뜨린 게 아니라 모르겠지만. 화력만으로는 그 세케르를 웃도는 듯했고.”
성각주와의 전투에선 넓은 장소와 많은 인원들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새하얀 별빛과 시커먼 어둠으로 대지를 포격하는 성각주의 힘 앞에서,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자들은 모두 단순한 먹잇감에 불과했다.
하늘을 휘저으며 열기의 검을 휘두르던 세케르가 잠깐 몰아붙일 수 있었지만. 그조차도 성각주의 함정에 빠져 한 차례 무력화당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잘 해결돼서 다행이군.’
도율이 사도의 기운을 쫓아 성각주를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왔을 땐, 이미 전투에서 승리한 세케르와 동료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샤디아와 클레어가 손을 잡고 세케르를 도우러 갔다는 건 의외였지만.
“그런데 그런 건 왜 묻지?”
이제 와서 승리의 여운에 빠져 보자는 감상적인 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었다. 마지막 전투를 앞에 두고선 더더욱.
주대현이 이 이야길 꺼낸 것에는 모두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다른 사도들을 상대했던 감각을 모두 떠올려 둬라.”
“왜?”
주대현의 말에서 도율은 한 가지 생각이 번득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이 사실이리라 믿고 싶지 않았다.
도율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설마… 아니지?”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도율의 말에 주대현이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이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장서주는 다른 소멸한 사도들의 힘을 거둬들여 사용할 수 있다.”
“…….”
그렇다는 말은. 장서주 한 명을 상대하는 건 곧 다른 사도들 전체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란 뜻이었다.
주대현의 말에 도율이 이마를 짚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냐…….”
거짓말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