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눈을 떠라
“명경지수(明鏡止水).”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 볼 수 없기에, 고요한 물에 얼굴을 비춰 본다.
고요한 물이 비추는 것은 파문으로 일그러진 세상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온전히 비추는 맑은 거울.
도율의 정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즈모디아의 지배력이 닿지 않았다.
“잔재주를……!”
마음을 흔들지 않으면 그 어떤 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잔재주는 네가 부리려 했던 거 아닌가?”
“오만방자한 놈.”
아즈모디아가 도율의 주위를 에워싼 저주의 손길들을 모두 물렸다.
윤회에 종속된 중생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게 가장 적은 소모로 도율을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내키지 않지만, 결국은 도율과의 전면전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 계획에 지장을 초래하다니……!’
아즈모디아에게 있어서 마력은 하나의 계획을 위해 필사적으로 모았던 것들이었다. 가능하면 전투에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남자를 내버려 두고는 계획을 수행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테니. 필요한 절차였다.
예상 이상의 손해.
더욱 큰 손해가 발생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뿌리를 뽑아야 했다.
“내가 힘으론 널 못 당할 거라 생각했나?”
아즈모디아의 손아귀에 창이 날아왔다.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모양의 창. 바이던트였다.
쿠구궁!
땅이 갈라지며 다시 한번 용암의 물결이 솟구쳤다. 그러나 강물을 이루었던 이전과 달리, 용암은 한 점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바이던트의 갈라진 창날 가운데 붉은 구슬이 떠올라 있었다. 그 안으로 지옥의 강물이 계속해서 빨려 들어갔다.
아즈모디아가 사제의 의복처럼 보이던 검은 의상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검은 천자락이 망토와 같이 풀리고 그 안에 숨겨진 갑옷이 드러났다. 회색빛을 띄고 있던 재질은 용암이 채워지는 것처럼 점점 붉은빛이 차올랐다.
아즈모디아가 창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 위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투구의 바이저가 그의 눈을 가렸다.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 주지.”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도깨비 감투로군.’
아즈모디아가 투구의 바이저로 눈을 가리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율의 내공 역시 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뒤져 봐도 아즈모디아의 위치를 예측할 순 없었다.
신물의 힘을 사용했다면 단순한 감지 능력으론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무적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어도 도율의 마음은 고요했다. 침착하게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투를 쓰고 모습을 숨겼다 해도 공격하는 순간엔 그 기척이 드러라리라.
부웅!
도율의 등 뒤로 창날의 궤적에 따라 마력의 흔적이 남았다. 강대한 공격을 하려면 그만큼의 여파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감투가 숨겨 주는 건 아즈모디아 자신이었지, 공격에 따른 모든 변화까지 숨길 순 없었다.
‘여기다!’
도율이 곧바로 반응해 창격을 상쇄했다.
모습을 숨기는 것 따윈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한 결과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이 주위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과, 그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재빠른 반응속도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과연.”
첫 기습이 허사가 되었다고 해서 아즈모디아가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했다.
아즈모디아가 정면에서 나타나 도율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도율이 창날을 빗겨 냈다.
‘이건……?’
그러나 도율의 손끝에 전해지는 반발이 거세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아즈모디아는 도율의 등 뒤로 넘어갔다.
도율의 등 뒤에서 아즈모디아는 곧바로 창을 휘두를 것처럼 자세를 잡았지만.
휙!
곧바로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그 직후 도율의 사각으로부터 공격이 날아들었다.
“나 참……!”
그조차 반응하고 막아 냈다.
“귀찮게도 구는구만.”
일단 저 투구부터 부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사이.
‘창……?!’
도율의 눈앞에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즈모디아가 들고 있던 바이던트였다.
왜 이제 와서 투창을 하는 것인지. 도율이 창을 붙잡아 막으려던 순간, 아즈모디아가 단순히 창을 던져 공격할 생각이 아닐 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도율이 내공을 가득 퍼올렸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으리라 직감했다.
콱!
날아드는 창을 도율이 한손으로 막아 세웠다. 아무리 내공을 둘렀다 해도 그만으론 충분하지 않아 피가 튀었다.
양손으로 충분히 대비를 했다면 상처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여력을 남겨 둬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아즈모디아의 손가락이 도율의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아륜(牙輪)!’
도율이 반대쪽 손으로 아즈모디아의 공격을 맞부딪쳤다.
콰득!
동시에 두 곳에서 이루어지는 공격. 한쪽은 모습을 숨겨 함께한다는 것을 알 수 없었지만, 숱한 전투를 헤쳐 오며 갈고 닦은 육감이 비밀을 밝혀 주었다.
다소 손해는 있었지만, 아즈모디아의 회심의 일격을 막아 냈다.
마력의 소모가 극심했는지, 아즈모디아가 투구의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창이 되돌아가 있었다.
“힘으로 당해 낸다고 하지 않았나? 발바닥에 불나겠어.”
“갑자기 말이 많군. 상처를 회복할 시간이라도 필요한 건가?”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도율의 내공이 한 바퀴 흐르자 손바닥의 찢어진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육체에 입은 타격도 금방 고요하게 멎어 들었다.
“인정하마.”
그 모습을 본 아즈모디아가 창을 똑바로 세웠다.
“효율 따윌 생각해선 널 쓰러뜨릴 수 없단 사실을.”
도율은 내공의 흐름이 이어지는 한 계속해서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도율을 상대하기 위해 아즈모디아 역시 도율을 단숨에 짓누를 만한 일격을 준비해야 했다.
불가능하진 않았다.
‘마력이라면 충분하다.’
계획을 위해 긁어모아 둔 마계의 마력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도들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모았던 것들이었다.
이 공격에 마력을 모두 쏟아붓고 나면, 긴 계획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방해물을 치우는 게 먼저였다.
우우웅.
아즈모디아의 창 앞에 붉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창과 갑옷에 스며들었던 용암 역시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소모되었다.
소모한 마력에 비례해 무한한 위력을 선사하는 최강의 공격.
“라그나로크.”
멸망을 부르는 빛의 줄기가 도율을 향해 뻗어 나갔다.
‘…….’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이었다. 직격으로 당했다간, 명경지수를 발휘한 도율이라 해도 다시 몸을 회복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운 파괴력.
그 위력이 너무나도 강력해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까딱하면 저쪽에도 영향이 가겠군.’
정면에서 위력을 죽여 둘 필요가 있었다.
도율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도율은 홀로 싸워 왔기 때문에 강한 기술을 정면에서 깨부술 시도는 하지 않았다. 피하면 그만이니까.
덕분에 생소한 행위였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흑응공(黑凝工).”
도율의 손아귀 위로 검은 점이 솟아났다. 그 점 속으로 아즈모디아의 창이 뿜어내는 막대한 에너지가 빨려 들어갔다.
끝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구멍.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는 듯, 금방 가득 찬 것처럼 더뎌지고 말았다.
‘아직……!’
아즈모디아의 공격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 흡수한 걸론 한참 모자랐다.
도율이 가진 내공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마계 전역의 마력을 끌어모은 아즈모디아의 일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끝이다!”
아즈모디아가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도율이 예상보다 더 잘 버티는 탓에 단 하나의 여유도 남겨 두지 못하고 모두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성과인지 진척이 없던 공격이 조금씩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도율의 손에 맺힌 검은 구슬이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는 소리를 냈다.
라크나로크가 마침내 온 대지를 뒤덮었다.
* * *
“후…….”
아즈모디아가 긴 숨을 내뱉으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 위로 늘어졌다.
마지막 남은 마력까지 쥐어짜 낸 일격이었다. 몸을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은…….’
그가 세웠던 긴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이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그에게는 가장 익숙한 일이었다.
“……?”
그런 그의 귀에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흐름. 거대한 물줄기가 고요하게 흐르면서도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도율은 아즈모디아가 쏘아 낸 막대한 에너지를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 짓눌려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도율이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 떠오른 두 개의 검은 기공 사이로 거대한 힘의 흐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력이…….’
원을 이루며 흐르는 마력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도율이 붙잡아 놓은 마력은 그가 계속해서 흘려넣는 내공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거대한 힘을 조금씩 중화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도율은 지금 거대한 마력을 제어하고 내공을 운용하느라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공격한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모든 마력을 쏟아 낸 아즈모디아 역시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바이던트.”
간신히 불러낸 창을 쥐고 아즈모디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내질렀다.
챙!
“……!”
그러나 창날이 도율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도율의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가 칼날로 아즈모디아의 창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 클레어.
그녀가 도율과 아즈모디아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었다.
클레어의 오른쪽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진실을 비추는 눈동자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명확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도율을 지키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라는 사실까지도.
“결국…….”
아즈모디아가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다. 장막처럼 펼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군.”
클레어의 눈에는 틀림없이 비치고 있었다.
장서주 아즈모디아가 제아무리 강대한 사도라고 한들, 그가 가지고 있던 마력을 대부분 소진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클레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도율 씨는…….’
도율은 커다란 힘이 폭발하지 않도록 다루느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즈모디아가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머뭇거림이 없었다.
“무의미한……!”
클레어가 아즈모디아의 창을 쳐냈다. 아즈모디아의 몸이 매가리 없이 뒤로 밀쳐져 나뒹굴었다.
‘떨어뜨려 놔야 해.’
도율은 지금 극도의 집중이 필요한 상태였다. 아즈모디아가 자그마한 균열이라도 만들게 둘 순 없었다.
클레어가 멀리 떨어진 아즈모디아에게 달려들었다. 여차하면 자신이 사도를 끝장내리란 생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자비심을 가질 정도로 무르진 않았다.
아즈모디아는 죽음을 받아들이듯이 다가오는 클레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클레어가 가까워지자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눈을 떠라.”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