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고작 수십 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클레어 컴벨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의 신분은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족이나 친지 관계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숨기고 싶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무 자세히 파고드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10년 전.’
무림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내온 도율에게는 단순히 10년 전이 아니었기에, 기억이 흐릿해진 탓이라 여겼지만.
도율이 클레어를 구하고 대신 차원문에 빨려 들어갔을 때, 클레어는 분명히 어린아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도은이보다 나이가 많은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거기에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인격인 건가.’
교묘하게 기억을 바꿔 끼운 채로 지금의 클레어가 된 것이었다.
“……왜지.”
도율이 세레나에게 물었다.
“왜 사도인 네가,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 행세 따윌 한 거지?”
도율의 물음에 세레나가 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눴다.
“내 특기는 이 안에 든 걸 다루는 거야.”
요정주. 그 말은 정신을 다루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세레나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장서주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듭해 쌓아 올린 마력이 발현해 내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을 살아온 세레나조차 불가능한 것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은 잘 다루기가 어렵다는 거지.”
그게 문제였다.
행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심리나 감정을 읽어내도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을 지배할 순 없었다.
약육강식의 원칙이 지배하는 땅, 마계에서는 크게 알아야 할 감정이 많지 않았다. 긴 세월을 살아남으며 세레나는 모든 감정에 대해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외가 나타났다.
“사랑.”
세레나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걸 모르겠더라구.”
척박한 마계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품는 별종은 없었다. 아즈모디아, 그 자만 아니었더라면.
-모르겠다고?
-그래.
아직 세레나가 요정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의 일이었다.
-아즈모디아. 네가 왜 그 한 줌 만도 못한 여자에게 그리 목을 매는 거야?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 그럼 얼른 죽이지 않고 뭐 해? 입을 막아야지.
-…….
-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어.
아즈모디아는 그렇게 말하는 세레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너도 이해하는 날이 올 거다.
하지만 세레나는 그 후로도 아즈모디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으로 빼앗고, 힘으로 짓밟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아즈모디아가 규율을 세웠다. 힘이 아니라 말을 설파하며 피와 죽음에 물든 땅을 가꾸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에, 아즈모디아는 그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길 바란다고 답할 뿐이었다.
-이해가 안 돼.
여전히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레나는 그런 변화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도 강한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여자는 가혹한 마계의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즈모디아는 변했다.
아즈모디아는 사랑하던 연인이 죽자 그녀를 되살리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시기였다. 아즈모디아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규율과 설법을 짓밟고, 마계에서 강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사도의 이름을 부여한 것이.
-완전히 미쳤어.
세레나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랑에 빠진 자란, 고작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간단히 미쳐 버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죽음이 흐르는 물처럼 당연했던 세상에서도.
다른 이들도.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려웠다. 그 감정의 힘이.
‘두렵다면, 알아야지.’
공포는 미지에서 온다. 사랑을 모르는 것이 두렵다면, 사랑을 알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세레나가 손가락을 뻗어 도율을 가리켰다.
“너에겐 감사하고 있어.”
도율과의 경험으로 세레나는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클레어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확실히 세레나에게 있어서 신선한 경험 그 자체였다. 그 상대가 도율이 아니었다면 이끌어내는 게 불가능했을지도 몰랐다.
덕분에 감사하고 있었다. 미지를 밝히는 동반자가 되어 준 점에 대해서는.
“좋았어. 운명의 상대…… 같은 연출.”
세레나가 가느다랗게 미소 지었다.
10년 전의 인연과 운명적인 재회. 그마저도 그녀의 손길이 닿은 영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바스러진 상황 속에서, 도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려줘.”
도율이 세레나를 향해 말했다.
“클레어를, 돌려줘.”
그런 도율의 말에 세레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핀잔을 줬다.
“글쎄 내가 클레어래도 그러네.”
도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세레나가 기억과 마력을 봉인하고 인간 행세를 한 것이라 하더라도, 도율이 아는 클레어라는 여자와 눈앞의 사도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레나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도율 씨.”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어서, 도율도 귀를 의심했다.
그런 반응에 세레나가 짓궂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어때? 똑같지?”
“너…….”
도율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 * *
도율이 내공의 불씨를 틔워올렸다.
뜨거운 내공이 전신을 휘감았다. 가뜩이나 아즈모디아의 일격을 받아 내며 대부분의 내력을 소진하고 말았지만, 소모나 한계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건 눈앞의 상대가 마지막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핫. 공격하려고?”
세레나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마음껏 해 봐.”
세레나는 저항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팔을 벌렸다.
도율은 대부분의 내력을 소모한 채였다. 아무리 쥐어짜 낸다 하더라도 지금의 세레나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순 없었다.
마력을 봉인한 채로 인간으로서 상당한 수준까지 마력을 키웠던 덕에, 세레나가 가진 마력은 마치 두 개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힘이 넘쳤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 외의 수확이었다.
“…….”
모처럼 쥐어짜 낸 내력인데도 도율은 섣불리 세레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저게 클레어와 다른 존재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같은 몸을 쓰고 있다 한들 별개의 인격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긴 시간 동안 완전히 속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왜…….’
하지만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퍼억!
세레나가 도율의 허리를 걷어찼다. 작게나마 대계를 펼치고 있던 도율이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큭……!”
세레나가 그런 도율의 가슴팍 위로 발을 올렸다.
“왜? 못 하겠어?”
갈빗대가 나간 건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충분한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명경지수를 펼쳐 모든 공격을 고요한 물잔과 같이 만들었다면 입지 않을 상처였다.
그러지 못한다는 건 도율의 마음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너한테 악감정은 없지만.”
세레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도율에게 감사는 하고 있지만. 앞으로를 위해 지금 도율을 처리해 둬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감정이란 이용하고 읽어 낼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그렇게 세레나가 도율을 끝장내려는 순간.
세레나의 오른팔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덜컥하고 멈췄다.
“아니……?”
의아하게 바라보던 세레나는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금의 세레나에 필적하는 강함을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에게 간섭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같은 몸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인격 뿐이었다.
압도적인 마력으로 완전하게 먹어 치웠다고 생각했지만. 클레어가 각성자로 활동하며 독자적으로 쌓아 온 마력 역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너어……!”
세레나가 외쳤다.
“방해하지 마!”
[그 몸은.]잠재워 놓은 줄 알았던 클레어의 인격이 눈을 떴다.
기억과 마력을 공유한다는 것은 세레나가 곧 클레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클레어가 곧 세레나라는 뜻이기도 했다.
[제가 쓰던 거예요.]주도권을 좌우한 건 신체의 반응이었다. 제아무리 세레나가 의도한 것이라 한들, 세레나가 잠든 동안 몸을 차지하고 있던 건 클레어였다.
클레어가 의식을 되찾자 몸은 익숙한 주인을 선택했다.
“돌려받겠어요.”
[얘!]클레어가 몸을 차지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클레어 씨.”
도율 역시 자신이 알던 클레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폐부가 쑤셔서 말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모든 걸 소진한 상태여서 회복을 바랄 수도 없었다.
도율이 간신히 말을 쥐어짜 냈다.
“돌아갑시다.”
클레어의 내면에는 여전히 세레나가 갇혀 있었다.
그것을 언제까지고 가두고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도 잠들지 않고 가벼운 유리막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클레어는 세레나로부터 파생된 일부였으니, 결국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결국 현대에 사도가 강림하고, 큰 혼란과 재앙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그 순간이 오면.’
사도를 해치울 만한 전력은 도율밖에 없었다.
세케르는 양쪽에 갖고 있던 황금안을 잃어 전성기의 출력을 내지 못하고. 주대현은 장서주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희생했다.
사도를 베어 본 클레어는, 그녀 자체가 사도의 씨앗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목숨을 끊어 줄 사람은…….’
역시 도율뿐이었다.
도율이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 버틴다면 큰 피해 없이 이 모든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클레어의 손가락이 도율의 뺨을 쓸었다.
‘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클레어를 제 손으로 끝장내고, 도율이 남은 세월을 후련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처음부터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고. 모두 세레나라고 하는 사도가 꾸민 연극에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고 치부하고, 가슴 한편에 밀어 두고 모른척할 수 있는 걸까.
클레어가 아는 도율은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다가 침대 위에서 죽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클레어가 도율과 이마를 맞댔다. 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장막처럼 주위를 가로막았다.
세레나가 할 수 있는 건 클레어도 할 수 있었다. 정신과 기억의 조작. 내력을 모두 소진해 텅 비어 있는 도율에게라면 가능했다. 오른쪽 눈에 깃든 황금안의 보조가 있었다.
도율이 더는 싸움 따윌 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기억을 덧씌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와의 기억도.’
처음 만났던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 가서 싸움만 하다 간신히 돌아온 것도. 그 후로 클레어를 만났던 것도. 둘이 함께 지내며 있었던 모든 일들을.
지웠다.
다른 기억을 채워 넣고, 그에 맞춰 다른 이들의 기억도 바꿔 놓아야 했다. 하지만 사도의 힘을 손에 지닌 클레어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마력을 퍼뜨릴 매개체들은 충분했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각성자들. 전세계에서 모인 그들의 몸에 마력을 몰래 심어 놓으면,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바꿀 수 있었다.
이들은 모든 사도를 쓰러뜨리고 귀환한 것이다. 위협은 이제 없다.
그런 결말로 만들어 놓으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간 후, 현대와 마계로 이어지는 문들을 모두 찾아서 단절시켜 놓으면. 그때야말로 완전한 끝이었다.
[꼼꼼도 하셔라.]세레나가 비아냥거렸다.
“……아직도 있었나요?”
[당연하지. 내가 너 따위한테 짓눌려 사라지기라도 할 줄 알았니?]클레어가 마력을 소모하며 세레나 역시 어느 정도 주도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대로 주도권 싸움을 시작해서 내면의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승리를 장담하기 버거웠다. 힘겨운 승리는 세레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관찰을 택했다.
[작전을 바꿨어.]“작전?”
[그래. 넌 아주 건방졌거든.]단순히 이기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네가 이 쓸쓸하고 황량한 세계에서 외로워하며 몸부림치는 걸 지켜보는 거야. 아아, 원래가 인간인 넌 아마 수십 년도 버티지 못하고 미쳐 버릴걸.]세레나의 말에 클레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십 년이라니. 과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도에겐 그 정도 시간은 눈 깜빡할 정도로 여겨질 만도 했다.
“그 말대로.”
아무리 괴롭다 한들, 죽을 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무뎌질 테니까.
“고작 수십 년.”
커다란 세계 속에 스스로를 유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