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59
259화 나은 건가
“어……!”
도율이 이불을 걷어차며 잠에서 깼다.
무언가 어떤 말을 하면서 깨어난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입가에 남은 모양만이 어렴풋이 맴돌 뿐이었다.
꿈이라도 꾼 건지.
‘잠꼬대였나……?’
어쩐지 미련이 남았지만, 도율은 금세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지.’
얼마 전 병원을 다녀왔다.
-일시적인 기억 장애입니다.
의사의 소견은 그랬다.
왠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위화감을 느끼는 일도 잦았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았다. 인맥과 거금을 들인다면 힐러한테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휴식과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예상했다.
거실로 나오자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듬뚝 들어오고 있었다. 무심결에 손등으로 눈을 가릴 정도였다.
‘한쪽 벽면이 다 유리창이니…….’
층수가 높은 탓에 가까이 가면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무슨 세트장도 아니고.’
도율이 팔짱을 끼고 드넓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깔끔한 펜트하우스였다. 층고도 높고 새하얀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혼자 사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넓기까지 했다.
방도 몇 개나 있고. 화장실도 두 개 이상이고. 드레스룸이라는 필요를 이해할 수 없는 방까지 딸려 있었다.
‘진짜 내가 이런 집을 샀다고?’
도율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이런 집을 덜컥 계약할 것 같진 않았다. 능력보다는 취향의 문제였다. 같이 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런 넓은 집을.
툭툭.
생각에 잠긴 도율의 다리를 건드리는 건 새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흰돌이. 이 집에서 도율이 키우는 개였다.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것도 왠지 성격에 안 어울리는 듯했지만, 옛날의 자신이 선택했다니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흰돌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끙끙거리며 머리로 다리를 가볍게 들이받았다.
“배고프냐?”
도율이 사료가 있는 찬장의 문을 열었다. 거기에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여기 고양이 사료는 왜 있는 거야?’
이전에는 고양이라도 키웠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굳이 건드리지 않고 개밥그릇에 사료를 담았다.
“옛다.”
밥그릇을 갖다줘도 흰돌이는 곧바로 입을 대지 않았다. 달리 원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뭔데?”
개치고는 상당히 똘똘한 놈이었다. 화장실도 혼자 가릴 줄 알고, 혼자 텔레비전을 켜서 보고 있기까지 했다.
혹시 펜을 입에 물려 주면 글도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그때 폰이 울렸다. 동생인 도은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백수! 컴 히어.]호출이었다.
* * *
“뭔가 했더니…….”
도은이의 부름에 따라 내려가 보니 차를 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얌전히 올라탄 후에 데려간 곳은 백화점이었다.
쇼핑의 짐꾼으로 써 먹겠단 것이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희가…….”
“아뇨, 괜찮습니다.”
사과한 건 도은이와 함께 있는 여자였다. 시원스런 인상에, 부잣집에서 자란 듯 귀티가 흐르고 있었다.
‘주예린 씨라고 했던가.’
도은이를 고용한 사장님이었다.
고용이라고 해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스케줄 관리, 외부 업체 미팅, 콜라보레이션 및 광고 상품 검수 등등.
모두 정리해서 한마디로 매니저라고 퉁치고 있다고 들었다.
업무 측면 외에도 죽이 잘 맞는지, 휴일엔 둘이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어디 구경 가거나 하면서 놀곤 했다.
“근데 난 왜 불렀냐고.”
“왜? 그럼 연약한 동생이 팔 빠지도록 무거운 짐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다녔음 좋겠어?”
“야, 그러는 나는…….”
그렇게 말하려던 도율이 입을 닫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지만, 몸은 꽤 좋은 편이었다.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한 건지.
“뭐, 아무튼. 너네 다른 직원들도 있잖아. 힘 쓰는 남자 직원도 있지 않나?”
“오늘 휴일이잖아. 휴일에 그 사람들 불러내면 갑질이지.”
“너가 나한테 하는 건 갑질이 아니고?”
도율이 불평을 토할 기색을 보이자 도은의 신세 한탄이 시작됐다.
“아이고. 나 옛날에~ 초일류 대기업 중의 대기업에 붙었는데. 어떤 놈이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헌터 매니저는 안 된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도은이 도율을 째려봤다.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라고 한다면 대현 그룹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은이 붙었다고 하는 건 그중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대현 길드.
거기에 헌터 매니저로 취업할 수 있었는데 도율이 말렸다는 것이었다.
역시 기억에 없었다.
‘근데 이건 내가 할 법한 말이야.’
이 얘기를 꺼내면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고.”
도율이 숙이고 들어가자 도은과 주예린이 몰래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다른 사람도 있어서요.”
“다른 사람…… 말입니까?”
누구지?
도율이 의아하게 답하는 사이, 주예린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을 텐데……. 아, 저기다!”
주예린이 손짓하며 불러낸 건 그녀의 동생인 주하린이었다.
주하린은 낯을 가리는 건지 실내인데도 모자 챙 같은 걸 푹 눌러쓰고 등장했다. 주춤거리며 다가오자, 주예린이 어깨를 붙잡고 도율의 맞은편에 세웠다.
주예린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이쪽은 이도율 씨. 우리 매니저 도은이네 오빠. 그리고 이쪽은 뭐, 입 아프게 설명해서 뭐 해. 우리 주하린 길드장님. 둘이 몇 번 봐서 알죠?”
“네.”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큰 병원에 유명한 의사에게 검사 받을 수 있게 해 준 것도 주하린 덕분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새삼스럽게 인사할 것도…….”
콱!
도은이 도율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아니, 인사해야죠. 인사 중요하죠……. 이도율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아, 예.”
“네.”
화제가 이어지지 않아서 적막이 흘렀다.
‘이건 뭐, 초등학생들 싸운 거 강제로 화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쭈뼛대는 인사 직후. 도율이 이제는 익숙해진 위화감을 느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편하게……요?”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올려다 보는 주하린에게, 도율이 자세히 설명했다.
“야, 라고 부른다거나. 반말을 한다거나.”
왠지 그게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네……?”
하지만 주하린은 아리송한 얼굴로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관계를 따지고 보면 주하린에게 도율은 언니의 회사 직원의 오빠. 나이로 쳐도 연상인 상대방에게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었다.
도은이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도은이 두 사람 사이를 떨어뜨리며 도율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이거 NG다. 존나게 NG다. 갑자기 뭐야? 오빠 변태야?”
“아니, 난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뿐인데.
다시금 돌아보면 변태라고 오해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 * *
“가자. 태워 줄게.”
쇼핑이 끝나고, 많았던 짐들을 각자의 차에 싣고 난 후. 도은이 조수석에 앉으라며 턱짓했다.
“알바 갈 거지?”
“가야지.”
벌써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 시간부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돈이 궁해서 하는 건 아니었지.’
돈이 모자랐다면 애초에 그 넓디 넓은 펜트하우스부터 내놨을 거다. 그런 집을 갖고 있는 데다가, 통장에도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최저 시급에 가까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건 이유가 있었다.
“대단하긴 하다, 정말. 언제는 요리 수련을 하겠다고 훌쩍 비행기 타고 날라서 연에 한두 번 연락을 할까 말까 하더니, 돌아온 후에는 현지 식당 감각을 알아야 한다고 아르바이트를 다 하고.”
“내가 그랬다고…….”
“어. 그래. 네 얘기예요, 네 얘기.”
도은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내뱉는 저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 도율이었다.
지금 자신이 들어도 상당히 무모한 모험이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요리라면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배울 것이지, 뭣하러 외국 땅에 나가서 직접 깨지며 배운다냐. 아니면 차라리 정식으로 유학이라도 가던가.
배낭 하나 메고 유랑을 다녔단 이야기는 아직도 거짓말 같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도율의 아버지도 요리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었다. 도은이가 성인이 된 직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자 운전대를 잡은 도은이 곁눈질했다.
“뭔 개소리여. 울 아빠 요리 때문에 나가 있는 거 아닌데.”
“……아니라고?”
“어.”
도율이 도은을 쳐다봤다. 도은은 어느새 다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뭇 운전자들의 귀감이었다.
“그럼 뭐 때문인데?”
“엄마 찾으러 간 거잖아.”
“…….”
도은의 말에 도율은 말문이 막혔다.
도율의 어머니는 가정보다 일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외국 헌터와 계약할 기회가 있다고 떠나 놓고선, 어린 도율과 도은을 두고 돌아오지 않았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었기 때문인지 도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지만. 도율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도율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 근처에 도착했다. 주위로 먹거리와 놀거리가 늘어선 번화가였다.
“내려. 오래 대고 있음 욕 먹어.”
“그래.”
도율이 차에서 내리자 도은이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오빠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아빠는 오래 참았잖아. 알지?”
도율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가정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에겐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걸까.
도율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호흡을 내뱉었다.
“그래, 알아.”
빵빵!
그 순간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도은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이~ 저 새끼가 진짜. 간다고, 가! 오빠! 나 진짜 간다.”
“들어가라.”
도은이 탄 차를 보내고 도율이 익숙한 가게에 들어섰다.
아르바이트 출근이 처음은 아니었다.
저녁 장사를 주로 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기보단, 안주에 술을 파는 집이었다. 튀김이나 직화 꼬치를 안주로, 생맥주를 만들어 파는 집이었다.
“오셨어요?”
놀라운 건 이 집 사장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란 점이었다.
이름은 서지유.
‘경력으로 보면…….’
실제론 성인이 되기 전부터 가게를 돕고 있었던 것 같았다. 술집에서 그래도 되나 했지만, 전 사장이 그녀의 아버지였다.
“도와줄 건?”
“손질은 아버지랑 이미 다 해 놨죠. 그보다, 피크 타임 알바면서 미리 와서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요.”
“공부 삼아 하는 거래도.”
“도율 오빠도 가게 차리는 게 꿈이랬죠?”
도율이 간지러워 뺨을 긁었다.
“오빠 말고 아저씨라고 부르라니까.”
“전부터 그러시네. 왜요? 나이도 그렇게 안 많으면서.”
“원래 네 나이 땐 군대만 다녀와도 다 아저씨 아니냐?”
“그 정돈 아녜요.”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오픈 시간이 다가왔다.
가게는 나름대로 인기가 있어서 정문 앞에 오픈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몇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인파를 눈치챈 서지유가 도율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시작합시다, 아저씨.”
“그래.”
도율의 담당은 주방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이 요리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려 그걸 위해 배낭 하나로 외국을 떠돌기까지 했으니. 그 실력은 확실히 몸에 배어 있었다.
그렇게 불과 기름 앞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와중.
쨍그랑!
홀 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도율이 손을 닦고 나가보니 손님 중 하나가 잔을 깨뜨린 모양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아요. 안 다치셨어요?”
술집에선 으레 있는 일이었다. 서지유는 능숙하게 웃으며 대처했다.
“내가 치울게.”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는 서지유를 뒤로하고 도율이 청소 도구를 가져와 깨진 잔을 치우고 바닥을 닦았다.
깨진 유리는 쓰레기 봉투가 찢어지지 않도록 신문지에 싸서 버리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렇게 도율이 따로 처리를 하던 도중.
“아.”
손가락에 따끔하고 고통이 번졌다.
“베였어요?!”
도율의 목소리를 들은 서지유가 헐레벌떡 달려와 물었다.
“아니,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봐 봐요!”
서지유의 닥달에 도율이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서지유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렇다니까.”
“조심하세요.”
“알았어.”
서지유를 보내고 도율이 몰래 앞치마를 살폈다. 구석진 자리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분명히 상처가 낫었는데…….’
서지유에게 보여 주기 전, 피라도 지우기 위해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피가 배어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서지유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도율이 다시 손을 들여다봐도 상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통을 겪었던 것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나은 건가……?’
무언가 꺼림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