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내가 그 남편이다, 이 새끼야
“실패했다고? 쓸모없는 자식.”
백우진이 보고를 마치자 백건영이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냈다.
백건영이 지시한 불카누스 신제품 계약 건. 실제 꿍꿍이는 달랐지만, 표면적으로는 길드의 복지와 추후 장기적인 장비 조달을 위한 거래처 확보였다. 충분히 비난할 만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폭언과 모욕을 일삼는 건 변하지 않았겠지만.
백우진은 말이 안 통할 걸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죽은 형님의 얼굴을 봐서 부길드장 자리에 앉혀 놨더니 똑바로 하는 일이 없군. 됐어! 나가서 일 봐.”
“예.”
백우진이 고개를 숙이고 길드장실을 나서자 문밖엔 백건영의 아들 백우섭이 있었다. 그에게는 사촌 동생 되는 남자였다.
또한 플레이아데스 소속의 계약 헌터로 활동하고 있는 각성자이기도 했다.
길드장에게 용건이 있어 여기까지 온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백우진을 따라 탑승했다.
엘리베이터가 가동되고 입구 반대편의 유리 벽 너머로 야경이 오르내렸다. 백우진이 정면을 향해 서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반면, 백우섭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형님, 또 혼났어? 아버지 호통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던데.”
“…….”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데, 우리 형님은 왜 이런지 몰라. 백부님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대영웅인데, 아들인 사람은 각성도 못 한 쭉정이라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백우진이 답했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이라는 말도 있지.”
“뭐?!”
그 말에 히죽거리던 백우섭의 입꼬리가 굳었다. 그가 분노에 물든 표정으로 백우진을 노려봤다.
“하, 드디어 미친 거야? 말대꾸를 다 하네?”
“미안하다.”
“뒤늦게 사과한다고…….”
“지금까진 사람 말로 안 들렸거든. 개 짖는 소리 좀 배우느라 대답이 늦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소리와 동시에.
쾅!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윽…….”
“그래도 사촌이라고 그 정도로 봐주는 줄 알아.”
근처에 있던 직원들이 큰 소리에 놀라 엘리베이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그들이 본 것은 백우섭이 인상을 쓰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등 뒤에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벽에 기댄 백우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우섭은 직원들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다. 부축 좀 해 드려라.”
금이 가고 핏자국이 묻어 있는 유리 벽. 그리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부길드장 백우진. 그 현장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는 백우섭을 보고도 그를 막아 세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우진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쭈뼛하게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결국 가장 어려 보이는 막내 직원이 백우진에게 다가갔다.
“저기…….”
백우진은 그런 막내 직원을 손바닥으로 제지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훑어 피를 닦아 냈다. 닦아 낸 후에도 피가 흘렀다. 별수 없었다.
백우진은 그대로 걸어 나가 길드의 사옥 바깥,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좁다란 곳이어서 누구 하나만 있어도 비좁아지는 장소였다. 그곳에 몸을 구겨 넣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드 돌아가는 꼴 한번 가관이군.”
하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 * *
경기도 인근에 위치한 A급 던전.
클레어 씨는 해당 던전의 공략을 위해 현장에 파견되었다.
던전은 게이트와 달리 균열 바깥으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도심지 근처에 위치한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은 급박한 기색 없이 여유롭게 장비를 점검했다.
현장에는 공략을 위해 모인 헌터들과 그들을 서포트하기 위한 매니저와 엔지니어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길드 소속의 한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차 타고 단둘이 온 건 나와 클레어 씨뿐이었다.
“위험하니까 안 따라와도 된다니까요.”
“에이, 제가 없으면 누가 운전대 잡습니까?”
내가 손가락에 자동차 키를 넣고 돌리며 물었다. 클레어 씨는 그 말에 내심 동의하는 듯 별다른 반박이 없었다. 서울 내에서 이동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멀리까지 오는 데 자차가 없으면 불편하지.
그렇다고 클레어 씨한테 운전을 시켜? 차라리 아이를 물가에 내놓고 댐을 방류하는 게 더 안전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위험하긴요.”
클레어 씨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자 그녀가 어련하시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클레어 씨에겐 이미 내 힘의 일부를 보인 상태였다. 내가 던전에 들어갈 일은 없을뿐더러, 실수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공략대와 함께 행동하며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클레어 씨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남들한테 밝혀서 좋을 게 없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때 내가 시선을 느끼고 말했다.
“잠깐만 여기 계세요. 저 다녀올 데가 좀 있어서.”
“예? 어딜 가려고요.”
“아니, 잠깐만 요 근처에…….”
클레어 씨가 도끼눈을 뜨고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못 가요.”
“왜 이러십니까?”
“당신 전과를 생각해.”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했다. 클레어 씨는 내가 몰래 던전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밝히지 않는 게 그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정민성 씨가 아까부터 여길 힐끔거리길래, 얘기 좀 하고 올까 해서요. 같이 가시렵니까?”
“…다녀와요.”
클레어 씨가 땅 위에 다리를 단단히 뿌리내렸다.
역시 불편하구나.
나는 들키지 않게 정면으로 다가가지 않고 한 바퀴 돌아 정민성이 숨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벽 뒤에 숨어 클레어 씨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정민성을 향해 내가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헉!”
정민성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봤다.
“하, 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합니까? 스토커도 아니고.”
“스토커라니, 누굴 뭘로 보고……!”
하지만 꼬라지를 보면 영락없는 스토커였다. 나는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갈색 중절모에 선글라스, 마스크. 게다가 몸에는 바바리코트까지.
어쩜 이렇게 수상한 차림을 골라서 할 수가 있냐.
내 시선에 정민성도 스스로 당당한 모습이 아니란 걸 아는지 눈길을 피했다.
정민성이 다시 분위기를 잡고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멀리서 클레어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하, 됐습니다. 오늘은 매니저인 당신조차 부럽군요. 당신이 내 심정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녀의 곁에 서 있을 자격조차 없는 날…….”
아무리 봐도 자기 자신한테 취한 것 같은데.
“설마 클레어 씨 결혼 때문에 이렇게 궁상떠는 겁니까?”
“시끄러워요. 난 이렇게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으면 만족하니까…….”
의외였다. 이 여자 저 여자 다 찔러보고 다니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상심할 줄이야. 클레어 씨에게만은 진심이었다 이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미안해졌다. 클레어 씨가 정민성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다 해도, 내가 없었으면 꿈꾸는 것 정도는 자유였을 텐데. 결혼한 여자를 상대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니.
…내가 이 남자의 순정을 짓밟은 건가?
“그거 압니까? 사실 그녀는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헌터였던 시절,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제넘는 던전에 껴 버리고 말았죠.”
심지어 아무도 묻지 않은 옛날얘기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제 몫을 하지 못해 파티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압니까? 던전 공략에 실패하는 건 몰살을 의미한다는 걸. 나 하나 때문에 이 사람들이 다 죽는구나. 그게 너무 미안하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누구보다 앞에 서서 희망을 잃지 않고 등불처럼 빛나던 사람이…….”
클레어 씨의 얘기를 하는 정민성은 마치 성경을 읊는 독실한 신자 같은 모습이었다.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댄~”
이젠 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중증이다.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짱구를 굴리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다른 여자 소개라도…….”
“에? 진짭니까?”
‘받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려던 찰나, 정민성이 고개를 홱 돌리고 밝은 얼굴로 되물었다.
“…….”
“…아.”
정민성의 손바닥 뒤집는 듯한 태세 전환에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말았다.
* * *
“얘기 잘하고 왔어요?”
“그렇죠, 뭐.”
정민성의 갈대 같은 마음은 내 기억 속에만 묻어 두기로 다짐했다.
그때 중년의 남자가 클레어 씨를 불렀다.
“클레어 씨, 작전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만.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공략 멤버의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튼튼한 갑옷과 커다란 방패를 지닌 걸 보니 탱커 포지션으로 활약할 것처럼 보였다.
클레어 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또 다른 인물에게 접촉했다.
내가 목표로 삼은 인물은 같은 공략 멤버인 백우섭. 서류로 확인했을 때, 그는 플레이아데스 길드 소속의 A급 헌터였다. 게다가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 현재 길드장인 백건영의 아들이라는 거였다.
나는 미소를 띤 채 그에게 접근했다. 이전 백우진에게 했던 것과 같은 위압은 없었다. 이 근처엔 게이트도 있고 눈치 빠른 놈들도 많다. 그런 리스크 있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반갑습니다. 매니저 이도율이라고 합니다.”
“응?”
의외로 백우섭은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아, 당신이! 반가워요. 백우섭입니다.”
“저를 아십니까?”
“우리 부길드장이랑 한판 붙었잖아요.”
불카누스 신제품 계약 때의 이야기였다. 붙었다고 하기도 뭐한 게, 내가 연줄을 이용해 계약을 강제로 가져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정을 모르고 결과만 아는 백우섭은, 내가 백우진에게 한 방 먹인 걸로 내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듯했다.
“백우진 그 인간이 말이 좀 안 통하죠? 이해해요. 원래 그러니까.”
백우섭이 한쪽 입가를 끌어 올렸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로, 백우섭은 현재 길드장인 백건영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부길드장인 백우진과는 사촌 관계였고. 한데 태도를 보아하니 어떤 분위기인지 느껴졌다.
파벌 싸움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인간과 친해지는 법은 간단했다. 입에 담는 사람을 같이 씹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찌나 답답하던지.”
“역시! 우리 말 좀 통할 줄 알았다니까.”
“네. 안 그래도 제가 플레이아데스 길드에 관심이 많아서요. 여러모로 여쭤보고 싶은 게…….”
“진짜? 이직하려고? 에이, 그래도 그쪽도 좋잖아.”
백우섭이 리더와 대화하는 클레어 씨를 가리켰다.
“물론 클레어 씨도 좋은 분이죠.”
“맞아. 어디 가서 저만한 몸매 찾기 쉽지 않지.”
“…예?”
백우섭은 클레어 씨에 시선을 고정하느라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 쟤가 결혼했다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알아요? 왜 나한테는 기회를 안 주냐 이 말이야. 진짜 지금이라도 주면 절하고…….”
“클레어 씨는 기혼자입니다만.”
“그래서 더 좋은 거지.”
하하, 미친놈이.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저년 남편은 진짜 살맛 나겠다. 나였으면 매일 밤 반쯤 죽여줬을 텐데. 안 그래요?”
내 웃음소리에 반응한 백우섭이 나를 향해 돌아보며 물었다.
안 그렇냐고? 당연히 안 그렇다.
클레어 씨와 나는 진짜 부부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묶였을 뿐인 계약 결혼 관계.
나도 클레어 씨의 진짜 남편이 아니다. 그걸 빼고 남는 건 사장과 직원의 관계. 비즈니스뿐이다. 그러니 클레어 씨가 희롱당해도 내가 화낼 이유는 없다.
없지만…….
“내가 그 남편이다, 이 새끼야.”
─콰앙!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주먹을 날린 후였다.
주먹에 맞고 날아간 백우섭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A급 헌터가 남들 앞에서 보여도 되는 추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