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60
260화 이런 곳에서
“…….”
클레어의 손가락이 까딱였다.
새하얀 피부 위로 입혀진 검은 드레스가 선명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고 있던 클레어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목소리를 내는 법도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만히.”
손가락이 움직인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지켜보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몸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 세레나가 움직인 것이었다.
당장은 클레어가 주도권을 강하게 쥐고 있었지만, 이 몸은 원래 세레나의 것. 그녀가 조금씩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감히 주도권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정신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까지는.
[흐응. 그것도 재미가 있어야 말이지.]세레나가 투덜거렸다.
[넌 하루종일 죽상을 하고 여기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내가 뭐가 재밌어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겠니?]이곳은 하나의 성이었다.
척박한 마계의 땅에도 문명의 흔적이 있었다. 현대와 다른 점이라면, 도시나 도로와 같이 널리 퍼진 생활 시설들이 없다는 것뿐.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예술품과 같이, 덩그라니 동떨어진 건물들이 있었다.
클레어는 그중 하나를 점거해 조용히 숨죽이며 지내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토를 달지는 못했다.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사도였으니까.
세레나가 불만을 터뜨리든 말든 개의치 않던 클레어가 고개를 빼들었다.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가 금색 물결을 퍼뜨린 것처럼 노랗게 물들었다.
[그거, 되게 편하긴 하네.]“…….”
샤디아에게 받아 낸 황금안. 미처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클레어의 눈이 무언가를 포착하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오래 움직이지 않아 굳은 관절들이 비명을 질렀다.
[문이 열렸나 보네.]클레어가 움직이는 건 그 상황뿐이었다.
클레어가 순식간에 성 바깥을 빠져나갔다.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마계의 하늘 위를 가로질러 먼 장소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도착한 장소엔 검은 일그러짐이 나타나 있었다.
불안정한 마계의 차원에 구멍이 뚫려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통로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크기를 키워 다른 몬스터들을 집어삼키고 나면 던전과 게이트가 되곤 했다.
클레어가 손가락을 뻗었다. 이제는 검을 쥘 필요도 없었다.
“봉한다.”
검은 구멍 위로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칼이 꽂혔다.
마치 거룩한 십자가처럼 보였다.
* * *
‘……외국에서 곰이라도 만났나.’
도율이 거울을 보고 있었다.
화장실 거울로 보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생겨 보인다거나 하는 도취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맨몸의 자신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이 좋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었다.
특전사 출신이기라도 했던 걸까.
‘용케 안 죽었네.’
물론 그 상처들이 왜 생긴 건지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었다.
‘아무튼, 이건 좀 그렇구만.’
갑작스럽게 거울 앞에서 몸을 살피는 이유가 있었다.
-수영장 가자.
-수영장?
도은이 제안했다.
제안이었지만 도율이 가는 것도 반쯤 확정되어 있었다. 도은이 일하는 사장님 주예린과 어느 워터파크 협찬 컨텐츠로 가야 할 일이 있다나 뭐라나.
-거길 내가 왜 가?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아이, 씻팔! 동생 덕 보면서 하루 신나게 놀고 오면 되지, 불만 존나 많네!
도은이 옆구리를 퍽퍽 때렸다.
‘그것도 그런가.’
의사 선생님께서는 기억을 되찾기 위해 최대한 다양하고 자극적인 신체 활동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말씀하셨다.
어쩌면 옛날에 했던 행동이 계기가 되어 기억이 되돌아올 수도 있다고.
이전에 요리 수행이 특기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최대한 많은 요리를 해 보는 게 가장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고.’
이런저런 레시피를 시도해 봐도 기억을 되찾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물놀이라도 하면서 자극을 받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영복 사러 가야지.”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약속 날짜가 되어 도은이 모는 차에 타고 워터파크에 도착했다.
“주예린 씨는?”
“뭐? 예린 언니는 갑자기 왜 찾는데?”
도은이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우리 사장님 유부녀다.”
“아니…… 컨텐츠 촬영 때문에 온 거라며. 그런데 너네 사장을 안 챙겨?”
“아. 아니, 여기서 합류하기로 했어.”
“매니저 맞냐?”
모든 매니저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도율이 생각하기에 매니저란 연예인의 집앞까지 가서 대기하다가 운전 기사 노릇까지 해야 하는 존재였다.
촬영 장소까지 따로 오다니. 기강이 해이해도 너무 해이한 게 아닌지 걱정이었다. 이러다 짤리기라도 하면…….
‘아니, 돈은 많으니까 괜찮나?’
통장에 잠들어 있는 알 수 없는 액수의 금액. 무서워서 크게 손을 대진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긴 했다.
도은이 도율의 등을 밀었다.
“아무튼. 갈아입고 만나.”
도은의 지시대로 도율이 수영복을 갈아입고 워터파크 내부에 입장했다.
“되게 넓네.”
워터파크라고 해 봤자, 아무리 넓어도 그냥 운동장 정도의 크기를 예상했지만.
이 넓이는 거진 유원지를 방불케 했다. 이곳저곳에 있는 표지판이나 매점, 그리고 저 멀리서도 보이는 높은 놀이 시설들까지. 심지어 실내에 온천풀도 있었다.
‘그건 끌리네.’
이런 곳에서 물 맞으면서 노는 것보다, 뜨끈한 탕에 몸을 지지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았다.
도은이 들었다면 노땅 취향이라고 핀잔을 줬겠지만.
“욥!”
누군가 뒤에서 손날로 도율의 등을 두드렸다.
탁!
도율은 그걸 보지도 않고 낚아챘다. 손날이 등에 닿기도 전이었다. 그 행동에 자신조차 놀랐다.
“……?”
“……오, 반응 뭐야? 등 뒤에 눈이 달렸나.”
“그, 그러게 말이다.”
“암튼. 기다렸지?”
“별로. 구경하다 보니까 금방이던데.”
이런 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도은이 도율의 모습을 살피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도율은 손목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입고 있었다.
“아니. 남자가 무슨 래시가드를 다 입냐.”
“……이거 남자 거 맞는데.”
매장 점원에겐 요즘은 남자도 많이들 입는다고 들었는데.
‘내 동생이지만 꼰대가 따로 없군.’
도은이 화제를 전환했다.
“뭐, 됐다. 그래.”
도은이 씩 웃으며 물었다.
“오늘 다른 일행들도 있는데, 괜찮지?”
“어. 괜찮지. 원래 너네 사장님 촬영 때문에 온 거니까, 나야 뭐…….”
“저기 온다.”
도은의 말에 따라 시선을 돌려 보니. 거기엔 주예린이 이목을 모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동생인 도은이는 반바지에 나시 티인, 가벼운 여름 차림과 비슷한 복장으로 등장했다. 요즘 수영복은 옷처럼 나오는구만,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반면 주예린은 화보에나 나올 것 같은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배꼽까지 보이는 수영복이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주예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아, 예. 안녕하세요…….”
도율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눈에 띄잖아.’
유명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영복이 특이하기 때문인지. 단순히 겉모습이 빼어난 이유도 있을 테지만.
이 눈에 띄는 사람이랑 같이 다녀야 하는 건가? 시선에 계속 찔릴 생각을 하니 위장이 찌릿하는 기분이었다.
“한 사람 더 있는데, 괜찮지?”
“물론이죠.”
도율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은이 매니저라고 들었으니까, 따로 촬영을 담당할 카메라맨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런 도율의 눈앞에, 주예린의 어깨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를 떠밀었다. 찰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밀려난 건 도율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주하린 씨?”
촬영을 도와줄 스태프인 줄 알았더니. 주예린의 동생인 주하린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주하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주하린은 펑퍼짐한 저지를 입고 있었다. 하얀 바람막이가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방수 되는 건가?’
쭈뼛거리는 주하린을 보다 못한 주예린이 지퍼를 잡고 휙 내렸다.
“왁!!”
하얀 외투 속에 가려져 있던 건 밝은 색의 비키니였다. 주예린이 허둥대며 다시 지퍼를 올리려 했지만 옷에 찝힌 건지 올라가질 않았다.
“이, 이게…….”
“…….”
그 꼴을 구경만 할 수도 없는 지라, 도율이 결국 침착하게 지퍼 손잡이를 잡았다.
그야 이런 걸 당당하게 입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주예린 정도로 뻔뻔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리라.
도율이 최대한 시선을 피한 채로 천천히 지퍼를 올렸다. 슬라이더에 끼인 옷자락을 빼내고 나니 금방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한 주하린이 주예린에게 소리쳤다.
“언니, 미쳤어?!”
“아, 왜. 지금이 뭐 조선 시대니? 수영복 가지고 뭘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속옷이나 다름없는 걸……!”
“동생아.”
주예린이 주하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영복과 속옷의 차이가 뭔지 아니?”
“……뭔데?”
뭔가 개소리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주하린은 일단 물었다.
‘방수?’
도율이 속으로 답을 맞춰 봤다.
“그건 바로 말이다.”
주예린이 뜸을 들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속옷은 가리기 위해 입는 거고, 수영복은 보여 주기 위해 입는 거란 점이란다.”
“…….”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주하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영복도 수영복 나름이었다. 주하린도 워터파크에 가자는 소리를 듣고 수영복이라면 스스로 준비했다.
다만 이건 주예린이 준비해 온 걸 억지로 입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 거 입겠다고…….”
“동생아.”
주예린이 다시 한번 진지한 목소리로 주하린을 불렀다.
“……또 왜.”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뭔지 아니?”
노블리스 오블리주.
귀족의 의무라는 뜻으로,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현 그룹의 후계자이자 대현 길드의 길드장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주하린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직원 복지나 사회적 약자 계층 지원에도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올 말은 아니지 않나?
“그게 왜?”
주하린이 의아하게 묻자, 주예린이 당당한 표정으로 콧대를 치켜세웠다.
“우리 같이 가진 자들은 그걸 베푸는 게 의무란다.”
주예린이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몸매에는 자신이 있었다. 재능과 노력의 결실이 합쳐진 결과였다.
자매인 데다가 헌터로 활동하는 덕분에 군살이 없는 주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
주하린이 도율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율이 정론으로 묻자 도은과 주예린이 허둥거렸다.
“아, 아! 내 정신 좀 봐!”
“촬영! 해야지, 반드시 해야지!”
“그럼 저쪽으로 먼저 한번 가 볼까?”
“좋아요, 언니!”
그렇게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쌩하니 달아나 버렸다.
“잠깐, 우린……?”
촬영을 돕게 하려고 불러낸 거 아니었나?
저렇게 먼저 쌩하니 가 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도율이 어처구니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 자리엔 도율과 주하린만이 우두커니 남았다.
‘어색한데.’
도율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는 사이 주하린이 불렀다.
“이, 일단은 돌아다녀 볼까요?”
“그럴까요.”
어쨌든 여기에 온 것도 다 기억을 되찾기 위한 재활 운동의 일환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도율과 주하린이 아는 사이인 듯 모르는 사이인 듯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워터파크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도율을 불렀다.
“……이도율 씨?”
“예?”
이름을 불리자 도율이 즉시 돌아봤다. 누군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다.
단정하게 정리한 하얀 머리칼이 물에 젖어 있었다. 워터파크까지 와서 안경을 쓰고 있어서 렌즈에 물방울이 튀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다 보는군요.”
백우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