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그랬던 건가
“절 아십니까?”
도율이 백우진을 향해 그리 되물었다.
백우진.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인 것과는 다르게 단정하고 얌전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는 지금 옆에 어린아이 한 명을 끼고 있었다. 그 아이 역시 도율의 기억에 없었다.
“…….”
도율의 물음에 백우진이 잠시 입을 벌리고 침묵했다.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는 사이이지 않나.
백우진의 아버지가 세우고, 그가 부길드장으로 있던 플레이아데스 길드를 단숨에 무너뜨린 게 도율이었다.
그 이후 각성자 지원 센터의 인연으로 이런저런 일을 함께 하기도 했고. 백수아를 구해 오기 위해 러시아에 다녀오기까지 했다.
결국 요기라는 생소한 힘을 떠안는 바람에 마계까지 다녀오게 됐는데.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백우진의 반응에 도율이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게. 제가 최근 기억이 조금 애매해서…… 기억 상실 비슷한 상태라서요.”
“기억 상실…… 말입니까?”
“예.”
도율의 설명에 백우진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었나.’
이렇게 보니 도율은 정말 선한 인상을 한 청년이었다. 옷으로 몸을 가려 놓으니 흉터가 드러날 일도 없었다.
무림이란 세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는 기억도 잊었고, 사실은 자신이 내공을 사용해 몬스터고 각성자고 모두 압도할 수 있는 존재란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곁에 있는 건…….
‘전혀 다른 사람.’
당연하지만 클레어가 아니었다.
주하린이었다. 백우진과도 나름대로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대화라면 오히려 언니 쪽인 주예린과 더 많이 나눴다.
그래도 무언가 불안한 듯 백우진의 시선에 주하린이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주하린이 손가락으로 도율과 백우진을 번갈아 가르키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요?”
대답할 수 있는 건 백우진뿐이었다. 그 질문엔 도율도 기대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야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아는 듯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대할 만도 했다.
백우진에게 있어서 역시, 도율은 작은 존재가 아니었다.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아뇨.”
그러나 백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얼굴이나 아는 사입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백수아의 손을 잡고 멀어지려는 사이.
턱.
도율이 백우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도 실례가 아니라면 이야기 좀 들어 볼 수 없을까요?”
도율이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딱히 불안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주위엔 동생을 비롯한 좋은 인연들이 가득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다. 꿈은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것.
백우진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지금의 도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질긴 인연으로 엮인 남자였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백우진은 그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빚은 갚아야겠지.’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고쳐 쓸 생각이에요.
숨이 가빠질 정도로 느껴지는 압박감 속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의 다른 각성자들은 모두 잠에 취한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백우진뿐이었다.
그 자리에 나타난 건 클레어였다. 밝은 금색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가시와 깃털을 엮어 만든 것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문제는 당신이네요.
백우진은 마력이 아니라 요기를 갖고 있었다. 도율이 가진 내공과 같은 종류의 힘이었다.
도율은 거의 모든 내공을 소모한 덕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별다른 전투를 겪지 않은 백우진은 여전히 상당한 요기를 지니고 있었다.
클레어가 손가락을 뻗었다.
-고르세요. 얌전히 내 말대로 할지, 아니면 재가 될 건지.
백우진이 식은땀을 흘렸다.
망량의 요기를 손에 넣으며 싸우는 방법까지 제대로 터득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클레어의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벌레를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놓아주어도, 잡아도 큰 차이는 없다는 듯이.
원래 그런 눈빛을 하는 여자였던가.
도율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여자에게서 어째서 이런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는 거지.
-……그렇게.
백우진이 각오를 다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싸울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좋을 대로 세상을 바꿔 놓고, 뻔뻔하게 살아갈 셈입니까?
다른 이들의 생각과 기억을 모조리 고쳐 쓴다니. 무슨 이유가 있던 간에, 저질러도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러나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백우진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거기에 없어요.
-……무슨?
-나는 이곳에 남을 거예요.
쓸쓸한 음색으로 말하던 것 같던 클레어가, 다시금 목소리에 힘을 주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 일을 기억하는 건 당신 뿐. 원래라면 당신 같은 불안한 가능성 따윈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백우진을 죽이거나 하는 것 역시, 클레어로선 꺼려지는 일이었다.
-대답하세요. 당신, 어떻게 할 건지.
클레어가 대답을 종용했다.
* * *
“아이스크림 먹을래?”
“좋아요!”
주하린의 물음에 백수아가 방긋 웃으며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둘만 남은 도율과 백우진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나눴다.
도율이 머뭇거리며 옷자락을 잡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
“안 보여 줘도 압니다. 흉터가 있겠죠, 그 몸.”
“……!”
백우진의 말에 도율이 눈을 빛냈다.
흉터도 보통 흉터가 아니었다. 안 죽은 게 용하다 싶은 흉터가 온몸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당연히 남들에게 보여 줄 만한 게 아니어서 가리고 있었는데. 그걸 보지도 않고 말하다니.
‘역시 날 잘 아는 사람이었어……!’
도율이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전 대체 뭘 했던 겁니까? 듣기론 요리 수행 같은 걸 떠났다 돌아왔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처가 생기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율의 물음에 백우진이 머리를 골똘히 굴렸다.
도율에게는 빚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얘기를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좋은 방법일지는 한 번 더 생각을 해 봐야 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클레어는 사도에 가까운 존재로 변했다.
목숨을 잃은 주대현이 바랐던 것이 사도를 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어가 남아 있는 이상, 그녀 역시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었다.
만약 도율이 힘을 되찾는다 한들, 그 사실이 변하기나 할까.
‘자기 손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죽이거나,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거나……인가.’
그걸 알고 있기에 클레어는 도율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기억을 고치고 스스로 마계에 남은 것이었다.
도율에게 있어서는, 모처럼 되찾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걸 남의 손으로 깰 순 없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혹시 전…… 헌터였던 겁니까?”
헌터가 마냥 폼 나고 신나기만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들이 품기 쉬운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몸에 난 흉터들을 보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우진이 냉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도율 씨. 혹시 마나 검진 해 봤습니까?”
“…….”
마나 검진.
그게 헌터병에 걸린 고딩들을 한 방에 치료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거기서 적성이 없으면 헌터는 꿈도 못 꿨으니까.
옛날에야 커다란 기계 속에서 온갖 검사를 받아야만 가능했다지만, 요즘은 자가 검진 키트도 나올 정도로 대중화가 되어 있었다.
도율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해 봤는데, 이상하게 고장이 나더군요. 불량이 아니었을까…….”
백우진이 당연히 그렇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율은 내공을 잃은 게 아니었다. 쓰는 법을 모두 잊어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부분은 모두 클레어에 의해 단단히 잠겨 있었다.
하지만 백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도율 씨는 헌터였습니다.”
“……정말입니까?”
백우진이 농담을 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이도율 씨는…… 그러니까, 요리 헌터였습니다.”
“요리 헌터……?”
생소한 말의 등장에 도율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백우진은 요동 하나 없이 말을 이었다.
“세상의 특이한, 아무도 쓰지 않는 동식물을 식재료로 삼기 위해 모험을 하고. 심지어는 몬스터까지 식재료로 쓰곤 했습니다.”
“……지금도 몬스터를 식재료로 쓰잖습니까.”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실험적인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초가 바로 이도율 씹니다.”
“……예?”
도율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시장에 공개된 식재료들은 모두 이도율 씨가 발견해 낸 것이고. 그렇지 않은 비밀 레시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리치의 해골로 끓인 사골 스프라던가…….”
“예? 리치라면, 그 리치 말입니까?”
리치. 도율도 그 존재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리치라고 한다면 웬만한 헌터들도 함부로 상대하기 힘들어 한다는 고위 몬스터였다. 죽은 자를 되살리며 강력한 사령술을 쓰는 데다가, 영혼도 따로 보관하고 있어 죽이기도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제가 리치를……?”
“잡았습니다.”
그 정도로 강한 헌터였단 말인가. 그런데 왜 마나 검진은 실패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잡는다 쳐도, 그걸 누가 먹습니까?”
“이도율 씨의 요리엔 특별한 힘이 있었습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으면 각성자들의 마력을 비롯한 신체 능력이 월등하게 증가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도율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말은, 제가 그 희귀하다는 보조형 각성자였단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도율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과연,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통장에 쌓여 있는 수상할 정도로 많은 예금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각성자라고 해도 마력은 전혀 쓸 수 없었으며, 요리에 특별한 힘이 담기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손님들이 죄다 효과를 누렸을 테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그에 대한 시나리오도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마계 원정.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참가했던 각성자들 중 많은 이가 돌아오지 못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인류를 위협하던 사도라는 존재들을 모두 다 쓰러뜨리고 귀환했다는 희소식을 갖고 돌아온 원정대는 모두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대표로는 세케르가 있었지만. 밝혀지지 않은 비밀 명단도 있었다.
“설마……!”
“도율 씨도 마계 원정에 참가했었습니다.”
“진짭니까……!!”
그건 진짜였다.
“최후의 결전. 인류에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율 씨는 자신의 모든 힘과 기억을 맞바꿔 최후의 요리를 완성해 냈고…… 그 덕에 우리 모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왜 요리를 하는데 모든 힘과 기억을 맞바꿔야 하는 건지, 말하고 있는 백우진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 정도는 청취자인 도율에게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던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인류의 승리와 평화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과거사였다.
“……그랬던 건가……!”
도율이 주먹을 불끈 쥐고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