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돌아오셨군요
‘휴우…….’
도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하린이 내뱉은 ‘사장단 집합’이라는 말은 결코 가벼운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
회장 후계자로 있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동네 구멍 가게도 아니고 한국의 경제와 과학 기술을 좌지우지하는 대 대현 그룹의 각종 계열사 사장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나 도율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린 덕에 호출은 취소될 수 있었다.
‘하마터면 이런 곳에서 정장 입은 아저씨들한테 사과를 받을 뻔했군.’
물론 보트가 망가졌을 땐 간담이 서늘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곤란한 일을 늘리고 싶진 않았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건 연락을 받고 달려온 주예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급발진 하는 여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기라도 할 것처럼 들이닥친 주예린도 사정을 듣고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정말 죄송해요, 도율 씨.”
“아뇨…….”
도율이 식은땀을 흘렸다.
‘……진짜 불량 맞나?’
보트 손잡이가 박살난 덕에 주하린의 어깨를 붙잡고 타고 내려왔지만.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습에선 그 어떤 불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저 수많은 멀쩡한 보트 중에서 하필 도율이 탄 것만 불량이었나?
‘그것도 이상한데…….’
주하린이 전수 조사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왠지 제품엔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내가 부순 건가?’
도율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럴 리가.’
백우진은 도율이 과거엔 힘을 숨긴 헌터였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래봐야 과거는 과거. 지금은 힘과 기억을 잃은 평범한 남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안내 직원도 말하지 않았나. 보트에는 마력 반발 장치가 달려 있어 겁에 질린 각성자가 본능적으로 강한 힘을 줘도 부서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그런데 무슨 내가 힘 좀 줬다고 망가지겠어.’
그때 주하린이 주예린과 도은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
급한 연락을 받고 이 넓은 워터파크에서 곧바로 찾아올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근처에 있었다는 뜻.
잘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만 남겨 놓고 사라진 것 치고는 제법 계획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주하린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콘텐츠 촬영은 잘 끝나셨어요?”
“어, 어~? 잘 끝났지, 그럼!”
“와, 완전 대박. 우리 채널 구독자 천만 간다…….”
주예린과 도은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실제로 촬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카메라도 없었으니까. 정 급하면 폰으로 찍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주하린이 앨범을 까 보라고 하면 곧장 들통날 거짓말이었다.
주하린과 도은이 눈에 담은 건 워터파크의 정경이 아니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기는 도율과 주하린의 모습이었으니까.
보다 못한 도율이 말했다.
“나 파도풀 가 보고 싶은데.”
“파도풀?! 거 좋지!”
도은이 화색이 되어 말을 받았다.
“오빠, 나 알지? 초딩 때 별명 물개였던 거!”
“튜브로 서핑하겠다고 두 발로 서다가 자빠져서 울던 건 기억나는데.”
“아, 씨! 그런 건 좀 잊어라!”
* * *
이후로는 네 사람이 함께 다니며 워터파크의 이런저런 어트랙션을 즐기고 놀았다.
도율과 주하린 역시 억지로 두 사람만 남겨졌을 때보다도 친해질 수 있었다.
“제법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을 붙인 건 백우진이었다.
주예린의 눈에 띈 백우진과 백수아 역시 반쯤 강제적으로 일행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백우진은 싫은 듯한 눈치였지만, 백수아가 달가워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도율에게 있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동생은 열외로 제쳐 두고, 미인 자매인 주예린과 주하린 사이에 남자 혼자 있으려니 뒤통수가 따끔하던 참이었다.
아이까지 하나 끼어 있으니 시선이 많이 누그러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담이 줄어서요.”
덕분에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다.
“그나저나 백우진 씨도 주예린 씨와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요.”
“그야…….”
당연히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백우진과 주예린, 두 사람 모두 한국의 4대 길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인연이라면 어릴 때부터 있었다.
원래의 과거에서, 각성자가 되지 못해 길드의 후계자로 인정 받지 못해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주예린은 그럼에도 백우진을 무시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백우진의 과거는 도율의 힘과 연관이 있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길드, 플레이아데스 길드가 무너진 건 도율의 손에 의해서였으니까.
그러나 도율의 힘과 관련된 모든 것이 세상에서 지워진 지금, 그 자신의 과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백우진 역시 확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서라면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군.’
도율은 기억을 잃어 과거를 떠올리려 하고 있었고, 백우진은 기억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백우진은 클레어의 말대로 이 새로운 세상에 순응해 살아갈 생각이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수확은 없네요. 물놀이는 그닥 즐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도율의 말에 백우진이 잠시 기억을 뒤적거렸다. 이전의 도율과 깊게 교류한 건 아니었어도 소식은 듣고 있었다.
“이런 곳에 놀러 왔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긴 하군요.”
그렇게 대답한 백우진이 물었다.
“아직도 기억을 되찾으려 하는 겁니까?”
“아, 백우진 씨 얘길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것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었다. 적당히 지어낸 얘기에 불과했으니까.
“과거야 어쨌든, 현재를 즐기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백우진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일 테니까.
“백우진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안 어울리는데요.”
“……그건 압니다.”
정작 그 말을 한 백우진이야말로 과거를 잊으란 말에서 가장 거리가 멀었다.
본심이 아닌, 남의 의견을 빌어서 하는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백우진도 잘 알고 있었다.
“백우진 씨는 뭔가 절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인 것 같긴 하지만.”
“과찬입니다.”
백우진이 도율의 시선을 피했다. 단지 어떤 여자의 협박에 굴했을 뿐이다.
* * *
“오빠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야?”
“뭐?”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도은이 도율에게 그렇게 물었다.
도은이 저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거리감을 가진 인물이라면 백우진뿐이었다. 주하린이나 주예린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조금?”
“어쩌다가?”
“그건 나도 잘…….”
도율이 얼버무리며 손가락으로 옆통수를 톡톡 쳤다.
도율의 기억 속엔 없었지만, 먼저 말을 건 건 백우진이었다.
그가 예전에 도율과 어떤 사이였는지도 말해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동생에게 전달하기 껄끄러웠다.
‘중딩 망상이라고 할지도.’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정체를 숨긴 채 몰래 활동하던 헌터였다니. 말 그대로 중학생이나 할 법한 상상이었다.
물론 도율이 스스로 떠올린 게 아니라 백우진이 전달해 준 이야기였지만.
“그래?”
도은이 뭔가 미심쩍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왜 그러는데?”
“아, 좀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서.”
“사연?”
“헌터 업계에서 유명하거든, 그 사람.”
“왜?”
끈덕진 도율의 질문에 도은이 대답했다.
“내부고발자거든.”
내부고발자.
무슨 일이었는지 귀를 기울이는 도율에게 도은이 설명해줬다.
“그 사람 아버지가 되게 유명한……. 백건우라고 알지? 그 사람 아들인데, 플레이아데스 길드가 백건우가 만든 길드였잖아. 근데 길드에서 저지른 불법 비리랑 약물 실험을 싹 다 까발려 버렸어.”
“백우진 씨가?”
“그래. 당시 길드장이었던 백건영은 혐의를 부인하다가 체포 과정에서 저항이 거세 사살당했고. 간부진도 줄줄이 엮여서 잡혀 들어갔고. 심지어 천벌인지 뭔지, 길드 본사도 번개 맞고 개박살이 났다던데.”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난리법석이었다.
“아무튼, 덕분에 길드 하나를 화려하게 작살낸 이력으로 아무 데서도 데려가지 않는 요주의 인물이 된 거지. 그것도 자기 아버지가 만들었던 길드를 말이야.”
그런 사정이 있었나.
“그런데 오빠가 그런 사람이랑 왜 아는 사이인 건가,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나도 모르지.”
그건 도율 자신도 궁금했다. 하지만 대답할 방법은 없었다. 백우진이 일방적으로 이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 뿐.
어쩌면 그 내부고발을 도왔던 사람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는 넌 왜 그렇게 빠삭하냐?”
“응……?”
“헌터 업계 일이라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은이 도율의 질문에 뻣뻣하게 입을 벌렸다.
“아, 아니. 뭐 나야 예린 언니 밑에서 일하다 보면 대현 그룹 얘기도 건너 건너 듣고 하는 거지. 원래 이 바닥이 워낙 폭 넓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고?”
도은이 마른 웃음 소리를 흘렸다.
“동생아.”
“응, 오빠.”
“나 가 보고 싶은 데가 있는데.”
평소의 도은이었다면 피곤해 죽겠는데 얌전히 집이나 들어가라고 했겠지만.
“말만 해.”
지금은 말 잘 듣는 순한 양이었다.
* * *
「하이고…….」
흰돌이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예능 프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며 서로 웃고 떠들기 바쁘지만, 그걸 보는 흰돌이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마계에서 돌아온 후로 도율이 전혀 딴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흰돌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게다가 원래 집의 주인이었던 클레어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도율은 클레어를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고.
이 사실을 전하고 싶어도 대화가 통하질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예능을 봐도 재미가 없구만.」
예전이었다면 하루종일 보면서 낄낄대도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왜 아등바등 이 고생을 하냐.」
나름대로 생각나는 건 다 해 봤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괜한 걱정을 하다가 윤기 나는 털만 한 움큼씩 빠질 것 같았다.
근심 걱정 덜어내고 웃고 떠드는 예능에 정신을 실으려 했지만. 금세 옛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씁…… 그래도 사장님이 되게 잘해 주셨는데…….」
클레어가 이런저런 애견 용품도 사 주고 사료도 비싸고 맛난 걸로 준비해 주고 간식도 자주 주고 잘 놀아주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클레어가 없는 걸 이대로 쌩까고 넘어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아무튼 이 인간이 말만 좀 알아들었어도…….」
무슨 사정인지 물어보고 싶어도 도율과 대화부터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요즘 흰돌이의 하루였다.
삑삑삑.
현관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클레어가 돌아오든 도율이 돌아오든 잽싸게 튀어가서 꼬리를 흔들며 바짝 업드렸겠지만, 이젠 마지막으로 그런 적이 언제였는지도 기억 안 났다.
그렇게 해 봤자 알아봐 줄 사람도 하나 없는데, 뭘.
흰돌이가 소파에 누워 심드렁하게 궁시렁거렸다.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기어 들어오는지, 원.」
그런 말투로 지껄여도 화를 입는 일은 없었다. 도율은 이제 흰돌이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까.
거실까지 걸어들어온 도율이 소파에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있는 흰돌이를 내려다봤다.
「뭘 봐.」
도율이 그런 흰돌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응?」
무언가 이상했다.
개는 개라는 듯이 바라보기만 했던 도율이 지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설마…….」
흰돌이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도율이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네.”
확실했다. 도율이 흰돌이의 말을 다시 알아듣고 있었다.
흰돌이의 등골에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소파에 있던 흰돌이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재빨리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돌아오셨군요, 대협……!」
흰돌이가 머리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