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7
27화 뭘 노리나 했더니
“하…….”
바닥에 누워 있던 백우섭이 팔짝 뛰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뒤져!”
백우섭이 바닥을 박찼다. 마력에 의해 강화된 신체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마음만 먹으면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돌려 보는 것처럼 면밀히 분석할 수도 있었다. 굳이 일일이 대응할 필요도 없는 수준의 상대였다.
돌진하는 백우섭과 나 사이에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이런 씨… 놔! 놔 보라고!”
“아이고. 진정 좀 하세요, 백우섭 씨.”
실눈을 뜬 사내가 백우섭을 막아 세웠다. 형식적으로 말리는 건 아니었는지, 백우섭이 거칠게 날뛰고 있는데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탓에 백우섭은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것과 달리 내게 한 걸음도 다가오지 못했다.
그리고 내 앞엔 나를 지키듯 클레어 씨가 비스듬히 서서 팔을 뻗었다. 등을 지고 있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도 백우섭을 경계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A급 헌터와 일반인이 시비가 붙은 상황. 누구를 보호해야 할지 명백했다. 그게 억울했는지 백우섭이 소리쳤다.
“저 새끼가 먼저 쳤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실눈의 남자가 백우섭을 타일렀다.
“에헤이, 진정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헌터씩이나 돼서 일반인이 쳤다고 똑같이 갚아 줘야 되겠습니까? 그것도 이렇게 마력까지 끌어 올리고선? 그러다 감옥 가요, 이 사람아.”
타이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불을 지피는 인간도 있었다. 한 성격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냅 둬 보지? 그 일반인한테 맞고 꼴사납게 구르던데. 얼마나 억울했으면…….”
“야!”
백우섭이 소리치자 여자는 깔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결국 상황을 정리한 건 리더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의 결정은 단순했다. 우선 백우섭을 제압하는 것.
“적당히 해라, 백우섭.”
“아재……!”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백우섭도 리더가 입을 열자 다소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맞은 건 나라고요!”
“시끄러워. 또 혓바닥 멋대로 놀리다가 선을 넘었겠지. 그 이상 소란을 피우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 이 일이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소리에 백우섭이 깨갱 하고 움츠러들었다.
“썅…….”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지만, 백우섭은 내게 대드는 걸 포기했다. 실눈의 남자가 붙잡은 걸 풀어 줬음에도 불구하고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쳐들 뿐이었다.
“이도율 씨.”
“네.”
“당신도 가서 사과하고 와요. 어쨌거나 때린 건 사실이니까. 폭력은 안 돼죠.”
“예…….”
지극히 정론이었다.
나는 백우섭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홧김에 주먹이 나가고 말았지만,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힘 조절을 잘했다고 자부한다. 그야 전력으로 때렸으면 이 녀석 따윈 형체도 안 남았을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원인은 어디까지나 백우섭의 막말.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을 하긴 했어도 이 정도로 수습하는 게 내 마지막 인내심이었다.
“쯧…….”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던 백우섭이 돌연 씨익 미소를 짓더니 꼬투리를 잡았다.
“이봐. 그게 사과하러 온 사람의 태도야?”
“예?”
백우섭이 내 뒤통수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사과를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더 고개를 처박고!”
그리고 힘을 주어 내 머리를 눌렀다.
물론 그래 봤자 내 머리는 눌리지 않았지만. 백우섭이 안간힘을 써도 고작 이 정도로 내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이긴 했다. 좀 더 성의 있는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이럴 땐 사장님 눈치 보는 게 최고다. 클레어 씨가 인정하면 이 정도로도 괜찮은 거고, 못마땅해하면 내 사과가 모자란 걸 테니까.
…그런데 클레어 씨가 원래 있던 곳에 없었다.
어디 간 거지?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백우섭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왜 이러나 했더니 클레어 씨가 백우섭의 손목을 붙잡고 비틀고 있었다. 백우섭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뒤흔들었지만, 클레어 씨는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클레어 씨가 사백안을 뜨고 백우섭을 노려봤다. 그녀의 입에서 한기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매니저한테 무슨 짓이에요.”
“아, 아, 알았으니까… 손 좀!”
클레어 씨는 충분히 뜸을 들이고 손을 놓아 줬다. 백우섭이 손목을 감싸 쥐고 신음을 흘렸다.
“제, 젠장……. 너희들, 내가 두고 보나 보자…….”
꽁무니를 빼는 모습까지도 틀에 박혔다.
나보고 사과하러 가라는 사람이 저지른 짓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폭력은 안 된다면서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별개의 사건이잖아요. 당신이 저지른 건 사과하고 끝났고, 나는 새로운 폭력에 저항한 거죠.”
클레어 씨가 새침하게 잡아뗐다.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지 나조차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먹을 다 썼어요? 말싸움으론 죽어도 안 질 것 같은 사람이.”
“저 그런 이미진가요?”
“…말해 뭐 해.”
클레어 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뭐였냐니까요?”
“그게…….”
이후에도 그녀가 끈질기게 캐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전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 * *
도율이 근처에 마실 걸 사러 간 사이 클레어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자기.”
“정소민 씨.”
정소민. 이번 던전 공략에 같이 발탁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아이~ 딱딱하게 그럴 거예요?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괜찮습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지나치게 사무적인 응대에 정소민이 눈매를 좁혔다. 최근 클레어의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누그러진 건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사람과 친해지겠다는 생각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재밌는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철벽 여왕의 가면을 벗길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남편 앞에선 농담도 하고 그러더니.”
“콜록!”
클레어가 기침을 뱉었다.
그녀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결혼 사실을 발표하긴 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비밀로 유지하고 있으니 센터장과 그 비서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야 했다.
“소민 씨가 제 남편을 어떻게 압니까?”
“방금도 봤으니까 알지.”
“…보다니, 누굴?”
“이도율 씨잖아요.”
클레어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아는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딱딱한 미소를 보였다.
“아, 하하. 그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네요. 그는 제 매니저에 불과해요. 사적으로는 전혀…….”
“나, 다 들었는데. 이도율 씨가 자기 남편이라고 밝히는 거.”
“네? 대체 언제…….”
정소민이 엄지손가락으로 백우섭을 가리켰다.
“아까 우연히 가까이 있었거든. 그래서 다 들었지롱.”
“…….”
도율이 주먹을 휘두를 때 그런 말도 했다는 걸까. 클레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걱정 마. 저쪽은 처맞느라 못 들은 거 같으니까. 알았으면 저놈 성격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겠어?”
정소민의 물음에 클레어가 동의했다.
하긴 백우섭이라면 원래 혓바닥이 가벼운 놈 취급을 받는 자였다. 그가 남들 앞에서 이렇게 치욕을 당했으니, 남의 비밀을 알았다면 그 성격에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이제 인정하는 거지?”
“…….”
클레어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소민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다.
“이야~ 자기 완전 쑥맥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실한 놈으로 골라잡았네? 나 뉴스만 봤을 땐 좀 걱정했는데. 어디 보자, 외모는 그만하면 합격이고. 성격도 화끈하던데?”
“이유도 없이 주먹이 나가는 걸 화끈하다고 하기엔 부끄럽죠.”
클레어가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태도에 정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저런 새끼는 맞아도 싸지.”
“네?”
“말했잖아, 다 들었다고.”
“설마…….”
클레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태도를 보고 정소민이 눈치챘다.
“아하~ 자긴 못 들었구나?”
“…….”
“궁금해? 궁금하지?”
정소민이 웃는 얼굴로 클레어의 어깨를 찔렀다. 계속된 놀림에 클레어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필요 없어요!”
“어……?”
“알아야 하면 어련히 말해 줬겠죠! 뺀질대기는 해도 그런 부분은 확실히 하는 인간이니까! 숨기는 건 더럽게 많아도… 결국 항상 날 위해 줬으니까!”
호기심을 잘라 내기 위한 외침이었다.
힘을 가진 것도 숨기고, 상의도 없이 멋대로 사라졌다가 하는 인간이지만. 매일 그녀에게 밥을 만들어 주고 운전대를 잡았다. 마사지도 처음엔 개수작인 줄 알았더니 점점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파투 난 계약을 어떤 수를 쓴 건지 다시 가져오기도.
득과 실을 따져 보면, 결국 도율은 클레어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랬으리라 믿었다.
클레어의 말에 정소민이 경련하듯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부쳤다.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내 얼굴이 다 화끈하네.”
“뭐가요?”
“응… 아니야,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정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잘 생각했어. 듣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은 내용이었거든.”
“그건…….”
“뭐, 저런 놈이 여자를 뒤에서 씹을 때 뭐라고 지껄일지 대충 알지? 그런 거야.”
거기까지만 말해도 클레어는 충분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소민의 말대로, 듣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은 불쾌한 진실이었다.
“왜 그런 걸로 화를 냈을까요.”
클레어는 도율에게 이미 납치를 사주한 집단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 사실 여부나 증거 수집을 위해 도율이 관련 인물에게 접근하고자 한다는 사실도.
백우섭은 현 길드장 백건영의 아들. 게다가 혀가 가벼운 성격. 친해진다면 정보를 뜯어내기 가장 적격인 상대였다.
같은 남자라면 그깟 음담패설 정도는 끼어들 수도 있지 않나. 어차피 진짜 아내도 아니다. 목적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 정도,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텐데.
이해하지 못한 건 도율의 행동이었다.
클레어가 의문을 표하자 정소민이 해괴한 얼굴로 물었다.
“왜냐니, 진짜 몰라서 물어?”
“…남자들끼린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아~ 자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정소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을 세웠다.
“잘 들어. 남자들이 야한 얘기 좋아하는 건 만국 공통이지만, 거기서도 절대 하면 안 되는 불문율이 있어.”
“불문율?”
“그래. 불문율.”
정소민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남자란 원래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뒷말은 용서하지 못하는 생물이거든.”
“정말… 좋아하는?”
“자기 아내에 대한 얘기를 하는 놈을 어느 남편이 용서하겠어? 그런 법이지.”
“…….”
클레어가 가볍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정소민은 그런 클레어의 반응이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클레어는 한동안 손을 치우지 못했다.
* * *
클레어 씨에게 마실 거라도 사다 주기 위해 나왔던 나는 백우섭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그는 클레어 씨에게 당한 발목이 시큰거린다며 어깨 좀 빌려 달라는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클레어 씨가 잡은 건 손목인데.”
내 지적에 백우섭은 당황하더니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이도율이. 댁이 헌터야? 원래 헌터들 사이의 싸움은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긴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아까 보니 백우섭 씨는 곧잘 머리 말고 가랑이 사이에 있는 걸로 생각을 대신하곤 하는 것 같던데, 그런 사람이라면 위아래가 뒤집혀도 이상할 거 없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런 거라면 팔목이랑 발목이랑 헷갈릴 만도 하죠.”
“뭐……?”
“갑시다. 어깨 빌려 달라면서요?”
한 차례 물을 먹었지만, 백우섭은 눈썹을 부들부들 떨며 웃는 얼굴을 지어냈다.
“그래, 가자고.”
백우섭을 부축하고 걸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좀 더 얽히면 길드에 대해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 그가 바란 목적지는 던전 입구였다. 게이트와 같이 허공에 나타난 균열이 그곳으로 넘어가는 문 역할을 했다.
“그거 알아? 던전은 한 번 입장하면 클리어할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는 거. 그래서 공략 멤버를 모아서 한꺼번에 입장하지.”
“압니다. 그러니까 다들 이렇게 각자 들어가기 전에 정비 시간을 갖는 거잖습니까.”
그 정비도 이제는 거의 끝마무리에 이르렀다. 조금만 있으면 입장이 진행될 것 같다.
내가 균열을 등지고 다른 이들을 보는 사이 백우섭이 내 어깨에서 빠져나와 두 발로 섰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올려 내 배를 걷어찼다.
“죽어! 이 싸가지 없는……!”
더러운 신발에 옷이 지저분해지는 게 싫어서 피했다.
“어……?!”
내가 이렇게 간단히 피할 줄은 몰랐는지 백우섭이 그대로 몸이 쏠려 균열로 몸이 반쯤 넘어갔다.
백우섭은 몸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내 옷깃을 붙잡았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손에 잡히는 걸 쥐는 듯한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뭘 노리나 했더니…….”
백우섭은 울상이 되어 외쳤다.
“야! 나가! 다… 다시 나가라고!”
이대로 옷을 벗거나 백우섭의 손을 놓게 만들면 녀석만 던전 속에 내동댕이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백우섭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백우섭은 내가 녀석을 꺼내 주려 한다고 생각한 건지 표정이 밝아졌다. 그 반응을 본 내가 피식 웃고 단언했다.
“싫은데?”
내가 백우섭의 목덜미를 잡은 건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백우섭과 함께 던전 속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