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31
31화 그 말, 후회하지 마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킨 끝에 클레어가 꺼낸 말은 만류였다.
“…그만해요.”
도율이 클레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클레어는 굳게 닫힌 도율의 입술을 바라보다, 대답이 없는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만하라는 말 안 들려요?!”
클레어의 외침에 도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염증이 난다는 태도. 처음 보는 그의 태도에 그녀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후환을 남길 이유가 있나?”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뭐가 충분하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데. 이놈은 내 목숨을 노렸던 놈이고.”
클레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같이 던전에 들어오게 된 건진 모르지만, 적어도 도율이 먼저 의도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다른 헌터들이 모인 곳에서 던전 같은 곳에 들어갔다간 너무 눈에 띌 테니까.
게다가 백우섭은 자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몰살하고자 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사이로 치달은 상태였다.
그러나 도율의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클레어가 쥔 검의 끝이 떨렸다. 손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말에 도율이 가늘게 눈을 떴다.
“이게 원래 나야.”
자비 없는 모습. 죽지 않기 위해 죽여 가며 살아온 자의 온상. 이 몇 주간의 생활로 덮어씌우기엔 너무 짙은 혈향. 그것이 도율의 본성이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을 뿐.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고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봤지.”
클레어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도율의 과거를 몰랐다. 하지만 그가 억지로 이런 모습을 위장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건 느껴졌다. 이제야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도율은 지극히 평안한 상태였다.
“…원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돌아와 줘요. 내가 아는 당신으로…….”
클레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도율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내가 있으니까. 내가 당신 대신 도은이를 치료할 마석을 구해 올 테니까, 당신은…….”
“손 놓고 있으라고?”
“지금까지처럼 날 도우면 되잖아요.”
그 말에 도율이 도돌이표처럼 말을 따 왔다.
“지금처럼이라.”
“그래요, 지금처럼…….”
“정말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네?”
도율이 던진 질문에 클레어는 헛숨을 삼켰다.
“말로만 S급이라고 떠드는 것치고 진척이 너무 늦어.”
“…그건 길드가…….”
“길드가 없어서 그렇다고? 진짜 그게 단가? 네가 허울뿐인 S급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정녕 실력이 좋았으면, 길드가 있든 없든 S급 던전에 모셔 가려고 안달이겠지.”
도율이 던진 근본적인 질문.
클레어는 S급 헌터 중에서도 최연소에 가까운 나이였다. 승급을 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위에 등급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 같은 S급과 비교해 가장 뒤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경지면 충분히 뛰어난 재능이다. 길드의 도움 없이 그 정도 입지를 다지다니 역시 대단하다. 극광 출신 중에서도 수석 졸업이라 할 만하다. 그런 말만 들어온 그녀였다.
무림에서 기적이라 여겨도 좋을 만한 사선을 숨 쉬듯이 넘어온 도율의 시선에서나 그럴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도율의 말은 클레어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재능이나 잠재력을 따지지 않고 보면 그녀 역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S급 던전 공략에 참가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털썩.
도율이 백우섭을 아무렇게나 놓아 버리고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클레어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부턴 내가 도와주지. 널 방해하는 길드가 있다면 박살을 내고. 네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이 나타나면 주검으로 만들어서.”
“…….”
“그거 좋은 생각이군. 차라리 너 말고 다른 S급 헌터들을 모두 죽여 버릴까?”
좋지 않았다. 만약 가능하다고 쳐도, 그런 짓을 했다간 던전을 공략할 전력조차 줄어들고 만다. 오히려 성공 확률이 낮아지는 행위. 그런 어리석은 일을 입에 담을 정도로, 지금의 도율은 어딘가 미쳐 있었다.
도율은 망가뜨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자기 자신이든, 세상이든. 힘이 있는데도 정작 바라는 것 하나 얻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서.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 미워서.
이 광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게 내버려 두면, 그녀가 그리던 평온한 일상은 끝장이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자신 때문에 가족이 희대의 살인마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도은이 어떻게 생각할까. 심지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클레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했다.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내가 부족한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나한테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목이 막혀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도율은 그런 그녀를 무심히 지켜보더니 수긍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클레어는 도율이 생각이 바뀌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 * *
파지직!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 균열 근처에 모여 기다리던 사람이 고대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던전 클리어를 마친 헌터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헌터들이라고 해야 고작 두 명에 일반인 하나. 일말의 기대를 품는 것마저 꺼려지던 상황.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던전 공략에 성공했는지, 균열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세상에……!”
“말도 안 돼!”
“힐러! 바로 준비해!”
균열을 나오는 사람은 총 셋. 앞장서서 걷는 금발의 여자와 뒤따라 걸어오는 남자.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업힌 남자였다.
공략대 리더로 선정되었던 탱커 김대길이 가장 먼저 달려와 클레어의 상태를 살폈다.
“클레어 씨, 상처는……?”
김대길이 살펴도 클레어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자잘한 생채기나 먼지를 뒤집어 쓴 부분은 있어도 큰 상처는 전혀 없었다.
이런 소수의 인원으로 A급 던전을 공략하고 나왔다기엔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상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녀의 시선이 뒤따른 두 사람에게 향했다. 이제 보니 멀쩡하게 서 있는 건 이도율이라는 남자. 클레어의 매니저였다. 그리고 그가 등에 업고 있는 건 만신창이가 된 백우섭.
“이런!”
김대길이 힐러들과 함께 달려갔다. 백우섭의 상태는 그만큼 위중했다. 헌터의 강인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숨이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우섭을 업고 있는 도율은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옷이 조금 상한 것 외에는 말끔했다. 사고로 던전 속에 들어가게 된 일반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도율 씨는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이 지켜 주신 덕분에요.”
“그렇군요.”
도율이 들것 위에 백우섭을 내려놨다. 힐러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굳은 얼굴로 치료를 시작했다.
김대길은 백우섭의 치료를 힐러들에게 맡겨 뒀다. 탱커인 자신이 나서 봤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을뿐더러, 도율과 나눠야 할 이야기도 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사태여서 모두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이도율 씨, 잠깐 얘기 좀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인파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리더인 김대길이 자리를 뜨는 일에 시선을 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구태여 어딜 가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주변을 살핀 김대길이 말을 꺼냈다.
“제가 상황을 정확히 본 게 맞다면, 백우섭이 도율 씨를 균열 근처로 끌고 간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자기가 발목을 다쳤으니 부축을 좀 해 달라나.”
“그 말이 사실입니까? 도율 씨는 그걸 믿으셨고요?”
“믿기진 않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싫다고 하면 힘으로 끌고 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도율이 겁에 질린 얼굴로 목소리를 가라앉히자 김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도율은 알고도 당해 준 거였지만, 김대길에게 설명할 땐 유리한 부분만 진술해도 무방했다. 남들이 보기엔 틀린 말 하나 없었으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김대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우섭, 이 미친놈이 결국……. 하아, 이도율 씨. 이번 일은 제가 백우섭 대신… 아니, 모든 헌터를 대표해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대길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헌터가 일반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만 해도 중징계감인데, 고작 시비가 붙은 것 가지고 사람을 균열로 던져 버리다니. 게다가 멍청하게도 자신까지 균열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걸 수습하기 위해 S급 헌터인 클레어가 뛰어들어 던전을 클리어했다. 던전에 들어간 헌터는 둘. 클레어와 백우섭. 그러나 백우섭은 아무런 장비도 없었으니, 사실상 아티팩트에 장비를 보관하고 다니는 클레어가 모든 걸 해결했을 터였다.
‘A급 던전을 단신으로……. 웬만한 S급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다.’
김대길이 클레어에 대한 평가를 고쳐 썼다.
이 정보는 협회와 길드에 퍼져 앞으로 그녀의 활동이 보다 높은 무대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었다.
그러니 이 일을 해결한 클레어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김대길은 클레어 측의 매니저인 도율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뒤늦게 무슨 의미냐 생각할 수도 있으시겠지만, 백우섭에겐 중징계가 내려질 겁니다. 아니, 어쩌면 영구적인 자격 박탈이 있을지도…….”
도율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격 정지를 당하든 말든 크게 상관없을 테니까.
클레어는 도율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걸 막고 싶어 했지만, 후환을 남겨선 안 된다는 말까지 거스를 순 없었다.
“파티장님!”
그때 힐러 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의식이라도 되찾았나?”
“그게 아니라…….”
힐러가 전한 말에 김대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나 코어 파열?!”
“…예.”
마나 코어.
도율이 다녀온 세상, 무림에서는 단전丹田이라 부르는 부위였다.
각성자의 몸속에 있는, 마력을 생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처음엔 가상의 개념으로 여겨졌지만, 몸속의 장기와 결합되어 마력을 사용할 때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마나 코어가 파열됐다는 건 헌터에게 있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부상. 헌터로 재기하는 것은 커녕, 일상 생활조차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였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뭐? 마나 코어 파열?”
측근의 보고를 들은 플레이아데스 길드장 백건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반응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사고를 당한 백우섭은 백건영의 아들이었다.
“자세히 말해 봐.”
“예. 그게, 모종의 사건으로 소수의 인원으로 던전을 공략하게 됐는데…….”
둘이서 A급 던전을 공략하던 도중,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 쓰다가 코어가 망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전, 헌터 업계가 이토록 체계적으로 활성화되기 전 맨몸으로 던전을 공략하던 ‘기적의 세대’에서 곧잘 일어나는 사고 중 하나였다. 달리 말해 요즘은 거의 없는 일이라는 뜻.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예? 아니, 확실히 두 사람이 공략하기엔 너무 어려운…….”
“그게 아니라. 그놈이 남들 위해 희생한답시고 자기 코어가 망가질 때까지 구를 놈이냐고.”
“그건…….”
측근이 말을 아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보통 그 정도까지 한 헌터는 고귀한 희생이니, 숭고한 정신이니 하며 잠깐이나마 떠받들어 준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놈들은 쉬쉬하기 바빴다. 공략대의 리더였던 김대길은 ‘천상의 축복’ 길드 소속. 이런 일이 있을 때 절대 입 다물고 있을 놈이 아니었다. 누군가 입을 막으려 해도 앞다퉈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설 놈.
그러나 녀석조차도 그날의 사건을 불문에 부치는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한 태도였다.
“같이 들어간 헌터가 누구라고?”
“…클레어 컴벨입니다.”
“클레어. 클레어 컴벨이라고.”
백건영이 깍지를 끼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빗속에서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참 질기다. 그치?”
“…예.”
피차,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