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37
37화 반만 가르쳐 주지
수증기가 걷히고 경기장 위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승부가 갈린 상황이기에 둘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창을 찌른 청진명과 검을 휘두른 클레어. 관객들이 승부의 행방을 찾았다. 커다란 전광판에 나타난 화면은 두 사람의 밴드가 모두 끊어져 있는 것을 비추고 있었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무승부……?”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사이, 클레어가 스르르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타난 한 남자가 쓰러지는 클레어의 몸을 받아 냈다.
“……어느 틈에?”
그 남자는 도율이었다. 곁에 있던 송민아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옆에 있던 자리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의료반!”
도율이 클레어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큰 지장은 없는 상태였다. 너무 많은 걸 쏟아 내서 일시적으로 탈진한 것뿐.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것치고 후유증이 남을 만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냉정했던 것인지, 아니면 재능의 도움을 톡톡히 받은 것인지.
클레어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도율의 등 뒤로 청진명이 말을 걸었다.
“땅에서 솟아난 줄 알았네. 댁이야? 걔한테 그거 가르친 사람이.”
“…….”
도율이 조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지 않음에도 청진명이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야 마력을 가속하는 건 스스로 깨달을 법해도, 그걸로 안력眼力까지 응용할 생각은 보통 못 하거든. 이건 백 퍼센트 누가 옆에서 보여 준 사람이 있다 싶었지.”
도율도 보고 있었다. 클레어가 지나가듯 한번 가르쳐 준 ‘정안’의 사용법을 응용해 수증기 속의 청진명이 접근하는 것을 파악했음을.
그로 인해 가능했던 크로스 카운터. 본래 좋은 교훈이 되었어야 할 패배가, 무승부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댁 같은 사람이 왜 매니저나 하고 있는 거지?”
청진명은 도율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더라도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클레어에 곁에 있던 매니저가 분명했다.
“추측이 지나치시군요.”
“내가 감이 좋아서.”
도율이 입을 다물었다. 근거 하나 없는 의견인데도 청진명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대를 말로 설득하려 해도 소용없다.
“안심해. 남이 꽁꽁 숨기는 걸 떠벌리고 다닐 만큼 눈치 없진 않으니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부탁?”
“나랑 한 판 붙어 주라.”
청진명이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물론 오늘이 아니어도 좋아. 시간, 장소 둘 다 댁이 원하는 대로 고르라고. 오늘처럼 거창하게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도 없다고 약속하지.”
도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닐까.
“거절하죠. 일개 매니저인 내가 청진명 씨의 상대가 될 리가 있습니까.”
“내숭은. 댁도 나랑 비슷한 타입 아니야? 우리 꽤 잘 맞을 것 같은데.”
청진명의 그 말에 도율이 뒤를 돌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율의 눈빛을 받아 내는 청진명은 온몸에 짜릿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력을 통한 위압인가? 아니, 이곳엔 그 어떤 마력도 둘에게 간섭하고 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그와 다른 무언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말해 두겠는데.”
도율이 단언했다.
“나는 당신 같은 인간을 제일 싫어해.”
그때 의료진이 들것을 가지고 다가왔다. 도율은 클레어를 그 위에 눕히고 의료진과 함께 경기장 바깥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청진명이 투덜거렸다.
“하루에 두 번이나 차였군.”
그런 그의 근처에 카메라를 들고 스태프들이 다가왔다. 그들이 묻고자 하는 건 결국 하나였다. 다른 이들이 모두 궁금해하는, 결착의 여부.
수증기가 걷히고 난 후에 두 사람의 밴드는 모두 끊어져 있었다. 따라서 무승부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클레어가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가고, 청진명은 상당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으니 사실상 그의 판정승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청진명이 시시한 질문이 다 있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룰을 정했고, 룰대로 결판이 났잖아. 이견의 여지가 없지.”
“그 말은…….”
“보면 알잖아? 무승부지.”
청진명의 대답에 촬영을 하던 방송 스태프는 물론, 관중석에 있는 구경꾼들까지 놀람을 금치 못하고 웅성거렸다.
무승부라고는 하지만, 청진명을 상대로 이토록 좋은 결과를 낸 상대는 많지 않았다. 그것도 이제 막 S급이 된 젊은 헌터는 더더욱. 단순히 결과를 넘어서, 그녀가 보여 준 역량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이 대결은 현장에 있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업계 내의 관계자들도 지켜보고 있다. 아니라 하더라도 이후 분석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을 터였다.
이후 클레어의 평가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결과였다.
* * *
클레어는 청진명이 속한 길드 ‘로얄 로드’가 관리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클레어가 쓰러지는 장면까지 카메라에 잡혔는지 도은이에게 연락이 왔지만,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미뤄 뒀다. 클레어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고 하니 도은이도 납득했다.
클레어는 팔에 링거를 매달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내가 판단한 것과 동일하게, 경기장에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나 이곳의 의사들도 모두 체력을 회복하면 눈을 뜰 것이라 예상했다. 별도의 치료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태.
그런 그녀가 눈을 뜬 건 깊은 밤이었다.
“…아.”
눈을 뜬 클레어가 옆에 앉아 있는 나를 곁눈질로 보고 곧바로 물었다.
“저, 졌나요?”
깨어나자마자 묻는 게 그건가.
“반반.”
“반반이라면……?”
“룰 상으로 무승부라는 뜻입니다. 청진명이 그렇게 인정했어요.”
“그렇군요…….”
클레어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대결에는 그녀의 S급 던전 행이 걸려 있었다. 청진명의 팀에 들어가지 못하면 다른 팀을 찾아야 했다. S급 던전에 다닐 정도의 팀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도은이는 아직 건강하다. 병이 악화될 징조는 보이지 않지만,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한시라도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어 아쉽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 녀석은 클레어 씨가 마음에 든 모양이니, 결과가 어떻든 팀에 넣어 줄 생각이라는데요.”
“그건 들었어요.”
이미 들은 얘기였나.
“그럼 침울해 있을 필요 없잖아요.”
결과적으로 잘 풀린 셈이었다.
패배로 분함을 느끼는 건 과분한 마음가짐이었다. 클레어가 청진명을 이길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으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실제로 대결이 끝난 후에도 청진명은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클레어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 기절까지 하고 말았고. 역량 자체는 그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결과가 좋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보다…….”
문제는 그 과정에 있었다.
“내가 그거 쓰지 말라고 했지.”
“…….”
클레어가 사용한 마력의 주천. 대결 중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못 박아 뒀는데, 그녀는 내 충고를 거슬렀다.
훈련 중에는 가만히 서 있는 동안 마력을 주천하는 것도 버거워했다. 움직이거나 싸우는 도중에 하는 건 어불성설.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기술이었다. 오히려 잘못해서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도 있었다.
내 충고를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걸 하기 직전 클레어가 나를 돌아보는 걸 분명히 봤으니까.
그 잘못을 묻고 있는 건데, 클레어는 눈꼬리를 둥글게 말고 물었다.
“걱정하는 건가요?”
“이봐.”
“익숙하지 않네요. 당신한테 혼나다니. 원래는 반대였는데…….”
클레어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동자만을 내게 향했다.
“이제 내 기분을 좀 알겠죠?”
“하아…….”
그것과 이것은 경우가 다르다.
클레어가 행한 건 자살행위에 가까운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난 위기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납치당해 빌런을 상대할 때도, 게이트나 던전에 들어갔을 때도.
하지만 클레어의 입장에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을 거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모든 걸 밝힌 건 아니었으니까.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나는 단지 필요하기 때문에 클레어를 곁에 두는 것이니까. 그녀를 가르치는 것도, 보조하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돌아서 가지 않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애초에 내가 마석을 구할 수만 있었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 따윈 하지 않아도 됐다. 단순한 계약에 불과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이 일이 끝나면…….
“애초에, 청진명이 합격 판정을 내렸으면 그 후론 적당히 해도 됐잖아. 원래 그렇게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나?”
“그건…….”
효율을 따져 보면 그게 맞았다. 내가 아는 그녀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지 않았다. 정직하고 성실하지만,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앞뒤가 없는 성격이 아니다.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주기 위해 마력을 주천한 건 양보한다 쳐도, 이 지경이 되도록 혹사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다.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알려 준다고?”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에 임하기 전 그녀가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클레어는 대결에서 이기면 내 과거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했다.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건지.
이유는 짐작이 갔다. 내가 가진 힘은 S급 헌터, 그 이상의 경지였다. 각성자라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힘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할 만도 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를 따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반반… 이라고 했지.”
“네?”
우리 둘 사이의 관계가 계약이라면, 거래는 확실하게 해야지.
“반만 가르쳐 주지.”
“반만……?”
“내 과거. 내가 어디서 이 힘을 얻었는지 말이야.”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사실 관계를 전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 말에 클레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정말인가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러자 클레어가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병실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편히 들어.”
“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클레어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우선, 내가 다루는 건 마력이 아니라 내공이라고 부르는 힘이다.”
“내공……?”
“그쪽에서 그렇게 배웠어.”
“그쪽이라니…….”
“다른 세상에 다녀왔거든.”
무림武林.
그들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다른 세상이라고요?”
“그래.”
“말도 안……. 아니, 하지만 던전이나 게이트도 따지고 보면 다른 차원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일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일전에 센터장 영감에게 이야기 했을 때도 들었다.
하지만 처음 들어 본다고 해서 아주 못 믿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결국 균열 너머엔 무언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10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건…….”
“그쪽에서 지냈기 때문이지.”
나는 한 가지 덧붙였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내가 마석을 직접 구할 수 없는 것도 이 내공이 방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마력과 내공은 서로 충돌하는 성격을 가진 모양이야.”
“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클레어가 반박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지 않나요? 각성자인 당신이 어떻게 내공을 받아들일 수…….”
“무슨 소리야, 난 각성한 적 없는데.”
“네? 하지만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균열을 넘어가면 반발해서 터지는 게…….”
나는 그녀가 갖고 있던 오해를 하나 정정해 주었다.
“그거 거짓말이야.”
“예……?”
“원래라면 일반인이 균열을 넘어가는 순간 사망하는 거나 다름없긴 하지. 위험하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고, 사실 균열을 넘어가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 없어.”
길드에 속한 다른 헌터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인으로 알려져 있는 내가 클레어, 백우섭과 함께 던전에 들어갔다 멀쩡하게 살아 나와도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 거다.
그 사실은 나도 센터장에게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클레어도 길드에 속하지 않았으니 누가 따로 가르쳐 준 적이 없던 거겠지.
내가 던전에 들어가도 멀쩡한 건, 그녀도 내가 각성자라고 짐작했기 때문일 거고. 다른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설명하지 않은 거다.
“10년 전……. 일반인…….”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된 클레어가 이마에 손을 짚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건투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해 보였다.
“대답은 충분했지?”
“자, 잠시만요. 한 가지만 더…….”
“서비스는 끝이야. 반만 말해 준다고 했잖아.”
딱 잘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어가 간절히 매달렸다.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제발요…….”
보다 못한 내가 어리광을 받아 주고 말았다.
“말해 봐.”
클레어의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말을 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한참이나 침묵을 이어 나갔다. 두려움에 떠는 듯한 모습이었다.
“10년 전에, 일반인이었던 당신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균열에… 빨려 들어간 거죠?”
의외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