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38
38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클레어는 10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그녀의 지난 세월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기억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빚지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언제나 모난 돌처럼 가슴 한편을 찌르고 있었다.
희생은 도피였다.
자신의 목숨을 저울 위에 올리면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 안에,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했다.
그렇게 그녀는 점차 남들의 배 이상으로 노력하는 헌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난 정이 돌 맞는다는 말이 있던가. 뛰어난 재능과 악착같은 노력, 그리고 위태로운 사명감으로 벽을 두른 그녀를 좋게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인간관계에 미련이 없는 그녀 역시 그런 부분을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클레어의 마음을 열게 한 사람이 매니저인 도은이었다.
솔직하고 당돌한 도은의 태도를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는 클레어의 눈빛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동경하는 갈증이 잠들어 있었다.
A급 헌터로 승격한 날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자신 대신 도은이 뛸 듯이 기뻐해 주었다. 클레어는 다른 게 아니라 거기에 만족했다.
자신이 기쁨이나 즐거움, 행복을 누리는 건 사치다. 하지만 곁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그 감정을 누려 준다면. 태양 볕을 쬐는 시궁쥐처럼, 자신은 그 따스함을 느끼기만 해도 그만이라고.
“아무튼, 언니는 일 좀 줄여야 돼. 욜로 몰라, 욜로? 한 번 사는 인생, 즐겨야 한다고. 사람들이 언니 보고 그 얼굴로 왜 연애를 안 하는 거냐고 나한테 허구한 날 물어보던데,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맨날 던전, 훈련, 던전, 훈련. 세상에 남자 만날 시간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겠냐고! 언니. 내가 연애하라는 소리는 안 할게. 우리 스케줄 좀 비우자.”
“그래.”
“어, 내가 그럴 줄……. 어? 뭐라고?”
“그러자고.”
도은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클레어를 바라봤다. 클레어는 그런 도은을 향해 설핏 웃으며 물었다.
“…여행이라도 갈까, 우리?”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금은 수줍게 물어보는 클레어. 도은은 같은 여자가 봐도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말을 이해했다.
그런 클레어를 바라보며 도은이 중얼거렸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싫어? 나랑 여행 가는 거.”
“나 지금 에어비앤비 까는 중이야.”
도은과 함께하며 클레어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그녀와 어울리는 건 마음이 편했다. 근거 하나 없는 이야기지만, 이 아이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나갈 때마다 빚을 진 누군가에게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도은이 발목이 움직이지 않아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석화병입니다.”
“…네?”
도은을 데려간 병원에서 들은 말에 클레어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몸이 점차 굳어 가는 병인데, A급 이하의 마석을 사용해서 일시적으로 진행을 늦추거나 국소적으로 치유할 수 있으나……. 완치하려면 이 병의 근원이 되는 마력을 지워야 합니다. S급 마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또다.
또 누군가 자신을 이유로 목숨을 잃으려 하고 있었다. 도은이 병에 걸린 건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매니저였다.
‘메두사’.
신화급의 존재인 그것의 마력에 노출된 건 클레어가 S급에 준하는 헌터였기 때문이다. 급이 높은 헌터일수록 급이 높은 마력에 노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매니저인 도은 역시 마찬가지.
자신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은과 사적으로 거리를 둔 채 가능한 접촉을 꺼렸더라면. 목숨을 담보로 하듯이 왕성하게 공략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만약’이 머릿속을 헤집어, 조금씩 나아가던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벌어졌다.
클레어는 다짐했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순 없다고.
이번에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뭐 해?”
클레어가 도은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녀는 펜의 뒤쪽으로 이마를 긁으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철로 된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며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도은이 대답했다.
“후임 찾지.”
“후임… 이라니?”
“아니, 뭐. 갑자기 이렇게 돼서 언니도 불편할 거 아냐? 하다못해 AS는 해 주는 게 도리 아닌가 해서.”
도은이 보고 있던 건 매니저 후보들의 프로필이었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그녀를 대신해 클레어의 매니저로 활동할 사람을 찾기 위해.
클레어는 침대에 앉아 있는 도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가 보고 있던 서류철을 빼앗아, 바닥 위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철이 빠진 서류들이 바닥 위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언니?”
도은에게 있어서, 차갑고 무뚝뚝할 때는 있었어도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구는 클레어는 처음이었다.
“이런 거 찾아보지 마.”
“아니…….”
도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어가 무슨 심정으로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나온다고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언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매니저 없이 헌터 할 거야? 아니면 병원에 있는 내가 계속 매니저 일을 해? 운전도 해야 하고, 필요할 땐 회의도 들어가야 하고, 현장이나 공방도 방문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뭐. 헌터 그만둘 거야?”
“그만둬도 돼, 그런 건.”
“언니!”
도은이 아연실색하며 소리쳤지만, 클레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 매니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야.”
“그치만…….”
“내가 S급 헌터가 될게.”
클레어가 각오를 내뱉었다.
“내가 S급 헌터가 되어서, S급 마석 구해 올게. 그때까지… 기다려 줘.”
“언니…….”
이미 그녀가 이룬 A급 헌터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위치였다. 돈이라면 지금 당장 은퇴해서 평생 놀고먹어도 넘칠 정도로 벌었다. 목숨이 위험한 나날을 보내 온 대가였다.
거기서도 더 위로. S급 헌터가 된다는 건 그보다 한층 더한 고난을 의미했다.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면 유능한 매니저가 필요해. 대충 구한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 온 유능한 매니저가.”
도은도 깨닫고 있었다. 클레어가 가졌었던 처절함을, 이유 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기 위할 뿐인 절박함을.
하지만 그런 클레어도 조금씩 즐기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 변화에 제동을 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에, 도은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만큼 클레어는 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몰아붙일 터였다.
“미안해…….”
“왜 네가 미안해.”
클레어가 도은을 끌어안았다.
* * *
‘로얄 로드’ 산하의 병원.
클레어의 질문에 도율이 대답했다.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게.”
“그건…….”
거부의 뜻을 담은 도율의 말에, 클레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질문 하나에 들떠 있던 그녀의 기분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전한 말의 의미를 곱씹었기 때문이다.
그걸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어쩌면 지금까지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과거를 베일에 덮어 둔 지금도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었다. 도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S급 마석을 구한다. 그 목표가 변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물어볼 이유도 없는 걸까.
“그래도…….”
그래도 클레어는 묻고 싶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고 직감했다. 설령 그 이유가 마음이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일지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재차 묻는 클레어의 목소리에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말을 곱씹던 도율이 툭하고 내뱉었다.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그렇게 됐지.”
“다른 사람이라면……?”
“나도 몰라.”
도율이 손으로 눈매를 덮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갑자기 생겨난 균열이었는데. 던전인지 게이트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문제는 어떤 애가 거기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단 거지. 급박한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도율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꺼낼 때마다 클레어의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커져 가는 심장소리에 더는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슴 한복판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년 전 자신을 구해 줬던 사람이 살아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마음속으로만 말을 건넬 수 있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다. 꿈에만 그리던, 낙관적이라는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이 현실로 다가왔다.
클레어가 가슴을 누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
나예요.
그거, 나예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만큼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그가 구해 준 아이가 자신이란 걸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잘 컸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해 줄까.
도율의 목소리가 클레어의 귓가를 가로질렀다.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
“네……?”
클레어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의 비친 도율의 모습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를 구한 건 단순한 변덕에 불과했어, 그리고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고. 괴로운 일을 겪을 때마다 저주했다. 나 자신과… 내가 구했던 아이까지도.”
누가 부탁하거나 강요한 것도 아닌,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었으면서. 도율은 그런 자기 자신의 비열함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기로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야. 힘을 갖고 있는 주제에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 이 커다란 힘을 갖고도 뭘 해야 할지 제대로 몰라. 고작해야 널 쥐고 흔드는 게 전부지. 따지고 보면 동생의 은인인 너를…….”
기형적인 관계.
도율은 그것이 오래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건 클레어의 상냥함에 기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든지 자신의 가족도 아닌 일에서 발을 뺄 수 있을 텐데도, 그 억지에 따라 주고 있었다.
도율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네가 기대하던 위인이나 영웅이 아냐.”
그 말은 틀렸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클레어에게 있어 도율은 그녀의 목숨을 구한 그녀의 영웅이 맞았다.
클레어가 입을 닫았다.
지금 내가 그 아이였다고, 당신 덕분에 살았다고 말하는 건 그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의 죄책감에 기름을 부을 뿐인 행위였다. 그건 단지 어리광에 불과했다.
그는 클레어를 구한 자신과 자신이 구한 클레어 모두를 저주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체를 밝혀 봤자 더욱 자신을 미워하게 될 뿐이었다.
그녀가 힘을 얻은 건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다. 각성자가 되었을 때, 이 힘을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쓰겠다고 결정한 건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도율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세상에 내던져져 살아남기 위해 힘을 길렀을 것이다. 그런 건 전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불안한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침묵을 유지하는 클레어에게 도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거봐, 들어 봤자 시시한 이야기였지.”
“…그렇지 않아요.”
클레어가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아니었으면 모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도율은 균열 너머의 세상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며, 도은은 클레어라는 헌터의 매니저가 되어 일하다가 병을 얻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결국 이 모든 일을 꼬아 버린 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었다.
이 꼬여 버린 이야기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선은 자기혐오에 빠진 한 남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했다. 도은이 자신에게 그렇게 해 주었듯이.
클레어가 도율을 끌어안았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포옹에 도율이 움찔 떨었다. 잠깐 떠오른 양손이 다시 힘없이 가라앉았다. 클레어는 기대도 좋을 정도로 강하게 도율을 품에 껴안고 있었다.
도율의 턱이 클레어의 어깨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넌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여자야…….”
클레어는 난생처음, 도율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