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39
39화 말 안 듣는 개는
며칠이 지났다.
클레어는 다시 한번 꿈을 꾸었다.
10년 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꾸는 꿈은 단순한 기억의 되풀이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균열이 사람 하나를 집어삼키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져야 했을 사람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저씨?”
클레어가 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그 남자가 돌아봤다.
“아저씨!”
아직 작은 체구였던 그녀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자는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넌 아주 잘해 줬어. 네가 대견하구나.”
“아저씨…….”
클레어가 먹먹한 목소리로 남자의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남자가 클레어의 뺨을 가볍게 덮었다. 그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클레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도율의 얼굴이었다.
“아…….”
클레어가 꿈에서 깨어났다.
벌떡!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자면서 머리를 흔들었는지 긴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온 햇빛은 뾰족하게 딱 떨어져 그녀의 뺨을 찔렀다.
꿈이었다. 꿈을 꿨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잠에 취해 몽롱해 있던 그녀가 순식간에 제정신을 되찾았다.
“…미친.”
퍽, 퍽하고 그녀가 애꿎은 이불을 걷어찼다.
“미친년! 미친년!”
클레어의 사정없는 주먹이 베개에 꽂혔다.
그녀가 헌터라고 해도 마력의 사용을 억제하는 동안엔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일반인에 불과했다. 덕분에 침구는 주먹 자국을 따라 구겨질 뿐, 그 수명은 무사할 수 있었다.
‘왜, 왜 그딴 꿈을 꾸는 건데!’
중학생들도 안 꿀 법한 꿈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굉장히 샤방샤방했다. 이름 모를 꽃이 잔뜩 핀 동산에 정체불명의 빛무리가 떠다니는 곳이었다. 마치 대충 그린 순정 만화처럼.
누워 있을 때 눈꺼풀 위로 햇빛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허억, 헉…….”
격렬한 주먹질으로 조금은 진정된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도율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클레어 씨? 괜찮아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아니, 뭔가 큰일 난 것 같은 소리가…….”
“나가요! 옷 갈아입게!”
도율이 걱정해서 손해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슬며시 방문을 닫았다.
클레어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도율은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이제는 앞치마를 두른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 게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식사 준비. 그것만은 그가 한창 날카로웠던 시기에도 놓치지 않고 해 주던 일이었다.
그 외의 부분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도율의 태도는 다시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그녀에게 반말을 하는 일도 없어져, 둘이 있을 때에도 다시 존댓말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그것이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되돌아온 건지, 아니면 단순히 평화로운 일상을 연기하고 있는 건지.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그런데…….’
클레어는 도율이 식사보다 한발 앞서 준비한 커피를 홀짝이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얼굴이…….’
클레어는 도율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뜯어 봤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하게 됐다는 자각조차 가지지 않은 채, 그녀가 그 결과만을 의문으로 삼았다.
도율은 상당히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나 덩치가 제법 있고, 10년이나 다른 세상에서 죽을 위기를 거쳐 온 것치곤 아무 고생도 하지 않은 듯한 말끔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각성자가 신체를 활성화시켜 노화가 늦게 진행된다 하지만, 젊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다. 시간을 역행하듯 어려지는 일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도율 씨.”
“왜요?”
“몇 살이에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듯, 도율이 접시를 나르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호적으로 확인했을 거 아닙니까?”
“생각보다 더 어려 보여서. 나이 속인 거 아니에요?”
“그런 걸 속여서 뭐 합니까? 그리고 속였으면 뭐, 어쩌려고요?”
“알고 보니 나보다 어린데 막 반말 하고 그랬던 거 아니… 야?”
클레어가 용기를 쥐어짜 경어를 생략했다. 그러면서 도율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 그것 참 재밌는 가설이라는 듯이 도율이 마른 웃음을 내뱉고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까불래?”
“다, 당연히 농담이죠…….”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호적상으로도 연상이었고, 애초에 클레어가 어른이 되기도 전인 10년 전에 도율은 이미 성인이었다.
혼자서 찬찬히 고민하면 바보 같은 농담을 할 필요도 없이 올바른 결론에 다다를 주제였다.
다행히 도율은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맞은편에 앉아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 뻔뻔한 얼굴이 얄미워서, 클레어가 물었다.
“근데 왜 요즘엔 그거 안 해요?”
“그거라뇨?”
“막 반말하고, 윽박지르고, 째려보고. 또…….”
클레어가 손가락을 접으며 자신이 당한 괴롭힘을 나열하자, 도율이 헛기침을 했다.
유치하고 배은망덕한 행동이었다. 그런 태도를 보였던 걸 그 역시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에게 아주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어물쩍 넘어갈 줄 알았다.
이렇게 그녀의 입으로 문제 삼으면 할 말은 없었다.
“응?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예요?”
“…….”
클레어도 딱히 탓하려고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 억울했을 뿐이다.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찾아온 건 그날 밤, 클레어와 도율이 병원에서 함께 밤을 지낸 이후의 일이었다. 약간의 옛날이야기와… 포옹을 나눈 이후에.
결국 클레어는 그 일을 자기만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것이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말로만 사과할 거예요?”
“말로만이라니……. 선물을 사 줄 수도 없잖아요. 어차피 클레어 씨 카드에서 나가는 돈인데.”
도율은 클레어에게 받은 카드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업무에 필요한 일이든, 생활품이든 전부 다. 그 둘을 딱히 구분하지도 않는데도 한도를 모르게 긁히는 카드였다.
“그럼 나랑 외출 좀 해요.”
“외출이라면 매일같이 하잖아요.”
“그건 일 때문이고.”
“그럼 이건 사적인 일이에요?”
“당연…….”
당당하게 긍정하려던 클레어가 대답을 멈췄다.
도율을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건 며칠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가 선뜻 따라 나서 줄지 확실하지 않아서 제안을 미루고 있었을 뿐.
그런데 남녀 둘이 사적으로 만날 약속을 맺는 걸, 세간에서는 데이트라고 부른다. 부끄럽지만 그녀에게는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런 주제에 묘한 환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렇게 낭만 없이 처음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일 관련은 아니어도 사적인 건 아니니까요. 착각하지 마시고.”
“당연히 착각은 안 하죠.”
단언하는 도율의 말이 클레어에겐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니까.”
“…네?”
도율의 입에서 나온 말에 클레어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도율은 오히려 경직된 클레어가 의외라는 듯이 굴었다. 자신은 당연한 소리를 한 것뿐인데 놀랄 이유가 어디 있냐는 듯이.
“클레어 씨가 청진명 팀에 들어가서 순조롭게 손발 맞추는 중이고, 익숙해지면 S급 던전도 공략하기 시작하겠죠. 운이 좋으면 곧바로, 아니어도 언젠가 마석을 구할 수 있을 테고요. 그러면 도은이 수술 날짜도 잡을 수 있고, 치료하고 나면…….”
도율이 담담한 목소리로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이어질 내용은.
“이 계약 결혼을 유지할 이유도 더는 없어지는 거고요.”
두 사람은 부부였다. 행정상의 부부.
그리고 그것은 병에 걸린 도은을 치료하기 위한 마석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그 병이 다 낫고 나면 두 사람이 부부로 있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틀린 게 있으면 정정해 달라는 듯한 도율의 침묵에, 클레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네요.”
클레어는 다가올 그 순간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 *
백우진은 언제나 담배를 태우는 곳에서 돗대를 물었다. 하얀 연기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죽이던 차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는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꺾은 후 플레이아데스 사옥으로 들어섰다.
백우진이 길드장 집무실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문을 두들기자 들어오란 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백우진의 입장은 부사장. 그러나 실제론 온갖 잡일을 떠맡아 하는 잡부에 가까웠다.
길드장 백건영은 길드 경영을 배우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정말 중요한 일은 공유해 주지 않았다. 백우진이 모르는 일을 몇 개나 굴리고 있을지 몰랐다.
“눈치 없긴, 클레어 말이야. 좀 밟아 놓으라고 했잖아.”
“…….”
백우진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대답했었다. 백건영은 길드도 없는 여자가 너무 잘나가면 본보기가 안 된다는 말을 했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치졸한 방해 공작을 펼치기엔 길드의 입지가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더 많았다. 투명한 자금 운용, 직원 복지, 길드 내 정치 파벌 와해와 같은 필요한 일들이.
그런 상황에서 고작 그런 거에 시간을 들이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길드장은 어차피 자신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백우진이 보고했다.
“여론이 워낙 좋습니다. 청진명과의 대결이 업계 안팎으로 큰 인상을 줘서 언론 플레이도 효과가 없을 겁니다.”
“쯧… 청진명 그 새끼는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러게 왜 일을 키우고 지랄이야, 지랄은.”
한차례 불만을 내뱉은 백건영의 분노의 화살이 다시 백우진을 향했다.
“근데 우진아, 너는 왜 이렇게 일머리가 없냐. 정공법으로 안 되면 꼼수를 쓰란 말이야, 꼼수를.”
“그게 무슨…….”
“뭐라도 하라고, 뭐라도! 팬이 준 선물인 척 하고 독이라도 타서 먹이든가, 파파라치를 붙여서 사생활이라도 파 봐! 그 정도 열정은 보여야 할 거 아니야!”
백건영의 말에 백우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제가 왜 그따위 짓에 열정을 보여야 합니까?”
“뭐?”
자리에 앉아 눈을 부라리던 백건영이 벌떡 일어나 백우진의 앞까지 다가왔다.
“야, 이 새꺄! 우섭이가 그년 때문에 불구가 됐어. 네 사촌동생 백우섭이! 넌 빡돌지도 않냐? 피도 눈물도 없어?!”
백우섭은 현재 마나 코어가 부서진 채 회복하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듣기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백우진은 당시 현장에 있던 팀의 리더 김대길에게 사건의 전말에 대해 가감 없이 전해 들었다. 사실상 길드 내에서 직함을 제외한 입지가 없다시피 한 백우진이지만, 그의 아버지 백건우에게 신세를 졌던 김대길의 배려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백우진이 알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이라면 길드장인 백건영이 어떻게든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백우섭이 당한 일은 자업자득이었다.
백우진이 아직도 이마에 붙어 있는 밴드를 매만졌다. 회복이 빠른 각성자라면 모를까, 일반인인 그는 아직도 이마의 상처가 채 낫지 않았다. 백우섭을 위해 분노하라는 건 따르기 어려운 지시였다.
“…나한테 피와 눈물이 있었다면, 클레어 컴벨이 아니라 당신을 증오하는 데 썼을 겁니다.”
날카로운 백우진의 태도에 백건영은 화를 내긴커녕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안 할 거냐?”
“…….”
“너도 알잖아. 우섭이가 그렇게 됐으니……. 너한텐 좋은 기회겠지? 네 아버지가 피땀 흘려 바닥부터 일궈 놓은 길드… 물려받고 싶잖냐.”
백우진이 어금이를 빠득 깨물었다.
백건영은 그런 백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이만 나가 봐.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 보고.”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던 백우진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길드장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백우진의 뒷모습을 웃는 모습으로 지켜보던 백건영이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책상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던 그가 전화를 연결했다.
“어. 장 실장. 나야.”
[…예, 길드장님.]“저번에 말한 그거, 장 실장이 좀 알아봐야겠다. 백우진이 얘는 계속 개길 눈치다.”
[알겠습니다.]장 실장이라 불린 사내는 가타부타 말없이 바로 명을 받들었다.
백우섭이라는 대체재가 없으니 백우진을 구슬리기 쉽지 않았다. 머리가 나쁜 각성자 아들이 있어서, 고지식하지만 맡은 일은 악착같이 해내고 마는 조카를 쥐락펴락하기 딱 좋았는데.
“말 안 듣는 개는…….”
백건영이 몽둥이 위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