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4
4화 허락보다 용서 구하는 게 더 쉽다잖아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온 건 세련되게 지어 놓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드넓은 부지에 작은 공원까지 딸린 곳이었다. 건물 위쪽에 붙은 간판으로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울 미래 병원?”
클레어 씨가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가요.”
“…….”
정말 이곳이 내가 와야 할 곳이 맞는지. 그렇다면 내가 왜 이곳에 와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두려웠다.
그녀는 내게 이곳이 내가 가장 먼저 와 봐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렵다고 해서 눈을 돌려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그녀의 등 뒤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많은 1층 로비에서 쭉 뻗어 나가 인적이 드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까지 올라갔다. 그 위의 버튼들은 숫자가 없었다. 환자나 방문객이 드나들 수 있는 최상층이라는 뜻이다.
‘VIP룸 전용 플로어…….’
벽면 문구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제법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병실 팻말은 몇 개 보이지 않았다. 클레어 씨는 그중에서도 1801호라고 쓰인 호실의 문 앞에 섰다.
그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널찍한 병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탁 트인 전경이 비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병실에서 마치 호텔과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병실의 한쪽에 가림막을 친 구역이 있었다. 그곳에 병상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클레어 씨가 내게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는 마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가 가림막을 열었다.
차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림막이 펼쳐졌고 병원 침대가 보였다.
그 위에선 환자복을 입은 여자가 태블릿으로 동영상을 보며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다리 사이에 패드를 두고 손으로 젓가락과 그릇을 들어 올린 채로.
뒤늦게 누군가 가림막을 열었다는 걸 깨닫고 귀에 꽂힌 무언가를 뽑았다.
“아, 언니 왔어? 미안. 나 무한도적 보느라 못 들었…….”
내 동생, 이도은.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내 동생은 무한도적을 본방송 챙겨 보고 재방송 챙겨 보고 다시 보기 챙겨 보는 애였다.
10년이 지나서도 볼 줄은 몰랐다. 저 프로그램은 폐지도 안 하나?
“누구… 아, 아니. 설마 오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 이거 NG. NG야, 이거. 다시. 다시 해.”
“뭘 다시 해.”
“언니! 큐!”
동생이 클레어 씨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클레어 씨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가림막을 다시 쳤다.
잠시 후 가림막을 다시 열자 도은이는 병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던 이불을 평평하게 덮고 양손을 명치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눈을 감았다.
툭툭.
클레어 씨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보고 시작하라고?
“…도은아.”
내 목소리에 동생은 스르르 눈을 떴다.
“오빠……?”
얘는 혹시 연기자가 된 게 아닐까?
입가에 묻은 짜장 소스만 아니었어도 참 그럴싸했을 텐데.
* * *
“10년 동안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고 자빠진 거야?”
“미안. 기억이 안 나.”
이번에도 각성자 지원 센터에서 써먹었던 변명을 사용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실종된 사람이 10년 만에 나타난 것도 믿기 어려운 얘기니까, 차근차근 얘기해야지.
동생이 투덜거렸지만, 아마 사실대로 말했어도 소설을 쓰고 앉아 있다고 투덜거렸을 거다.
“그러는 넌 왜 입원했어?”
“나? 별거 아냐. 커리어 우먼으로 살다 보니 피곤해서 그냥 꾀병 좀 부리는 중.”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클레어 씨가 이쪽을 바라봤다.
“아차, 큰일 날 뻔했네. 저쪽이 우리 사장님이거든. 사장님 앞에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지?”
“사장님?”
“응, 사장님. 사장님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비싼 병실에 갇혀 있겠어? 진작 집에 갔지.”
클레어 씨는 헌터라고 들었다. 그리고 헌터를 사장으로 둔 직업이라면, 꼭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너 헌터 매니저 일 하냐?”
“어.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나 보더라고. 미안.”
“…네가 미안할 건 아니고.”
헌터 매니저는 어머니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은연중에 그 직업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게 원인이었다. 동생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딱히 나는 동생이 헌터 매니저 일을 한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10년이나 잠수 타 놓고 동생이 밥 벌어먹고 사는 거 가지고 훈수 둘 처지는 아니지.”
“알긴 아네?”
“야.”
“농담, 농담.”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나 검진 시간이다. 잠깐 다녀올게.”
“같이…….”
“아~ 진짜 호들갑이야! 됐어.”
동생은 슬리퍼를 끌며 밖으로 나갔다.
병실에 남은 건 나와 클레어 씨 둘뿐이었다. 피차 할 얘기가 있어 보였다. 우리는 창가를 나란히 보고 옆에 섰다.
“도은이의 사장님이라고…….”
“그 호칭은 그만둬 주세요.”
“그럼 클레어 씨.”
“네, 좋아요.”
나는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도은이는 왜 입원한 거죠?”
“석화병 때문이에요.”
“석화병……?”
들어 본 적 없는 병이었다. 하지만 헌터 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은 들어 보지 못한 희귀한 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고, 지금까지의 난 관심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메두사의 마력에 노출되면 걸리는 병인데, 마력이 있는 헌터들은 괜찮지만, 일반인들이 노출되면 걸리는 병입니다. 아무래도 매니저는 현장 답사나 던전 부산물도 다뤄야 할 때가 있으니…….”
직업병이란 소리였다.
“증상은?”
“이름 그대로 몸이 돌처럼 굳는 병이에요.”
“겉보기엔 멀쩡하던데…….”
“그게 더 위험하죠. 위험한 혈관이나 장기가 굳으면 그대로 가 버리는 거니까.”
심근경색이나 뇌졸증도 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병이라고 들었다. 지방으로만 막혀도 사람이 쓰러지고 죽기도 하는데, 돌이 되어 완전히 굳어 버리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다.
“치료법은 있나요?”
“수술을 하면 되는데, 문제가 있어요.”
“어떤… 수술비라면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돈이 문제였으면 진작 해결했죠.”
하긴. 생판 남인 매니저를 위해 VIP 병실 비용까지 지불하는 마음씨 넓은 사장님이다. 수술비 시원하게 긁고 완치하는 게 낫지, 병실 가격만 따박따박 나가게 둘 리가 없다.
“메두사는 S급 몬스터예요. 메두사의 마력을 지우려면 S급 마석이 필요하죠.”
“마석 가격이 문제인 겁니까?”
“매물 자체가 없어요. 웃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거죠. 또 실제로 매물이 있다 치더라도, S급 마석은 국가에서 거래할 수 없도록 통제하고 있어요. 연구 개발 용도로 사용하거나 헌터 장비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죠.”
이어서 정부 입장에서는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헌터 사업의 기술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도록 취한 조치라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건 돈이 있어도 마석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당장은 A급, B급 마석으로 중화 치료만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S급 마석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거라면, A급이나 B급 마석 역시 상당히 값어치를 하는 물건일 거다. 그런 걸 상태 호전을 위해서 소모하고 있다면 상당히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그럼 아무것도 못 하는 겁니까? 그 S급 마석이라는 게 없으면?”
“제가 반드시 구해 올 거예요.”
클레어 씨는 자신이 S급 헌터라는 설명을 더했다.
S급 헌터라고 해서 S급 마석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던전엔 등급이 있는데, S급 던전이 자주 발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자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 동료들과의 전리품 분배 문제도 있고.
차라리 어디 절벽에 핀 꽃이라도 꺾어 오라고 하면 내가 다녀올 수 있는데.
‘……해 버려?’
단신으로 S급 던전에 다녀온다는 상상도 해 봤다. 그러나 치기였다.
던전 공략은 국가 단위의, 그것도 S급 정도 된다면 세계가 주목하는 수준의 작전이다. 몰래 다녀오긴 어렵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면 귀찮아진다는 건 이미 한 번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다. 비단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주변도 문제다.
그렇다면 결국 클레어 씨가 마석을 구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지금까지 하신 일만으로도 단순히 사람 좋다고 하기엔 지나친데, 제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에겐 이곳에 와서 처음 생긴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클레어 씨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이 아주 뒤처지는 건 아니지만, 외국의 헌터가 굳이 찾아와 활동할 정도로 던전 사업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는 아니었다. 그녀가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동양의 작은 나라에 찾아온 건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터.
“진짜 가족이 보기엔 우스우시겠지만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이든, 무슨 일이 있었든. 클레어 씨가 도은이를 흔쾌히 돕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해야 했다. 그게 도리에 맞았다.
“동생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레어 씨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저기… 고개를 드세요.”
너무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중요한 사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동생이 돌아왔다.
“요. 나 없는 사이에 둘이 좀 친해졌어?”
“보다시피.”
“잘됐네.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하니까.”
“함께?”
앞으로도 알고 지낼 사이이긴 하지만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은인이긴 하지만 결국 클레어 씨는 동생을 끼고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인 거니까.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다.
그런 내 반응에 동생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언니, 아직 얘기 안 했어?”
“이제 막…….”
“그래? 그럼 그냥 내가 말할까?”
클레어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비장한 분위기에 나까지 다 긴장됐다. 그와 동시에 불안했다. 내 동생은, 뭐라고 할까, 어머니를 닮았다. 막 나간다는 뜻이다.
“미안, 오빠. 나 치료하느라 A급 마석을 좀 써야 했거든.”
“…그래. 그런데 그게 왜?”
내가 몰래 숨겨 놨던 마석을 갖다 썼다는 얘기도 아니다. 난 그런 물건 같은 건 갖고 있었던 적 없고, 동생을 살리기 위해 썼다면 이해했을 테니까.
동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데 마석은 개인 거래가 잘 안 되거든. 헌터 산업에 재투자하라는 정부 방침 때문에. 치료 용도로 사용하려면 4촌 이내의 친인척에게만 가능해.”
우리 가족은 친척이 없다.
그렇다면 그 A급 마석의 출처는 어디지?
“그래서 언니가 갖고 있는 마석을 썼지.”
“…그렇구나.”
그런데 어떻게?
클레어 씨는 누가 봐도 외국인처럼 생겼다. 아무리 박박 우긴다 해도 우리 집 호적에 넣어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거 알지? 결혼하면 0촌인 거.”
동생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 줬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된다고? 아니, 된다고 진짜 그걸 한다고?
동생이 검지로 나와 클레어 씨를 번갈아 가리켰다.
“두 사람, 행정상으론 부부야.”
나는 이 이야기에 사실 여부를 묻기 위해 클레어 씨를 바라봤다. 내 동생이야 원래부터 이런 애였지만, 쿨한 인상의 클레어 씨가 이걸 수락했을 리가 없다.
“…….”
하지만 그녀는 한쪽 팔을 붙잡고 미묘하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한번 동생에게 되물었다.
“진짜?”
“원래 허락보다 용서 구하는 게 더 쉽다잖아.”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부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