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40
40화 우리 이런 사이입니다
“당신, 나 없이 살 자신 있어요?”
“…예?”
클레어 씨가 문득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내가 깎아 준 사과를 아삭 베어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의 티브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 안겨서 같이 티브이를 보던 흰돌이도, 옆에 있던 나도 쳐다보는데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둘이 언제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습니까?」
「다물어 봐.」
그런 얘기일 리가 없었다. 우리는 헤어짐을 전제로 한 계약 결혼 관계이니까.
“무슨 말인지 잘…….”
내가 되묻자 클레어는 티브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가 스르르 미끄러져 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집도 내 거고.”
클레어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당신 모는 차도 내 명의고. 입고 있는 옷이며 먹는 것까지 다 내 통장에서 나가는 돈인데. 당신, 정말 나 없이도 살 수 있어요?”
“…….”
그렇다.
클레어와 헤어지고 난 후엔 현실적인 문제가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매니저를 할 이유도 없으니 계속 월급을 타서 쓰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도은이는 계속 클레어의 매니저로 남아 있을 순 있겠지만, 그게 해결책은 아니었다.
여동생한테 용돈 타서 쓰는 백수 오빠라니. 그건 좀 아니잖아.
“계획이라도 있어요?”
“…아뇨.”
부끄럽지만 전혀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저쪽 세상에서 손에 넣은 힘은 분명 강력하지만, 헌터로 활동할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내공의 힘에 짓눌린 마력들이 모두 망가져 버리는 탓이다.
이는 던전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전리품인 마석과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경제적인 자립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헌터라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게 되었다.
쉬운 답이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남들보다 10년 뒤처진 만큼 더 노력해야겠지. 늦깎이로 대학을 가든, 기술을 배우든 간에.
「…전 둘이 찢어지게 되면 무조건 사장님 따라 갑니다.」
의리 없는 자식.
누가 데려온 건지 잊은 모양이다.
“나이도 많고, 학력은 멈췄고, 경력은 없고, 모종의 이유로 헌터는 못하니까……. 변변찮은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면서 살아야겠네요?”
“윽…….”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저쪽 세상에서는 사람 때려죽일 능력만 있으면 어떻게든 먹고살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곳에서와는 다른 생활, 평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 가고 싶었다.
앞으로 조금이다. 도은이가 치료를 받고 나면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문제는 진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싫으면…….”
클레어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녀가 흰돌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길러 줄까요?”
“…농담도.”
저 녀석과 같은 서열이 되는 건 사양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고민이었다. 원래라면 돌아온 직후에 해야 했을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치여 지금까지 미뤄 왔을 뿐이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 번호를 아는 건 몇 없을 텐데.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연락처에 저장을 해 놓은 상태고, 매니저로 일한다 해도 실질적은 연락은 도은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명함을 돌린 적도 따로 없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전화를 받으려 했다.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도망치는 거 아니고요?”
“…그런 거 아닙니다.”
타이밍이 절묘하다고는 생각한다.
“여보세요?”
방문을 닫고 전화를 받자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율 씨?]“맞습니다. 누구시죠?”
[강 팀장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소속도 밝히지 않고 그냥 강 팀장? 게다가 실장이라는 직함은 너무 애매했다. 뭘 하는 사람인지 알려 주지 않겠다는 의미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강 팀장……. 용건은?”
[말이 잘 통해서 좋군요. 근처에 2층짜리 카페가 있는 곳 아시죠? 거기서 봅시다.]“그러죠.”
달칵.
전화가 끊어졌다.
이 근처까지 찾아와 준다는 친절한 상대방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내가 어디서 지내는지 꿰고 있다는 뜻.
내가 그걸 눈치 못 챌 바보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고, 알면서도 일부러 말한 거다.
외출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오자, 내 옷차림을 확인한 클레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예요? 왜 옷을 갈아입었어요?”
“잠깐 나갔다 오려고요.”
“내, 내가 바가지 긁어서 나가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약속이 생겨서…….”
“당신 친구 없잖아요.”
있다. 한 명 정도는.
얼마 전에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엔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가 아니었다. 둘이 보자고 했으니 클레어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튼 다녀올게요.”
그러자 클레어가 쪼르르 달려왔다.
“나… 나가지 마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는 이마를 짚었다.
* * *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상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나 역시 상대의 얼굴은 알지 못했지만, 강 팀장이라는 자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흉포한 기운을 가진 자는 단 한 명이었으니까.
먼저 자리를 잡은 강 팀장의 맞은편에 앉자,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등불을 두드렸다.
“대화가 새 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그런 아티팩트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걸 봐 주시죠.”
강 팀장이 테이블 위로 사진을 흩뿌렸다. 몇 장의 인화된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프레임 속에 나와 클레어가 찍혀 있었다.
몇 장을 들어 사진을 확인하는 내게 강 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고생 좀 했습니다. 클레어 컴벨이 쓰는 아티팩트, 설마하니 렌즈로 촬영하는 사진까지 망가뜨릴 정도인 줄은.”
“아아.”
누군가 우리 모습을 찍고 있었다고.
분명히 그런 일이 있긴 했다.
강 팀장은 뻔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표정 연기가 대단한 작자였다. 내가 사진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물었다.
“이거 합성이죠?”
“…….”
강 팀장의 미소에 금이 번졌다.
클레어가 아티팩트를 써서 인식을 방해하고 있는 걸 무효화했다면, 분명 그것도 일종의 마력을 사용하는 장치의 힘을 빌린 것이다. 실제로 언젠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내공을 펼쳐 그 행위를 무마했다.
마력이 쏘아 보내진 방향으로 정안을 통해 확인해 보니 고장 난 카메라를 떨어뜨리고 렌즈를 들여다보는 눈을 감싸던 파파라치가 한 명 있었다.
그때는 유명한 헌터에게 이런 일은 굳이 따질 일도 아닌 건가, 하고 넘어갔었다. 설마 누군가에게 고용된 자였을 줄은.
강 팀장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배짱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빠르게 파악했다.
“후……. 역시 보통 분은 아니시군요.”
“끝입니까?”
한숨을 내쉬고 항복을 인정하는 줄 알았던 강 팀장이 다시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걸까요?”
“무슨 뜻이죠?”
그가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걸치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중들은 이게 합성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게 그럴싸한 사실이고, 파고들면 사실이라는 거죠.”
“사실이라니?”
“이도율 씨, 당신은 클레어 컴벨의 매니저죠.”
“맞습니다.”
“그런데 왜 둘이 같은 집에 들어가서 같은 집에서 나옵니까?”
표정이 굳었다.
강 팀장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웃음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변명하려 해도 소용 없습니다. 매니저라 집에 잠깐 들렀다는 말도 안 통합니다. 둘이 밤에 들어가는 사진, 아침에 같이 나오는 사진도 찍어 뒀으니까요. 모두 백업되어 있습니다.”
“…….”
“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 사정이 복잡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클레어는 얼마 전 결혼을 발표한 유부녀 아닙니까? 이건 제법 큰 타격이 아닐지…….”
뭐라는 거지?
클레어 씨가 결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건가? 아무리 헌터의 개인 정보가 협회나 센터 차원에서 보호되는 거라고 해도, 협박을 할 거면 배경은 좀 잘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마를 짚었더니, 상대는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 팀장은 방심하고 있었다. 먹이를 잡았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내 입에서 항복에 가까운 말이 나오자 그는 열성적으로 떠들었다.
“저희도 사실 이도율 씨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클레어에 대한 내부 폭로를 좀 도와주시면 됩니다. 월급이 밀렸다든가, 폭언, 폭행이나 갑질을 당했다거나. 증언만 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보복은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도율 씨의 신변은 저희가 확실하게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저흴 믿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 힘이 있다 이겁니까?”
“예.”
강 팀장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힘을 정말 나를 위해 쓸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렇다 치고, 그 뒷배가 작은 집단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심증을 통해 생각을 굳혔다, 강 팀장은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사람이라는 걸. 대화 이후에 플레이아데스 길드에서 무언가 행동을 취하면 심증은 확신이 될 터였다.
캐낼 만한 정보는 캐냈다.
나는 태도를 바꿔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그러자 강 팀장이 미소를 지우고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랑하는 여자라 안 되겠다 이겁니까?”
강 팀장의 말에 나는 목을 주물렀다. 일단은 장단을 맞추는 게 넘어가기 편해 보였다.
“…예. 사랑하는 여자라 안 되겠네요.”
“그 선택, 후회할 겁니다.”
강 팀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 * *
강 팀장이 말한 후회할 거라는 선택의 여파는 며칠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클레어와 떨어져 대기하는 사이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였다. 화면엔 [진호]라고 쓰여 있었다.
웬일로 전화를 다 했을까.
“여보세요?”
[야, 도율아! 씨발 이거 어떡하냐!]“…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반대쪽 귀로 바꿔 들었다.
[네 마누라 바람 폈댄다! 씨발!]“…일단 진정해 보고. 욕도 그만하고.”
[넌 이게 진정하게 생겼냐?!]“천천히 말해 봐.”
진호가 숨을 후욱 들이쉬더니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야! 내가 기자로 일한다고 말했지? 근데 지금 속보 올라온 거 봤는데, 클레어 컴벨이 바람을 폈댄다! 아니, 결혼했으니까 불륜이지! 사진도 다 떴어!]그 얘기였나.
내가 피식 웃고 물었다.
“상대는 누군데?”
[매니저랜다!]“그 매니저가 누구냐고.”
[잠깐만. 지금 확인해 볼게.]잠시 후 얼빠진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율?]“그래, 그리고 내 이름이 뭐지?”
[…이도율.]“문제 있냐?”
[…없네?]사진을 봤을 테니 동명이인도 아니란 걸 알았을 거다.
[아이, 씨. 야. 저번에 봤을 때 말을 해야 했을 거 아냐!]“쪽팔려서 말 못했다, 낙하산이라서.”
[하……. 그래.]“끊는다.”
[어.]전화를 끊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잠시 후.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클레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을 달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이밀고 말을 거는 걸 보니 기자들로 보였다.
사람들 소문 참 빠르네.
“한 말씀 해 주시죠!”
“매니저인 이도율과 어떤 관계입니까!”
기자들을 뿌리치며 다가온 클레어가 조수석 쪽 자리를 향해 돌며 말했다.
“…무시해요.”
이게 무시한다고 될 일인가.
기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교 국가인 한국에서 불륜 이슈가 터졌으니, 아무리 인기가 높고 능력이 대단해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런 클레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말을 못 해요?”
“하지만…….”
클레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기자들을 향해 물었다.
“우리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물었죠?”
클레어의 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이었다. 그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 왼손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양은 다르지만, 두 개가 쌍을 이루는 하나.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서약을 맺은 두 사람에게만 가능한 마법.
─키잉.
두 사람의 반지가 붉게 빛나며 느슨하게 이어진 실이 나타났다.
“우리 이런 사이입니다.”
이윽고 카메라 플래시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